서평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라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라
인간은 세상의 시작과 인류의 기원에 관하여 관심이 많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각 시대마다 주어진 문화와 문명과 과학 등 여러 가지 기술이 이용되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창세기는 세상의 시작을 알릴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원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특별히 1-11장은 기원에 대한 부분이 더 집중되고 강조되어 있기에 많은 이들에게 연구의 대상이 된다.
창세기 1-11장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 있었던 실제 사건을 기록해 놓은 역사인지, 신화와 허구를 바탕으로 당시의 문학 형식을 빌려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근거로 하되 이미 오래전 사건이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원형적인 사건인지 지금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아직까지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하나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고 각 교단이 성경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이 책 또한 세 명의 학자, 호프마이어와 웬함과 스팍스의 주장을 소개하고 논평하며 가장 분명한 원역사가 무엇인지 의견을 모아간다. 학자들이 정교한 논리와 근동의 문학과 문화를 비교 대조하며 원역사를 풀어간다. 각 학자의 주장은 먼저 원역사가 기록된 성경의 장르를 분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며 그 해석으로 얻을 수 있는 의미를 서술한다. 그리고 이 틀을 가지고 네피림과 노아와 바벨탑 사건에 적용하는 예를 보여준다.
세 명의 학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주장과 해석은 달라진다.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진 호프마이어의 경우 기본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추구하고 웬함은 사실로서의 역사를 인정하나 원형적인 역사로 해석한다.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가 고대의 문학방법을 이용하고 최종적으로 편집자에 의해 각색되었다고 아주 개방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원역사를 풀어간다.
아담이라는 인물을 예를 든다면, 호프마이어는 아담은 인류역사에서 실존하였고 인류의 시초이며 인류의 창조와 구원과 종말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존재라고 주장할 것이다. 웬함은 아담이 실존하였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너무 희미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인류에게 구원과 교훈을 위한 원형적인 인물 정도로 볼 것이다. 스팍스는 고대문학처럼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고 신앙적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로 볼 것이다.
필자는 책을 보며 누구를 따르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세기의 원역사를 기록해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미 과학과 기술을 통해 우주의 시작이 138억년이나 되고 지구의 나이도 65억년 된다고 드러난 현실에 여전히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으로 문명을 발달시켜서 이 세계에 심어놓으신 비밀을 발견해가는 것 또한 우리의 사명일 것이다.
고대근동에서 원역사를 읽은 독자와 초대교회 시절에 원역사를 읽은 독자는 그 해석이 다를 것이다. 고대에서는 우주창조가 성전의 창조와 완성이라는 당시의 문학과 신화의 형식과 배경으로 원역사를 이해하였을 것이고 초대교회는 문자적인 해석보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전제 아래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교훈에 집중하여 읽었을 것이다. 각 시대마다 독자의 상황과 문화적 발전과 문명의 상태는 다르기에 그 시대 독자에게 주어진 해석과 이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지고 문학과 비평 기술이 고급화된 시절에 이런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 성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불경한 것인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아무런 도구 없이 단순히 문자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목적은 단지 성경이 읽혀졌던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창세기를 포함하여 성경은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기는 하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더 우선시 되는 책이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고대근동의 역사와 문화는 이전보다 더 많이 알려졌고 그 시대의 문학과 신화 또한 우리에게 많이 소개되어 성경을 이해하는데 유익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근동 유산의 발견들과 과학은 더 발전하여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더 밝은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신화와 과학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것을 비교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찾는 것을 불경시 하는 것은 오늘을 향한 해석을 차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끝으로 원역사는 우리에게 창조가 언제이고 인류의 시작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계적인 답을 가르쳐주기 위해 원역사를 주신 것이 아니다. 과학 또한 단순히 창조의 시기와 기원을 알아맞추기 위한 도구이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창조물과 역사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며 그 앞에 겸비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비평 기술과 계속 발굴되는 고대의 자료들은 성경을 난도질 하고 일반 문학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더 깊이 해석하고 풍성한 의미를 도출하기 위한 도구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유일한 신학이 없는 것처럼 유일한 해석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있다면 우리는 고대근동의 사고와 해석을 진리로 여기며 사는 고리타분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성경의 해석은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하나됨과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의 능력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시대를 향한 해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타인을 향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교단마다 분열해 온 역사를 볼 때 편협하고 교만한 해석이 성경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 같다. 창세기 원역사 논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