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평

예수 이야기의 능력,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의 예수 이야기 이해

크리스찬북뉴스 | 2017.10.22 22:56
예수 이야기의 능력,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의 예수 이야기 이해 Jesus and Justice /Peter Goodwin Heltzel /Yale University Press/김상일 편집위원

예수 이야기의 능력,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의 예수 이야기 이해(the Power of Jesus Narrative, and the Appropriation of Jesus Narrative in American Evangelicalism)피터 헬첼(Peter Heltzel)의 예수와 정의(Jesus and Justice)

 

예수 이야기는 매력적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이야기에는 매력을 많이 느끼지요. 좀 더 넓게 보자면, 기독교 신학은 성경 전체를 모두 예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 이야기에 침잠되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왜일까요? 이 서평에서 그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각설하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문화에도 이야기가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까닭은 그 이야기들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말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우리의 이야기의 조각들을 문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 틀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문화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 틀을 조금씩 바꿔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그게 우리의 이야기든, 문화 안에 있는 이야기든, 현실의 특정한 면에 초점을 맞춘 재구성이며, 그런 특성상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 까닭에 이야기는 우리가 특정한 때에 현실의 어떤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의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Dan McAdams)는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들(The Stories We Live By)이라는 책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마침내 우리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써내려 갑니다. 맥아담스에 의하면, 이야기의 기본적 구성단위는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이미지들과 심상들입니다. 우리를 자극하고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이미지들과 심상들은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의 확장된 단위인 특정한 메시지 속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TV나 잡지, 혹은 온라인 SNS에 뜨는 광고들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이런 광고들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심상들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 이변에 깔린 메시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즉 우리가 따라야 할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런 메시지들은 항상 가장 큰 단위인 어떤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받아들인 이미지들과 심상들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하고, 더 나아가서 특정한 이야기를 우리 삶의 이야기로 이해하도록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에 관해서,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이끄는 목적지에 대해서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가 그의 최근작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서 쇼핑몰의 비유를 통해서 간결하고도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한 것 같아서 여기에 인용합니다.

 

