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믿음에 기초한 비평
믿음에 기초한 비평
안타까우면서도 슬픈 현실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공부와 신학적 사고도 졸업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신칭의’와 같은 몇 가지 교리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신학공부는 목회의 현장에서 더 이상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사실 이것이 심각한 함정이다. 메시지의 주체인 하나님과 그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메시지의 대상과 현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다분히 목회적 상황들에 근거한 자기중심적 메시지들이 주류를 이룬다.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교회 비전을 희생하면서까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예수님을 보라 진리를 위해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감수하셨다.) 설교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설교 비법’, ‘교회 성장 비법’, ‘은사와 능력을 행하는 비법’을 쫓아다닌다(더 심각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다시 보는 성서비평
신학교를 졸업한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럼에도 본서와 같은 복음서의 형성 과정에 대한 비평서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신학교를 다닐 때 호기심이 있어서 책을 찾아 읽으려고 시도를 한 적은 몇 번 있지만, 공부와 사역, 그리고 먼 장거리를 오고가는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지만 3년의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숙제를 하기위해 수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성서비평에 대한 수업이나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다만, 비평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지금도 다수의 목회자들이 성서비평에 대해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굳이 성서비평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현재의 신학생들이 아니라 20년 전의 신학생들을 말한다). 필자 또한 본서를 만나기전까지 성서비평에 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가끔씩 논문들 사이에서 등장하거나 성경주석에서 언급되는 정도의 수준에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서를 읽으면서 성서비평학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복음서에 관하여
본서는 현재의 복음서(정경)로 확정되기까지 그 형성과정과 역사성의 관점에서 왜 정경으로서 복음서가 4개이며, 각각의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동일한 예수에 관한 사건에 대하여 왜 각각의 복음서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마태, 누가, 요한에서는 각각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자신들만의 기록이 존재하는가, 사복음서가 동시에 탄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순서와 과정에 의해 형성되고 탄생되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동등한 정경으로서 가치를 가지는가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본서는 총 6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1장부터 3장까지는 어떻게 복음서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복음서는 현재의 4권으로 정경이 완성되었는지(많은 성도들은 각각의 복음서가 성령의 영감으로 한 번에 완성되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는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믿음에 기초한 비평’에서 설명할 것이다.)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닌 네 권으로서 발견되는 불일치와 차이에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동안의 사본학적, 다양한 비평학적 내용들을 종합하여 소개하고 다루면서 복음서가 구전 복음과 강력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숙제를 안고 있지만 초기 교회는 예수의 전승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복음서의 기록목적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였으며, 복음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와 교회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구전과 비방록의 가능성에 대해 지지한다). 즉,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를 서술해서 예수라고 불리는 한 인물,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세상의 진정한 주님이 지금 바로 우리에게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이다(226페이지). 4장부터 마지막 6장까지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과의 문제와 다시 한 번 복음서의 저술 목적과 장르(문학적 장르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서 형식이 고대 전기문학적 형식으로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꾸며내거나 신화적 허구성을 가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왜 네 개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에 대해 다룬다(당시 복음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코덱스가 40-50여개가 존재하였고, 당시 교회들 안에서 돌아 다녔다고 한다).
믿음에 기초한 비평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은 성서비평에 관해 매우 부정적이다. 몇 달 전 미국에서 설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성서비평에 관해서는 말도 끄집어 내지 못했다(오랜 만에 만났고, 짧은 만남의 시간동안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성경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성경에 대해 성령의 영감을 부정하고, 성경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작품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비평학에 대해 필자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비평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자격은 없다. 그럼에도 현재 그리스도교 신학은 비평학적 관점이 보편화 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비평학에 대해 전문가들조차 비평학이 가지는 강점과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이 학문이 매우 정직하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특히 양식비평은 이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다만, 현재의 한국 일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구전, 비망록, 다양한 자료들에 근거해 복음서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한다(그동안의 성경공부 방식과 설교를 통한 방식에서 정경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고, 신학의 형성과정에 대해 무지했다). 그렇다고 하여 성령의 영감이 부정되거나 약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이 모든 과정이 성령의 역사이다. 즉, 성령은 이렇게 역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4개의 복음서를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비평학의 연구, 특히 자료 비평연구는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을 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저자도 주장하고 필자도 공감한다).
필자는 본서를 음미하기 위해 일부러 하루에 100페이지씩 나누어 읽었다. 물론 이해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종종 앞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필자는 본서를 요약하였다(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색인을 중심으로 각 성경본문과 인물별로 분류하여 정리할 것이다. 적어도 본서는 비평학을 통해 네 권의 복음서를 한층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