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요약본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김광훈 | 2003.09.24 12:49
Book review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출판 : 대장간

저자 : Lessile Newbigin

리뷰 : 김광훈


  뉴비긴은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의 문화, 소위 서구 현대문명에 의해 이룩된 문화가 무엇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이런 분석을 기초로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이유가 일차적으로는 영국에서 1984년에 개최된 영국교회의 학술대회 참가자들에게 논점을 제공하고 가능한 주제들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유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하겠다. 이 책은 '마이클 폴라니'의 철학에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최근에 나온 그의 책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복음" 의 초반부와 다소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좀더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하나의 요약글 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나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큰 긍정을 주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난 저자의 주장을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판할 만큼의 역량이 본인에게 있지도 못하다. 되도록 저자의 의도를 잘 요약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뉴비긴이 제일 먼저 던지고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의심스러워 하는 것은, 우리가 제기하는 비판들이 건강한 문화에 수반되는 정상적인 자기 반성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드디어 문화가 소멸되는 지점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첫번째 보다는 두번째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p.15)

  저자는 현재의 문화를 '건전한 문화로서 다소간의 문제가 발생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보다는 '문화의 문제점이 극대화되어 이제는 소멸되어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그와 같은 평가가 맞다면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 지금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다시 우리에게 던져진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현재의 문화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1. 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들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인간사회에 의하여 형성되어지고 또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전 되어지는 생활 방식의 총체.(p.19)"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문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문화는 인간들의 모든 삶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 예술, 기술, 정치, 법률, 종교 등을 포함한다.(.p.19)"

"모든 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언어다.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그 체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며, 그것을 집단 내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p.19)"

  근래에 와서 전 세계는 서구문명에 의해 소위 '근대화' 라는 이름아래 공통의 문명을 갖게 되었다. 일부 지역의 반발이 있긴 하지만 소위 과학, 수학, 기술 등에 대한 반발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 안에서 사물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이성의 자율성을 신뢰하면서 합리적이며 기계론적인 그리고 분석적인 접근을 통해 모든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초를 통해 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문화는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계관은 우리가 끼고 있는 안경과도 같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문화에 대한 고려를 할 때 우리가 의문을 제기해야 할 부분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방식은 어디서 유래했으며, 신뢰할 만한 것인가? 이와 같은 고려는 문화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의 중요성을 살피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성의 자율성에 기초를 둔 방식)과 기독교적 방식이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이며, 같은 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2. 설명과 믿음

  바실 윌리는 "현대 유럽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스럽고 환희에 넘치는 감정은 이제까지 감추어졌던 것들이 드디어 '설명되어졌다'는 확신으로 부터 온 것(p.25)"이라고 말했다. 교리적인 설명 또는 비과학적인 설명을 대신해서 사물을 설명해 주는 진정한 방법을 찾았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설명이란 무엇인가? 바실 윌리는 "어떤 설명의 명료성은 그 설명이 사람들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가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p.25)" 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설명이 만족스러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설명에 동원되는 용어들이 더 이상의 분석이 필요없는 궁극적인 것이라야 할 필요가 있다.(p.25-26)"

  이것은 즉 설명은 전제를 기초로 해서 구성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제들은 우리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그러므로 설명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특정한 시대 혹은 특정한 지역의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진술(p.26)"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을 좀더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설명에 만족해 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의해 결정되며 그와 같은 교육은 그 시대의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반/비기독교적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한 설명에 좀더 만족해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이제 현대의 사람들은 소위 초월적인 설명과도 같은 교리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제한시키는 악한 그 무엇인가로 인식하게 되었다. 단지 이성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진리이며,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뉴비긴은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한다.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을 교리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고 해서 이성적이고 의미있는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p.40)"

"과학은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에 속하는 용감 무쌍함과 엄격성을 가지고 자연의 법칙들 즉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들'을 추적해 왔다. 그런데 그 결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은 의미가 상실된 세상이다.(p.41)"

두 번의 세계대전은 사람들에게 회의감을 주었고, 결국 선진화된 나라들에 점성술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퍼져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된다.

잠시 뉴비긴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과학이 제공하는 '설명들'은 더 이상 설명이 아니다. ...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당면 과제들은 우리가 속한 문화권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통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전제는 적절한 연구를 통해 해결책을 발견한 다음 적절한 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접근방식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다. 우리는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존재함을 보게 되었다.(p.41)"


3. 교리와 의심

  우리는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우리는 교리와 의심이라는 두 용어의 위치가 서로 뒤집혀있는 것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알 수가 있다.