쇼핑몰은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짧은 글이나 교훈적인 강의를 통해서 소통하는 대신, 행복한 삶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서,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3차원 아이콘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행복한 삶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는 말은 그 안에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가 특정한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전달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제품 광고에는 항상 행복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직업에,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며, 가족들의 관계 또한 너무 좋은, 그런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설득되는 이야기들이고, 우리가 가치 있게 보는 삶의 이야기를 꿈꾸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각 이미지들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광고들이 보여주는 삶을 꿈꾸면서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해 갑니다.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예수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도 똑같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성경에 실린 목적은 예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와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들(예를 들면 쇼핑몰이 들려주는 이야기)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들은, 특별히 궁극적인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 잡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히브리서 성경 공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3장을 지난주에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3장 첫 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을 던지더군요. 특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에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부활 속에 담긴 그 분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부활 속에 담긴 그 분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 본다는 말은, 쪼개서 생각해보면 결국 예수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인데, 그 말은 우선적으로는 예수 이야기에 담긴 이미지와 심상을 생각해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TV에서 광고를 접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야 그 심상과 이미지가 우리의 것이 되고, 그를 통해서 그 메시지가 우리의 이야기에 통합되며, 그렇게 해야 비로소 예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려면 예수 이야기에 침잠되어서 살아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 안에 예수의 이야기가 들어와 살아 숨쉬고, 춤추고, 우리를 움직이고, 이끌며, 때로는 우리의 이야기와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는 때가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이야기는 이미 말한 대로 우리와 다른 시대에 완전히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쓰여진 이야기인 동시에, 굉장히 다층적이며 다양한 면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예수 이야기의 어떤 부분만을 취사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로 소화하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 이야기의 다른 어떤 부분은 우리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로 소화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 다루는 피터 헬첼(Peter Heltzel)의 예수와 정의(Jesus and Justice)는 이런 예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굉장히 흥미로울 책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가 어떻게 그 조직이나 기관의 일하는 방식이나 여타 기관들과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주목하면서 읽는다면 아주 흥미로울 겁니다. 책 자체는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지루할 수 있는 책이긴 합니다.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라는 딱딱한 주제를,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칼 헨리(Carl F. H. Henry) 라는 두 묵직한 사상가가 대변하는 두가지의 거대한 서로 다른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뿐 아니라, 그 두 큰 흐름이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네 개 단체, 즉 제임스 돕슨(James Dobson)Focus on the Family, 리차드 시직(Richard Cizik)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존 퍼킨스(John Perkins)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Association, 그리고 짐 월리스(Jim Wallis)The Sojourners라는 각각의 단체들이 가진 신학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진화하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미국 복음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은 딱 그렇게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주의의 초기 역사를 추적하고, 그 속에서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후에, 곧바로 킹과 헨리라는 두 인물의 신학 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곧바로 앞에서 언급한 네개 단체의 신학과 역사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런 각각의 인물들과 기관들이 어떻게 예수 이야기를 소화하고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에서 풀어내려고 하는가, 그 질문을 하면서 읽으면 이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은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헬첼이 구분하는 백인 복음주의(White Evangelicalism)와 예언적 흑인 기독교(Prophetic Black Christianity)가 각각의 경험에 따라서 어떤 예수의 이미지와 심상을 취사선택했고, 그를 통해서 예수의 어떤 메시지를 선택적으로 소화했으며, 그런 메시지가 어떤 맥락 속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두 흐름이 겉으로만 보면 서로간에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두 흐름 모두 사실은 19세기 초반 케인 리지(Cane Ridge)의 부흥회에서 양측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데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헬첼은 백인 복음주의와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가 서로 공유하는 요소가 사실은 18세기의 부흥주의이며, 따라서 두 흐름에는 모두 복음주의의 특성으로 자주 인정되는 요소들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항상 언급되는 David Bebbington이 규정한), 이를테면 1) 회심에 대한 강조, 2)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3) 행동주의, 그리고 4)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강조와 같은 외형적 요소들이 공유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며, 백인 기독교가 예수 이야기 중에서 승리나 부활같은 이미지와 심상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삼는 반면, 흑인 기독교는 실패, 좌절, 절망같은 이미지와 심상을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의 주된 요소로 가져오게 됩니다. 