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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지성은 섬김의 걸림돌인가

김광훈 | 2003.09.24 00:02
Book review

Loving God With All Your Mind

How to survive and Prosper
As a christian in the Secular University
and Post-Christian Culture

지성은 섬김의 걸림돌인가

출판사 : 바울

저자 : 진 에드워드 베이드 Gene Edward Veith, Jr

리뷰 : 김광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을 사용하여 생각하며, 상상하며, 지식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사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소명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학문과 일반 지성세계에 깔려있는 무신론적 전제의 벽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서 있게 된다. 이 벽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전제조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참여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응은 지성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신앙을 잃어 버릴 위험성이 있으며, 실제 그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반기독교적 전제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입장, 지성적 영역에 나아가야 하지만 결코 기독교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을 염두해 두고 쓰여졌다. 저자는 책을 통해 성경이 지성 또는 세속학문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하며, 지성을 향한 성경적인 모델을 다니엘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이어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기독교적 지성에 대해서 나누고 있다. 저자의 서문을 잠시 적어보면서 책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신앙을 약화 시키거나 세상과 타협함이 없이 현대의 지성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위해서 또한 복음의 진리를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는 세상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적 사상의 대강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부딪치는 도전들, 즉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들이 무엇인지를 예상하고 이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인 측면 즉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의 사고를 진정으로 개방적이 되게 한다는 사실,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토대이며 호기심과 창의력의 바탕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학문하려는 힘을 공급하는 기본틀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p.9)"

이 책은 크게 다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서의 학문" 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의 인물 다니엘을 통해 성경이 지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제 2 부는 "현대의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지성적 영역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제 3 부는 "기독교적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적 지성에 대해서 나누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 개의 부분을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제1부 :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서의 학문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들로 제 1 부를 시작한다. 그 중에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나열해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지적인 발견들과 지적인 전투에 참여하여야 하는가?", "대학은 단지 하나님의 이방 선교지인가?", "세속학문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가?" 등이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성경을 연구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에 나와 있는 지성적인 사람들을 살펴보면 먼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운 모세(행 7:22)와 다니엘과 세 친구(단 1장), 가말리엘의 문하(행 22:3)에서 공부했던 바울이 있으며 바울의 동역자 아볼로 등이 있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대 총독 베스도가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사도 바울의 학문적 성취가 작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중에서 잠시 아볼로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을 살펴보자. 바울의 위대한 동역자였던 아볼로는 로마사상의 첫 째가는 중심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는데, 그는 학식이 있었으며 성경에 능한자(행18:24)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분석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섬기는 데 사용했다.(p.17)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행18:27,28) (p.18)"

성경은 아볼로의 학문적 성취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교육을 배척하지 않고 장려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믿는 민족은 교육을 장려할 수밖에 없다. 실제 과거에는 책을 읽는 능력이 매우 보기 힘든 재능이었으며, 책을 읽는 능력은 모든 지식 습득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생활상을 이해해야 하며,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알아야 하고, 당시의 철학과 인류학을 알아야만 한다. 즉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성경만을 알고자 할지라도 복잡한 많은 학문 분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p.23)"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자는 지성적인 부분을 알아야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학문은 성경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각 나라말로의 성경번역을 위해서는 여러 학문분야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학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처럼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성경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견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인쇄술의 발명을 가져온 기술혁명-야금술과 공학의 발달, 서적의 대량 생산을 가져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관 분야들의 발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p.24)

성경은 사회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별히 다른 이교도의 순환적인 우주관, 세계관과는 다르게 직선적인 우주관,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회, 과학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대상이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간에 말이다. 특별히 타 종교에서는 자연은 신성한 그 무엇인가로 여겨서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았지만, 기독교는 자연을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이로 인해 인간의 환경오염이 기독교의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 기술과 과학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이 모든 사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이 학문을 경멸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p.27)"

물론 우리는 "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1:21)" 라는 말씀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지식 속에 들어있는 이교적 세계관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 속에 종교성이 포함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며,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이 우리에게 요구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 속의 인물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가 이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교도의 문화 속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처한 입장은 세속적인 대학에 다니거나 현대의 문화와 지성 세계에 직면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비슷하다. 이들은 이교도의 문화 속에 유배를 당해서 학문을 배우게 된다. 아마도 바벨론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다른 이방인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은 이들 신앙의 선배들의 행동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니엘서 1장은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방인의 학문과 방언을 배우게 됨을 알려준다. 성경은 그들의 배움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방문화에 놓인 그들에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제사 음식과 관련된 문제였다. 제사 음식은 왕이 포로들인 이들에게 베푼 은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 일행에게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취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해명해야만 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한다.