"교리라는 용어는 종종 이성의 자유로운 활동에 방해되는 요소로 언급되었음을 보았다. 예전의 기독교 전통 가운데 있을 때는 교리가 부정적인 용어는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보장해 주는 복된 선물을 의미했다. 그와 반대로 의심은 악한 것을 의미했다.(p.42)"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에 이 두 용어는 서로 반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의심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며 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용어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화가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의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의 일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이차적인 요소"라는 데 있고, 일차적인 요소를 무시한 이차적인 요소의 강조로 인해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역설적인 상황이 이제 나타나는데 그것은 의심에 앞선 일차적인 요소가 바로 우리 시대가 외면하고 있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떠한 신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비판 능력은 사실상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의 토대를 제공하는 또 다른 신념들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의심은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작업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일차적인 것은 관심을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행위인데 이것은 곧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p.45)"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해서는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이나 마이클 폴라니의 "personal knowledge" 를 보면 좀더 깊이 있는 분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 새로운 진로의 모색

  교리와 의심의 위치가 역전된 상황에서 교회에서 선포하는 복음도 함께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계몽주의의 도전에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뉴비긴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로마 카톨릭은 계몽주의에 방어적인 입장을 취한 반면에 개신교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계몽주의에 양보하고 자기들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후퇴함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47)"

  개신교는 18세기 이후 개인적이며, 내면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적 종교를 지향했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차츰 복음의 개념도 변질되었고, 선교적인 입장도 줄어들었다. 이제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의 판단에 따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뉴비긴은 마이클 폴라니와 오거스틴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위한 새로운 출발점은 믿음"임을 선포한다. "믿음은 종착역이 아니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다.(p.51)"

"내가 여기에서 세우려고 애쓰는 내용은 증명되지 않는 믿음들을 굳세게 붙잡기 위한 능력을 다시 한번 회복해 내는 일이다. 우리는 현대의 철학적 비판이 오늘날과 같은 예리함을 갖추게 되기 이전 시대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신앙들을 사람들 앞에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능력은 위험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의 옷을 입으려고 했던 신조가 맹목적이며 기만적인 것이 되어버린 반면에 교리적 정통성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끊임없는 점검의 대상이 될 수 있다.(p.54)"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이해의 방식이 요청되는 시점에 서있다.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이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야기되는 문제들도 또한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기독교의 가르침들이 남용될 때 빠지기 쉬운 독단주의를 어떻게 피할 것이며, 그 가르침들의 본래의 역할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2) 만일 기독교의 계시가 공적인 영역(정치, 경제 및 사회적 영역)에서의 활동과 이해를 위한 새로운 틀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콘스탄틴 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3)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참여를 명령받았는가?


5.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위의 첫 번째 질문은 과거 중세시대를 고려한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알고 있다. 그 시대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공산주의 국가처럼 하나의 종교나 주의를 강요되거나, 오로지 한가지 입장만이(설령 그것이 진리인 복음이라 할지라도) 주장되는 시대는 부패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복음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이 강요될 때 사람들은 변질된 복음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 사역은 근본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며, 동시에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믿음으로 살아본 경험에 비추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갖게 된 다른 방식의 사고형태들과 대화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 자체가 끊임없이 새롭게 점검되어지는 과정이다.(p.60)"

  저자는 오랫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선교를 했던 선교사였다. 그의 일 중에는 회당에 가서 힌두교를 신봉하는 이들과 대화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는 그와 같은 경험은 그의 말을 더욱 의미있게 해준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다른 사고의 형태들과 대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진정한 대화는 우리의 "주어진 틀" 그 자체를 새롭게 검토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틀을 가지고서 서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회심'을 전제로 한 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교리의 원래의 역할을 새롭게 하자는 나의 주장은 중세시대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교리의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은 다른 '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새로운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내가 여기에서 제안하는 것들은 전혀 의미없는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p.62)"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교회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명백하게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들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은 '주어진 틀'을 유지하고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그렇지만 교회는 두 번 다시 콘스탄틴적 체제 안에서 행해졌던 것과 같은 , 정치, 사회적 권력을 열망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다른 '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솔직하고도 공개적인 대화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p.63)"

  특별히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혼합주의 형태를 띠고 교회와 공존해 온 문화와의 대화이다. 이와 같은 대화는 위험(기독교를 버리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둔 그런 대화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위험에 노출되지만 그것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프란시스 쉐퍼처럼 담대하게 대화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대화가 위의 첫 번째 질문인 기독교의 독단주의를 피하는 방법이라고 뉴비긴은 주장하는 것이다.