헬첼이 책 초반부에서 언급하는 여류 기독교 운동가였던 Harriet Jacobs (1813-1897), 성 토요일의 신학(theology of holy Saturday: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부터 부활하신 주일 사이, 토요일에 무덤에 계시던 때를 성경의 내용과 신학적 전통을 통해서 신학화) 을 통해서 노예로서 자신이 겪는 설움과 고통을 예수의 고난 이야기 속에서 통합해서 이해하며, 그를 통해서 신앙을 키워 갑니다. (이후에 Jacobs는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간구함을 통해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평생을 노예 해방 운동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이 단지 Jacobs라는 한 개인이 보여주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고, Sojourner Truth (1797-1883), Fanny Lou Hammer (1917-1977), 그리고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같은 인물들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들이 벌인 운동 속에 잘 녹여져서 나타난다는 것이 헬첼의 주된 논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의 신학과 삶은 계속적으로 현대 복음주의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의 경험과 신학은 복음주의 역사와 신학의 합법적인 내러티브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헬첼이 책 전반을 통해서 주장하는 바라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전반적) 우월감과 (육체적) 열등감 속에서 계속적으로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일조하거나, 암묵적으로 그런 탄압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복음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D.L. Moody의 경우,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반대했지만, 자신의 부흥 집회는 흑.백이 분리된 채로 진행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맙니다. MLK Jr.와 함께 복음주의의 큰 흐름을 아우르는 인물로 대변되는 Carl Henry 또한 비록 인종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MLK Jr.가 이끌었던 흑인들의 인종간 평등과 해방을 위한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헬첼은 이런 Henry의 소극적 태도의 기저부에, DL Moody의 인종 분리에 대한 소극적 인정의 기저부에 그들 각각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지적합니다. Henry(그리고 Moody)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로 받아들인 예수 이야기는 예수의 주되심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지금의 신앙인들이 적극적으로 가야 할 길로 받아들이는 예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백인 복음주의는 계속적으로 노예제 이후에도 인종 차별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협력해 왔다는 것이 헬첼의 진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그림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운동은 이제 점점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가 가진 요소들을 복음주의 운동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에 통합시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첼은 이런 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로 Shane Claiborne, Malinda Berry, Bart and Tony Campolo, Ruth Padilla DeBorst, David Gushee, Lisa Sharon Harper, Gary Haugen, Sammy Rodriguez, Adam Taylor, Richard Twiss, Jonathan Wilson-Hartgrove같은 인물들을 언급합니다. 이런 인물들은 더 이상 백인 남성이 대다수가 아니며, 여성과 유색인종이 그 안에 많이 있으며, 이런 구성 비율은 앞으로도 더 다양해질 것이라는 것이 헬첼의 추측입니다. 최근 한국계나 아시아계 중에서도 복음주의권에서 발돋움하는 리더들이 꽤나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Soong-Chan Rah 교수를 비롯해서, Eugene Cho 목사, Francis Chan 목사 등등) 아마 미국의 복음주의는 앞으로 점점 다른 양태로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 이야기는 다층적입니다.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정말 다양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히브리서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미국 복음주의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더 깊은 층위에 놓여있는 진리, 즉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음을 통해서, 우리 삶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속에 통합되면서 신앙이 성장해 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일 겁니다. 이것은 사실 한국 기독교가 돌아봐야 할 진리이기도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 계열에 속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기독교 또한 백인 복음주의가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성공을 추구하며, 승리의 내러티브만이 유일하게 유효하며, 실패나 절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한국 기독교가 이제껏 붙잡고 달려온 예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도전은, 예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어온 걸까요? 그 예수가 정말로 성경이 그려내는 온전한 예수가 맞는 건지, 우리가 예수 이야기에서 의도치 않게 빼먹고 고려하지 않은 요소는 없는 건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요. 한국 기독교는 이제 점점 성장세보다는 하향세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실 교세가 성장하느냐 감소하느냐와 관계없이, 예수 이야기에 계속적으로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름뿐인 기독교인이 되고 말 겁니다. 그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자세히 보기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2,659개(10/133페이지)
구원의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구원의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세대주의와 구속사
D. 제프리 빙햄, 글렌 R. 크라이더/임채의/CLC/조정의 편집위원


