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죽음의 초보자
처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을 때 죽음을 준비하는 신학적인 책인 줄 알았다. 출판사가 이레서원이었기에 그랬다.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이 시대 교회와 성도,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였기에 더더욱 그런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구입해서 읽어나가면서 이레서원에서 나온 책치고는 ‘이례적’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책이 문제가 있거나 함량미달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주 다른 성격의 책은 아니긴 하다. 이전에 마르바 던의 책들도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예외적인 책은 아닐 듯 하기도 하다.
사실 죽음과 심각한 질병 앞에서 제3자라면 신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제이거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문제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욥의 친구들처럼 일주일 정도는 그 곁에서 슬퍼하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통 받는 이들의 감정표현에 짜증을 내거나 신학적 판단을 하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아픔은 아픔일 수밖에 없고 신학적으로 아무리 죽음과 사후세계를 나름 정의 내린다 하더라도 그 과정을 직접 당장 감내해야 하는 이들에게 이 문제는 간단할 수 없다. 설혹 그 죽음에 대해 신앙으로 감내한다 할지라도 죽음은 주관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으로 개개인에게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안녕’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이전에 죽음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논하고 정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그 신학과 신앙이 흔들리거나 회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자신의 육신과 삶으로 견뎌야 할 때 그 속에는 부딪힘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마치 운전면허를 땄다 하더라도 실제로 도로 주행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고 교습 받은 대로 운전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누구나 초보자일 수밖에 없다. 운전석 옆에서 왜 운전을 그따위로 하느냐 말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본인이 운전대를 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저자는 자신이 겪는 질병과 죽음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러한 자신의 감정과 대처를 기술한다. 그러한 저자의 기술은 감성적이고 어떤 때는 욥의 부르짖음처럼 저자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당혹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죽음에 직면한 초보자일 수밖에 없는 것을 어이할까?
저자의 이런 기술은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고 또 죽음에 직면한 각각의 사례는 다를 수밖에 없기에 그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각기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시한부 병실에서 나와는 다른 이유로 죽어가는 환자를 보며 그 존재 자체와 그의 이야기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어느 정도의 교집합으로 인해 약간의 도움이라도 받는 것이―실제로는 큰 도움이겠지만―우리네 인생이다. 그런 위기와 고통 속에서는 탁월한 신학자보다도 나와는 다른 고통이지만 같이 부르짖고 같이 아파하는 이를 통해 더 큰 힘을 얻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