"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내용을 바벨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얽매이는 엉뚱한 사람으로 비쳐졌을 것이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벨론 사람들은 자신들을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하고 격노했을 것이다.(p.35) "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우리는 바로 이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유일한 신은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우상과 관련된 이름을 받아 들였으며, 이들은 단순한 이름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사 음식은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들에게 있어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방문화에 동화되느냐 아니면 외인으로 남느냐의 중요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처한 왕궁의 문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와 다르게, 술과 이방신에 대한 경배가 가득한 문화였다. 그것은 현 시대 우리가 대학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갔을까?

다니엘의 일행은 타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취한 첫 번째 행동은 그들의 입장을 표하기 위해 대항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였다.(단1:8) 부정한 음식을 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다니엘은 이교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권세들을 존중하여야 하며(롬13:1-7) 하나의 죄 즉 제의적인 더럽힘을 피하기 위하여 반역이라는 또 다른 죄를 범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다는 성경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p.38) 우리는 이들이 제사 음식이 아니라 채식을 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의 혈색이 어떻게 되는 지를 시험할 수 있도록 간청함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 나갔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행동을 통해 실제 문제로 나타난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자체(제사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음식을 먹고 그들의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유념해야만 한다. 실제는 건강하기 위해서 음식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탐구 후에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안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에 부딪쳤을 때 이러한 성경적인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과격한 반응을 보이며 그들과 대결하고 같은 방 동료를 기피하고 사탄으로 정죄하기까지 한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나는 때때로 이런 저런 이유로 몇몇 학생들의 반감을 사왔다. 다니엘과 같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게 오는 수고를 감수하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내 연구실로 찾아온 극소수의 학생들 가운데서 대부분의 학생이 다니엘의 겸손이나 예의를 보이기는 커녕 분을 못 참아 했다. (p.43)"

성경은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음을 말한다.(단1:17) 하나님이 그들에게 학문을 주셨으며 성경은 학문의 연구와 성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p.43)  또한 이들은 바벨론의 사람들보다 십 배나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다니엘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더 훌륭해 질 수 있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배제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한계를 우리는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보다 십 배나 더 낫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이다.

  

제2부 : 현대의 지성

저자는 제 2 부의 시작부분에서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문명 즉 강한 대적들과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논쟁하거나 깊은 비밀들을 토론하거나 신앙을 적극적으로 변호할 필요가 없다. 단지 설명해 주라.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고 기독교를 비난하거든 단지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 교회는 우리에게 성지를 정복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라. 한번만 훑어보아도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진다. ... 철학 교수가 악의 존재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할 때(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사람에게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사람이 되셨으며 그는 인간의 고통과 죄를 우리 대신에 짊어지셨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를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막아주고 적어도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p.66)  당신은 어떤 사람에게 성육신이나 구속의 교리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따름이다.(p.67)

우리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당신은 교회가 아니라 바벨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증거한다는 것은 고소 사건에서 자기의 체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오랜 동안의 지적인 논증의 결과도 아니다. 변증은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복음은 논쟁이나 유창한 호소, 개인적인 카리스마, 영리한 수완을 통해서가 아니라(고전 1:18-25)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p.67)

현대의 지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다. 이와 같은 현실의 배경에는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자리잡고 있다. 과학적인 방법론에는 한계가 있어서 오로지 관찰 가능한 증거를 기반으로 시험을 하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흥미로운 분야의 영역들이 배제되고 만다. 현대 지성의 주류는 과학의 시야는 한계가 있으며 어떤 문제들은 과학의 테두리밖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에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해온 분야를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통해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p72) 과학적 방법론은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범죄에 대한 평가를 할 때도 범죄자의 환경이나 유전적인 성향등의 자연적인 관점에서 행위의 원인들을 찾는다.