처음으로 참석했던 목회자 콘퍼런스(Shepherds’ Conference)에 존 맥아더 목사와 R. C. 스프로울 목사가 함께 강사로 섰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과 성경의 무오성을 힘 있게 선포했고, 패널 토의 시간에는 시종일관 서로 존중하며 건설적인 토론을 나눴다. 흥미롭게도 한 사람은 세대주의 종말론을 지지하는 개혁주의 목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언약주의 관점으로 종말을 바라보는 개혁주의 목사였다. 존 맥아더 목사는 개혁주의 신학을 스프로울을 통해 많이 전수받았다고 겸손히 밝힌 적이 있다. 놀라웠던 것은 두 사람 모두 하...
진정한 기다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진정한 기다림을 바라보아야 한다
천국을 향한 기다림:잊혀진 그리스도인의 소망
래리 크랩/이은진/비아토르/문양호 편집위원


몇 년 전만 해도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대해 개인적으로 상당히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담이나 심리에 관계된 책을 읽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독서의 비중에 있어서 그쪽에 관계된 책들이 적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실제로 그런 책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상담이나 심리에 대한 것을 거부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일반상담서들은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기에 그렇다고 하지만 기독교 상담학자나 서적들에 대해 특히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기독교 상담서들도 일반 상담이나 심리 서적만큼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이...
우리가 몰랐던 예수, 우리가 몰랐던 은혜 우리가 몰랐던 예수, 우리가 몰랐던 은혜
우리가 몰랐던 예수: 관념과 예상을 뒤엎는 상상 이상의 복음
데인 오틀런드/정성묵/두란노/조정의 편집위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생애를 다룬 각각의 기록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한 마태복음을 사자 복음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묘사한 마가복음을 송아지 복음으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한 누가복음을 인자 복음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영적인 면이 강조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으로 불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분류할 뿐이지, 복음서가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광은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충만하고 다채롭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청교도가 알려주는 교회 부흥 원칙, 영적 성장법 청교도가 알려주는 교회 부흥 원칙, 영적 성장법
은혜 안에서 번성하라: 청교도들이 사용한 영적 성장법 12가지
조엘 비키, 브라이언 헤지스/조계광/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한때 청교도는 괴짜로 손가락질받았다. 기독교인이 은혜 안에 누리는 자유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검은색 복장에 즐겁고 유쾌한 모든 것을 금지하면서 따분한(?) 성경 공부나 종교활동만을 일 년 내내 강요하는 광신도(?) 집단처럼 여겼다. 극소수의 청교도가 실제로 그런 삶을 추구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 곧 일반적인 청교도의 삶과 신앙, 신학과 실천을 재발견하게 해준 여러 고마운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그리고 현재 가장 활발하게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청교도를 알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해하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해하기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해설
송다니엘/토브북스/고경태 편집위원


대한민국 사회의 지성과 교회의 지성은 “프랑크푸르트 학파(The Frankfurt School)”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겨레 신문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자들 모인 노아의 방주였다”(2013.3.27.)라는 제목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해서 소개했다. 신문에서 보된 인물들은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 에리히 프롬(1900~1980), 레오 뢰벤탈(1900~1993), 프란츠 노이만(1900~1954), 오토 ...
무모한 듯한 여정 같지만 보이지 않는 구름기둥을 좇아 떠나는 여정 무모한 듯한 여정 같지만 보이지 않는 구름기둥을 좇아 떠나는 여정
도널드 밀러의 오색사막 순례이야기
도널드 밀러/허진/잉클링즈/문양호 편집위원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도널드밀러의 ‘오색 사막 순례 이야기’는 무언가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그의 책들은 꽤 유명했고 특히 미국에서는 상당한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 와닿지 않아 책 장을 처음부터 넘기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치 로드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로움 속에서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한 듯한 이야기는 상당히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의 책의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자꾸 내게는 어릴 적 교회생활과 교회친구들이 떠올랐...
가벼운 것 같지만 가볍지 않은... 가벼운 것 같지만 가볍지 않은...
주일 오후 3시, 생각을 줍다
송미현 글/그림/좋은씨앗/문양호 편집위원


한동안 기독교출판에는 한두 컷 정도의 그림에 한두 문장의 묵상글이 담긴 책이 유행했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웹툰 형식의 기독교만화들이 등장했었다. 기독교내의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기도 하고 성경의 몇몇 책들의 주제들을 다루거나 신학적 주제를 다루는 등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러한 시도들은 두껍거나 무거운 주제를 기피하는 시대적 풍조에 젖어있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교회의 어두움에 대해 불만과 분노하는 세대들의 관심을 끌었고, 실제로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책...
안식의 날을 폐하지 말라 안식의 날을 폐하지 말라
안식의 날: 제4계명의 재발견
이안 H. 머레이/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주일성수”라는 말이 있다.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일”이란 뜻이다. 많은 교회에서 주일성수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이를 어기면 마치 유대인이 안식일을 어기면 안 됐던 것처럼 정죄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바리새인처럼 주일을 지키는 일 자체만 강조하다 보면 주일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으로 사람이 주 안에서 얻는 행복과 유익을 되려 막을 수 있다. 주님께서 “주의 날”을 주신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한편 오늘날 율법주의적인 주일 ...
예수님이 약속하신 진짜 복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약속하신 진짜 복은 무엇인가?
칼빈의 팔복 강해
존 칼빈/김광남/비전북/조정의 편집위원