6.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두 번째 질문에서 "콘스탄틴 주의의 함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콘스탄틴의 개종이 당시에는 교회에 있어서 굉장한 축복이라고 믿었지만, 실재로는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재난이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벗어날 수 있을까? 콘스탄틴의 시대 이후 기독교적인 정치가 이루어졌고, 사회가 이루어지면서 유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종교전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사람들은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인간만의 '새로운 틀'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라는 콘스탄틴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을 구분하게 되면서부터 오류는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오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우리의 문제 제기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참된 종말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참된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모든 활동은 지상 낙원을 이룩하기 위함이 아니며, 개인적인 삶 뿐만 아니라 공적인 삶도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과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능력으로 이 세상에 하늘 도성을 건설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공적인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이와 같은 기대였다. 개체적인 차원에서는 그와 전혀 다른 소망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은 죽음이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을 때 들어가게 되는 저 세상에서 복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이었다.(p.69)"

  사람들의 그와 같은 기대는 성경적이었는가? 설경은 우리에게 세상적인 진보를 언급하지도 않았으며, 이 땅위에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뉴비긴은 예수님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예수님의 선택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사회참여는 사회를 인간스스로가 새롭게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정의와 평화의 세계, 그것은 인간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런 정신을 가질 때 우리는 과거의 오류를 통해 일어난 이원론적 신앙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에 참여할 때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말하고 있다. 다음에는 우리가 그와 같은 사회참여를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았는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7.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우리는 기독교란 영혼과 내세에 관한 것이므로 신앙에 근거하여 정치등과 같은 사회일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본다. "물론 우리는 공적인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견해가 성경이나 기독교 신조보다는 당시에 유행하는 대중적인 이대올로기에 근거한 것이 많다는 지적이 정당함(p.74)"을 인정해야 한다.  공적인 세계를 무관하게 보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가 아니라 인도의 종교와 같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인도의 종교 안에서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자연계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들을 끊어버림으로써 인간 존재의 본질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다.(p.75)"

인간은 내면적 세계와 외면적 세계로 구분되어져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인 삶의 영역에 참가하기 위한 근거는 어떤 것인가? 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삶의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추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 되어야 한다.(p.76)"

  우리는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또는 무시하면 "정사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노예(갈 4:30)"가 된다.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게 될 때 모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내려야 하는 결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적인 문제들에 참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왕권 아래서 수행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사단의 권세와 지배 아래에서 행해져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p.79)"


8.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이제 우리는 결론을 맺을 시간이 왔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적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제반 문제들이 인식되어지는 전체적인 틀 자체이기 때문이다.(p.101)"라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현대문화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들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로는 인간의 평등과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인간들이 서로 독자적으로 평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란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살아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평등이 아니라 공동체를 성경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행복이란 인간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로는 정부에 대한 냉소주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막다른 상황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이해를 추구하는 작업에 있어서 믿음과 회의 사이의 균형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비판적 능력은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비핀적 능력은 믿음으로 유지하는 신념들을 기초로 할 때에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와 인정이 없을 때, 인간의 비판적 능력은 허무주의적 회의주의로 빠지게 될 것이다.(p.111-112)"라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이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주장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0개(5/5페이지)
독자요약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0 지성은 섬김의 걸림돌인가 김광훈 2003.09.24 00:02
9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김광훈 2003.09.23 23:59
8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 김재윤 2003.09.10 12:28
7 복음과 청교도 설교 김재윤 2003.09.05 01:10
6 청교도 명언 사전 김재윤 2003.09.04 13:21
5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김재윤 2003.09.03 23:31
4 감자탕 교회이야기/양병무/김영사 원매자 2003.07.07 08:36
3 뿌리깊은 영성/강준민/두란노 강효주 2003.06.30 00:17
2 주기도문강해/김세윤/두란노 채선희 2003.06.29 14:31
1 오늘의 웨슬리/장기천/전망사 조성원 2003.06.29 14:2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