각 사람은 그 상황이 아무리 복잡하다 하더라도 도덕적 행위의 주체자로서 자유로우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습득되는 것이냐 유전적인 것이냐에 대한 논쟁은 단지 인간의 복합성을 자족적이고 자연적인 체계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각기 다른 두 시도들일 뿐이다....이 모든 배후에는 범죄자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p.75)

현대에 와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부인되고 있다.,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라는 책을 통해 스키너는 앞에서 말한 개념은 낡아빠진 진부한 것, 비과학적인 것이며, 인간은 조종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선을 위해야 조종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적인 방법은 매우 유용하지만 물리적인 대상들에 연구하기 위해 고안된 과학적 방법의 전제들이 사고의 모든 영역에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p.76)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은 인간이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목표들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p.78) 또한 완벽한 수단과 혼동된 목표가 우리 시대를 특징 짓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p.79)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과학이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이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그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기독교적 전제들은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학문 세계가 배양하는 회의주의를 언젠가는 현대의 학문 세계 자체에 적용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p.83)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전제가 인정된다는 데에 대한 오해들을 없애는 것이다. 이것은 레슬리 뉴비긴의 책에서도 언급되어지고 있는 내용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22:21)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두 영역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서로 혼동이 될 때, 두 영역 모두 위태롭게 된다. 인간의 나라들은 그 자체로 거룩하지 않다. 가이사를 숭배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은 인간의 나라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정치적인 지배권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기독교가 하나의 시민 종교로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특정한 문화로부터 구별되지 않게 된다면, 교회는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마저 잃어 버리게 된다(p.90)"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만 한다.

우리는 현대의 지성의 영역 속에서 다음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그리스도인들의 병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성령은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과 지성에 역사한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거나 설교, 개인적인 토론, 학문적인 논문을 통해 그 진리를 들을 때, 성령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막기 위하여 세워놓은 합리화와 죄의 진을 파하면서 강력한 방식으로 역사한다.(p.123)

저자는 위의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통해 바울의 논증방법이 본질적으로 소극적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벧전 3:15)이 있지만, 바울이 여기에서 묘사하는 전투는 공격적인 것이 아니라 방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소극적인 방법은 학문 세계에 종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적절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회의주의자를 만족시킬 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회의주의자의 철학을 검토하고 그 한계들과 오류들을 드러낼 수는 있다.... 세속적 사고를 가진 과학자들에게 창조론을 확신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논증을 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세속적인 과학자들 자신도 인정하고 잇는 다윈의 진화론의 몇몇 실제적인 난점들을 제시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p.124)

목표는 모든 이론을 파하는 것이며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는 것이며 견고한 진을 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지적 탐구의 주요한 수단이 된 비판적 분석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p.125)



제3부 : 기독교적 지성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귀한 자산들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거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이다. 성경에서는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은 개개인을 합한 것보다 더 크게 된다고 가르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두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도, 예수는 몸소 그곳에 계신다. 사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여러 무리들이 합하여 다름 아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고전 12:12-27)

그러므로 기독교적 지성을 위한 첫 번째 고려사항은 다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역교회, 직장이나 사역지에 있는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 모든 세대의 기독 교회 및 그 지혜의 보고, 그 위대한 지적 전통과 연대를 맺는 것-이 모든 보편 교회에 포함되어 있는 자원들은 오늘날의 지적, 도덕적 유혹들에 맞서는 보루가 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후원과 지도와 영감을 제공하며 연구를 위한 배경과 기초가 되는 풍부하고 복잡한 사상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p.132) 교회를 말하자면 개개인의 불신앙의 세상과 영합하는 길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선한 또래집단의 압력이라는 대안을 제공해준다.(p.133)

두 번째로는 단 2:17-19에서 볼 수 있는 장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그것은 다니엘이 신앙의 동무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원리는 적대적인 환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환경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찾아서 함께 교제하고 기도함으로써 서로서로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p.142)

세 번째로는 두드러진 세상적 성향인 엘리트주의를 막아야 하며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방책은 지역 교회에 열심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다.(p.144)

네 번째는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학문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영성과 통찰력의 유산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모든 세대에 걸친 그리스도인들의 작품들 즉 어거스틴, 유세비우스, 아퀴나스, 단테, 루터, 칼빈, 허버트, 밀튼, 웨슬리, 존슨, 맥도널드, 체스터톤, 일리어트, 루이스의 작품을 읽는 것은 특이하게 생생한 성경 연구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생각들과 신앙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p.148-149)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위대한 지적 전통의 상속자들이다. 적극적인 사고와 실제적인 문제 해결의 이러한 전통은 현대 세계의 지적 조류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인 동맹자이다. 과거의 통찰들을 끌어오는 것은 오늘날의 문제들에 유용한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독단,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독단에서 해방될 수 있다.(p.149)

다섯 번째로 우리는 여러 분야 속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토론 주제, 거의 모든 지식의 분야들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인문과학, 직업들은 모두 기독교 저술가들에 의해 민감하게 탐구되어 왔다. 임상심리학, 창조론 대 진화론, 예술의 동력, 정치 활동의 기초, 간호 또는 상업분야에 있어서 윤리적 문제들과 같은 주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현대적 사고와 경험에 적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유용한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p.152)

