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약하고 다짐하는 자의 마음
책 제목 발원은 ‘서약하고 다짐하는 자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저자 김선우 시인이 포항에 왔다. 포항 국어교사들의 모임과 양덕 마을학교에서 주최한 모임의 일환이었다. 나는「김선우의 사물들」이라는 책으로 그녀의 섬세함을 알고 있었고, 한겨레 칼럼으로 이미 그 건강한 저항성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기꺼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미 좋아는 했었지만 새로 불붙은 마음으로 작가의 모든 책들을 찾아 다시 읽어보았다.
읽은 책의 작가를 만나는 것은 마치 천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 가능한 인물을 보게 되는 것 같은 즐거움이다. 심지어는 책속 지면에서 관념화되어 납작하게 죽어있던 사람이 살아 걸어 나오는 것 같은 신기한 느낌이기도 하다. 마흔여덟의 작가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고 앳되다. 아이를 낳지 않은 비혼이라도 그렇지 어찌 이 정도일 수 있는지, 목소리마저 깨끗하고 맑았다. 그 어떤 기존 기득권의 위선에도 물들지 않은 자연스럽고 고운 상태였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 등 그녀의 모든 시와 에세이는 다 좋다. 이번엔 소설 장르를 읽었다. 참여적 시인이 쓴 역사소설이어서 어떻게 모드전환 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강신주가 팟캐스트에서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작품이다. 원효의 ‘화엄삼매경’을 공부한 철학자겸 평론가인 본인이 먼저 원효 얘기를 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것도 기억났다.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은 2년 전부터 했었는데 작가의 방문이 계기가 되어 드디어 미뤄두었던 숙제를 마친 셈이었다. 원래 숙제라는 단어 자체는 좀 재미없는 의무의 느낌인데 이 숙제는 아주 재미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히려 끝나 간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글의 내용과 감성 수준이 놀라웠다. 작가의 나이나 모습이 어떠하든 이런 게 내공인 것이리라. 접신 수준의 환희다. 옛사람을 되살려 오늘에 맞게 생생하게 세우는 능력이 탁월하다.
원효는 운제산, 오어사와 소요산, 분황사 등 많은 장소의 주인공이다. 너무 많이 듣고 만나져서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계급 제한이 뚜렷했던 삼국시대 신라 말기의 사람, 태어나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죽은 6두품 집안의 사람, 외로운 성장기, 화랑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승려가 되기를 바랐던 삼촌의 가르침, 화랑이 된 후에도 살생을 하지 않다가 종국엔 승려의 길을 택한 사람, 전쟁에 승병으로 출전하기룰 요구하는 국가에 맞서 의료승으로 참전한 사람,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숭고한 생명을 받아 보듬어 살려준 사람, 권력을 탐하지 않고 사람들 마음 속의 부처를 일깨워 준 사람, 저잣거리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 아픔을 함께 하며 솔선수범한 사람, 거부할 수 없는 권력에 희생당할 위기에 있는 임신한 여인 요석을 위해 스스로 승복을 벗고 파계를 택한 사람이 바로 원효이다.
조국, 충(忠),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지배 권력의 욕망에 소모되는 희생일 뿐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삼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는 인간이 경계지어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조국을 꿈꾸었다. 전쟁이 나라의 운명인 시대에 전쟁에 반대한다고 입 밖에 내어 말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당시 실세가 된 김춘추는 진성여왕을 허수아비로 세우고, 의상에게 왕사 자리를 약속하며 원효와의 유학동행을 권면했다. 이에 ‘국사’라는 권력을 탐했던 진골귀족 출신 의상은 기꺼이 수락했지만, 원효는 모든 실체가 마음 관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일체유심조’를 깨달은 후 당나라 유학길에서 돌이킨다. 중국에서 돌아온 유학파들의 정통성 분란과 계파싸움에 넌더리가 났던 그는 서라벌 아미타림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백제 포로와 혼혈인 둥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저잣거리에서 설법을 전한다. 붓다의 맨발, 맨발의 붓다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귀속지위로 인한 계급차가 모든 사람들을 짓누르던 시대에 온갖 차별현상은 오직 관념의 조작일 뿐이었다. 불경이나 건축, 탑보다 진리가 삶속에서 구현되는 방식이 더 중요했다. 진리는 어느 한순간에 오는 오도송이 아니고 가장 필수적인 건 오직 行, 부처의 행동을 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의 행동을 하면 도둑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남,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깨닫고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운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다.
당시에 가장 큰 절인 황룡사의 입들은 전쟁에 미친 왕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김춘추 같은 지배자들은 백성의 우둔함이 군주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라 생각했다. 원효는, 이들은 천년 후에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것이므로 백성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국불교라는 이념으로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을 때 많은 승려들은 이에 반대했다. 깨달은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처로 경배해준 승려들이 부처는 오직 신라 국왕이라는 생각에 저항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눈에 가시였던 김춘추는 원효를 요석 궁에 강제로 넣고 이미 임신 중인 것을 이용해 그를 파계시켰다. 아니 원효자신이 김춘추의 의도적인 곡해를 수용했다. 스스로 파계해 자신을 버리는 자비의 길을 택했다.
사실 원효에게 요석은 절대 권력자 아버지에 의해 희생물이 될 위기에 있는 임신한 상태의 여자였다. 그러나 그들을 구하기 위해 민중의 지지를 뒤로 한 채 승복을 벗어던진 것이었다. 사랑과 자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명망과 위신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과감하게 던진 사람이었고 승복을 벗어던지고 더욱 완전한 승려가 되었다. 민중불교를 실천하며 참 지지를 받았고, 술이 든 호리병을 들고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예수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겹쳐서 생각나기도 했다. 영어로도 그의 이름이 Saint Wonhyo인 까닭이다.
왕실과 연결된 항복사와는 달리 그의 절 초개사는 요승들이 모여 반국가적 모의를 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굴하지 않았고 왕이나 귀족이 주인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주인 되는 불국토를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늘 커다란 법당이 아닌 분황사 노피곰 천막에서 어려운 백성들과 상담했고, 손수 허드렛일을 자처하며 모든 시공간에서 불법을 궁구했다. 황룡사 백고좌 법회대결에서의 원효는 바알숭배자들과 벌인 한판승부로 유일신 하나님을 증명해낸 ‘엘리야’ 같기도 했다. 어지럽고 불의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한 방이어서 통쾌하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많은 선지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원효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불의한 인간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옛 책이 오늘 날에도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원」은 소설이므로 원효와 요석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도 많이 묘사되고 있지만, 평론가 강신주는 그 둘의 육체적인 접촉은 없었을 것이라는 쪽에 확신을 두고 있다. 실제야 어떻든 간에 이 책을 통해 원효의 고독과 자유 그리고 고뇌와 득도의 과정이 생생한 역사와 함께 내게 전달되었다. ‘빛나는 노을빛’이라는 뜻을 가진 요석과 새벽이라는 아명을 가졌던 원효. 세속을 넘어 영혼으로 서로를 지지했던 이들의 관계는 참 아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오랜 시간을 넘어 그 시대를 현재화시켜 내게 선사해준 작가가 고맙다. 곧 단풍으로 물들 운제산. 이번 주엔 오어사 원효암에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