로버트 화이트는 이 책의 서론에서 주석과 설교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설교들은 주해와 관련하여 이 주석과 거의 동일한 해석 방향을 따른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대한 더 정교하고 미묘한 해석과 메시지를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의 그리스도인 청중에게도 지속적으로 적용한다는 측면에서는 주석과 다르다”(11쪽). 이 한마디로 <칼빈의 팔복 강해>를 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독자에게 칼빈을 통해 성경 본문을 풀어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특별한 유익 때문이다. 모든 설교가 당시 청중...
철학과 믿음, 철학과 신학 철학과 믿음, 철학과 신학
철학, 믿음과 함께 걷다
안영혁/목양/고경태 편집위원


“철학으로 세계를 묻고 믿음으로 다시 보다”, 마치 틸리히(Paul Tillich)의 상관 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틸리히는 '실존의 물음'과 '신학의 대답'을 추구했다. 그러나 안영혁 박사의 <철학, 믿음과 함께 걷다>는 그런 관계성 유지보다는, 한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살면서, 신학을 하면서 겪은 철학에 대한 좌충우돌 사고(思考)를 고대철학에서 현대철학까지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안영혁의 <철학, 믿음과 함께 걷다>를 읽으면서, 불현듯 존 프레임의 <서양 철학과 신학의 역사>이...
한약 같이 달여 먹어야 하는 책 한약 같이 달여 먹어야 하는 책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
송인규/비아토르/문양호 편집위원


송인규 교수님의 책을 그래도 상당히 관심가졌다고 생각했고 꽤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못읽은 것은 그럴수 있다 치더라도 제목도 몰랐던 책이 있었다는 것은 좀 자존심(?)에 금이 간다. 이번에 비아토르에서 개정증보판으로 낸 ‘아는 만큼 깊어지는 신앙’은 시리즈로 기획된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의 다음을 잇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십여년 전에 나왔을 때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보다는 주목받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좀 그런 면이 있는 듯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를 인상적으로 읽기도 했지만 주...
당신의 교회는 건강하십니까? 당신의 교회는 건강하십니까?
건강한 교회: 교회 건강의 개혁된 실천
도널드 J. 맥네어, 에스더 L. 미크/유정희/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고, 참석자가 혜택을 얻어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은사를 가진 사람이 모여 자기 은사로 서로를 섬기는 유기적인 조직이다. 그래서 교회에 컨설팅이 필요하다는 말이 굉장히 모순처럼 느껴진다. 가령 교회가 성경적으로 건전한 교리를 매주 강단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지 혹은 배우고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사항으로 가면 더 복잡하다. 성도의 교제가 충분히 친밀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을까? 성도의 영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 보통 컨설팅...
포스트코로나, 위드코로나 시대에서 교회가 선택할 유일한 가치 포스트코로나, 위드코로나 시대에서 교회가 선택할 유일한 가치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리더십, 정의로운 교회
박윤성/글과길/고경태 편집위원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가 입은 심각한 충격은 성도 숫자 감소보다도 교회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를 넘어서 부정적인 평가이다. 그러한 평가를 받은 요인은 교회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 있다고 우리는 평가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여러 방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윤성 목사(익산기쁨의교회 담임)도 코로나 시대의 리더십을 제언하는데, “정의로운 교회”를 테마로 설정하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저자는 한국 교회에 있는 불공정한 모습을 제시했다...
목회적 관점으로 읽는 에베소서 목회적 관점으로 읽는 에베소서
맥아더 신약 주석 에베소서
존 맥아더/전의우/아바서원/정현욱 편집인