우리는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이 현대 세계에서 부딪치는 진퇴양난의 곤경을 해결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곤경에는 문제만 있고 해답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p.153)

이와 같은 기독교적 지성과는 다르게 세속 사상들은 어떤가? 자연주의와 실존주의와 같은 현대의 사고 방식들은 객관적인 지식의 탐구를 방해한다. 물질 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왜 나는 인문과학을 공부하여야 하는가? 물질 세계가 무의미한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나는 과학을 공부하여야 하는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내 자신의 ?미들을 창출해내고 내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면, 왜 당신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가? 다니엘과 그의 친구 히브리인들이 학업에서 박수와 술객들보다 열 배나 더 나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들보다 더 뛰어날 수 있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이다. 박수와 술객들의 세계관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방해한다.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와 실존주의는 지성과 교육의 소멸을 가져온다. 그 반면에 다음 장에서 설명할 성경적 세계관은 온갖 종류의 지식-자연과학적 진리와 인문과학적 진리-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으며, 그 진리에 목적, 가치, 배경, 통일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제공해준다.(p.170)

그러나 세속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인 학자들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은 그들이 믿는 도그마들이 개방된 진리 탐구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이미 일정한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믿는 바를 확인할 따름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들은 이미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연구와 탐구에 참여하는가? 당신들은 당신들이 발견하는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들에 단지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좀 더 정직하다면, 당신들의 지적 탐구는 그 탐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끝나 있는 것이 아닌가? 고정된 종교적 도그마들을 믿는 당신들의 믿음은 학문적 탐구의 핵심이 되는 개방된 탐구를 외면하고 있는가?(p.191)

이에 대한 대답은 기독교적 진리는 역설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물리적인 세계에서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장이다"라는 사실이 성립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도 역설적인 면이 있다. 역설적인 사고들은 단순한 상식에 어긋나지만 이것은 인간의 논리가 서투르기 때문이다. 이 사고들은 실제로 모순율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들은 대단히 복잡해서 제한된 인간의 사고로 포용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진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진리는 흔히 역설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그 주요한 가르침들을 일련의 역설들로 제시해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다.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들의 통일체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가치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정통이라는 것은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합리주의는 양자택일(either/or)의 논리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헬라인들과 그들의 지적 후계자들은 두 극단의 타협이라는 중도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는 양자합일(both/and)의 논리로 사고한다.(p.192-193)

기독교가 장려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사고는 모든 진리에 적용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의 제한된 인지 내용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기독교는 한계를 가진 인간의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이성을 받아들인다. 기독교는 만물을 시험관으로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과학적인 방법론을 받아들인다. 기독교는 인간은 세계를 알 수 있지만 그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성과 과학의 발견들(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까지도)을 궁극적인 해답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인다.(p.197-198)

옛 신학적 논쟁을 빌어 말한다면 우리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안젤름과 같이 우리는"이해하기 위하여 믿어야" 한다.(p.206)

성경은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서 글을 정리하도록 하자. 시편을 보면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시 111:1-2)" 라는 말씀이 있다. 2절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전거가 된다. 여호화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는 다 연구하는도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더 깊이 연구하게끔 하는 학문의 즐거움을 실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p.213-214)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은 시험을 받으며 그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고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몇몇 생활 태도들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p.214)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리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3-15,17)"

당신은 지성의 허리를 동여야 한다. 이렇게 동여맨 사고는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과 대비된다. 무지는 죄를 기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하게 임전태세를 갖춘 사고를 가지고 죄와 불신앙과 싸워야 한다.(p.215)

옥스포드 대학의 기독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C.S.루이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적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역설했다.

"온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다시피 문화 생활은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교회 바깥에 존재한다. 오늘날 무지하고 단순하다는 것-대적들을 스스로의 토대 위에서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병기들을 내던져버리는 것이며, 하나님 아래서 우리를 의지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교도의 지적 공격에 대처할 아무런 방어책도 가지고 있지 않는 교육받지 못한 형제들을 배신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악한 철학에 대응하기 위하여 선한 철학은 존재하여야 한다."(p.216)

학문의 은사르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은사를 사용하여야 한다. 진리에 대한 엄청난 필요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세상에 너무도 많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삶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무이다, 바로 지금 그것은 당신의 의무인듯이 보인다."라고 루이스는 결론을 맺는다.(p.216-217) 그의 말을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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