기다렸던 책이 출간되었다. 언젠가는 누가 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손에 넣고 읽어보니 감개무량하다. 존 맥아더 목사는 한국 내에서도 워낙 유명한 저자이기에 필자의 설명이 굳이 필요 없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먼저는 상당히 보수적 성경관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학자다움을 갖춘 목회자라는 점이다. 두 가지의 특징은 존 맥아더의 전부라고 말해도 될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매일 성경을 주해하고 설교해야 되는 설교자라면 그 어떤 주석보다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책...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교회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교회에게
신좌파의 성혁명과 성정치화
칼 트루먼/윤석인/부흥과개혁사/조정의 편집위원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소돔과 고모라를 보는 것만 같다. 사적인 미디어 방송에서 동성연애,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것은 당연하고 공영방송에서도 이제 쉽게 성 혁명의 결과물을 발견한다. 사회 저명한 학자, 강사나 지도자,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지금의 시대 정신이 옳고 바른 길로 가는 중이라고 외친다. 대중의 다수가 이 흐름에 동조한다. 군대에서 동성끼리 성관계를 맺은 행위는 무죄, 이를 조사한 행위는 조사받는다. 자기 스스로 여성이라 느끼는 남성 수영선수가 여성 수영대회 상을 휩쓸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세상에 닿는 복음 전략 세상에 닿는 복음 전략
탈 기독교 시대 전도
팀 켈러/장성우/두란노/서상진 편집위원


전도..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전도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80-90년대만 하더라도 전도가 참 잘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하는 총동원전도주일이라고 하는 이름하에 그동안 기도하며 사랑을 베풀었던 대상자를 교회로 모시고 와서 복음을 듣게 함으로 결단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는 교회에 관한 말을 세상 속에서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많은 고민이 있다. 펜데믹 이후에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또한 그 방법은 무엇인지에...
설교자의 반성 설교자의 반성
설교자의 인생
임종구/다함/서상진 편집위원


“설교자의 인생” 책 제목이 참 좋다. 이 책의 저자인 임종구 목사는 10여년 전 경산의 한 교회의 모임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모임에서 자신의 개척 시절의 처절하고 힘들었던 삶을 가감없이 전해주었고, 그런 삶이 자신의 목회의 뿌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됨을 강조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자기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지만, 그런 삶이 쉽지 않다. 이 세상에 설교에 관한 수많은 세미나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세미나 속에서 방법을 찾고, 강의를 하는 그 사람을 찾지 않는다. 세미나를 하기까지 그가 어떤 삶을 ...
세상이 교회를 비필수적이라고 말할 때,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세상이 교회를 비필수적이라고 말할 때,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교회의 재발견: 왜 그리스도의 몸은 필수적인가
콜린 핸슨, 조너선 리먼/개혁된실천사/조정의 편집위원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미국은 락다운(이동금지명령)과 셧다운(폐쇄 명령)으로 모든 비필수적 모임과 행사, 심지어 사업장 운영 등을 강력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건강 외적인 영역의 위험성을 고려하면서 “필수적”(essential)인 일들에 한하여 규제를 완화했다. 이런 정책의 전환은 대한민국에서도 유사하게 이루어졌다. 문제는 국가가 교회를 ‘필수적’이지 않다고 규정하고 모이기를 폐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참 교회는 스스로 ‘필수적’이지 않다고 인정할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
성경이 말하는 영적 전쟁,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싸워라 성경이 말하는 영적 전쟁,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싸워라
일상의 영적 전쟁: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굳건히 설 것인가
데이비드 폴리슨/권명지/토기장이/조정의 편집위원


<일상의 영적 전쟁: Standing Firm in Spiritual Battles>이란 제목을 봤을 때, 그리스도인의 성화, 영적 전쟁을 다룬 책이라고 생각했다. 죄인이 거듭나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과정,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육체와 세상과 마귀와 맞서 싸우는 과정을 다룬 책이라 생각했다. 부제인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굳건히 설 것인가”도 저자인 데이비드 폴리슨이 발전시킨 성경적 상담학의 주요 주제인 신자의 영적 성장과 관련된 책이란 걸 말해준다. 추천인...
변한 세상, 변함 없는 복음, 어떻게 전파할까? 변한 세상, 변함 없는 복음, 어떻게 전파할까?
탈기독교 시대 전도: 세상에 닿는 복음 전략
팀 켈러/장성우/두란노/조정의 편집위원


지금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시대는 없었다. 타락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세상이 아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온전히 실현되고 악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새 하늘과 새 땅)이다. 어떤 사람은 중세 시대 교회와 정부가 결탁했을 때 기독교인이 세상을 지배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참된 기독교의 특징은 회심이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