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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김광훈 | 2003.09.23 23:59
Book Review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출판사 : IVP
저자 : Lesslie Newbigin
리뷰 : 김광훈



  뉴비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 중의 한명이다. 그의 글은 결코 쉽지 않지만 언제나 진보적이며, 깊은 사색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본 책은 2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본 글에서는 그 중 선교와 관련된 부분을 빼고 지성과 연관된 일부 부분만 살펴보고자 한다. 실제 Review 라는 것이 비평이 들어가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면 본 글은 그리 좋은 글이 아닐 것이다. 나는 주로 저자의 주장을 잘 요약하고 중간중간 개인적인 의견을 적고 싶다. 여러분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다원주의적이다. "다원주의적이다" 라는 말은 다음과 의미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식에 의해서 사실상 다원적(plural)일뿐 아니라, 이런 다원성(plurality)이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고 신봉되는 것들로 반겨진다는 의미에서 다원주의적(pluralist)이다.(p.15)". 이와 같은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런 문제 속에서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다만 이 글은 이 책의 앞부분만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의 선교와 복음에 대한 부분은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주장은 직접 책을 통해 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같이 다원주의 사회는 곧 개인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선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절대화 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방해하는 악한 것이며, 독선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각자가 독립적인 것, 얼핏보기엔 평등하면서 독립적인 사회상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서 기독교만이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참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종교적 행태라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것인가? 또 우리는 그러한 다원주의 사회를 원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이미 도래했다. 이제 우리가 접하게 되는 현실은 "하나의 진리가 아닌 여러 진리들 속에 살아가면서 오히려 진정한 진리를 찾기 어려운 시대에 살게 되는 불행"이 가득한 현실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원주의적인가?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다원주의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면 이 대답은 명확해진다. 기독교인들은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다. 비기독교인들은 모든 이들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우리가 그런 이상한 사람들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치와 사실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세계와 '사실'이라고 부르는 세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고, 앞으로 우리가 상당히 깊이 검토해야 할 특성이다. 전자의 세계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가치는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자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좋든 싫든 사실이기 때문이다.(p.25)"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선택의 문제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던져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나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우리의 뜻에 따라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비기독교인들과 생각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와 같은 생각의 차이들을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파악을 위해 뉴비긴은 마이클 폴라니의 철학을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사상에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든 체계적인 사상은 어떤 출발점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일관성 있는 사상도 어떤 것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용인하지 않으면 성립이 불가능하다. ... 어떤 일관성 있는 사상도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직한 사고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런 전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능한 한 아주 명확히 해두는 일이다.(p.25)"

  모든 사상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마 이 말을 들은 무신론자는 우리가 무식하다고 불만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직한 사고를 위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떠한 사실도 판단할 수 없다. 이 주장은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들린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가치이며, 또한 어떤 것들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만약 사람들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또한 그 믿음은 어떻게 선택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뉴비긴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를 결집시키기 위해서 피터 버거가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s)'라고 명명한 일련의 구조에 의존한다. 이 구조는 어떤 특정한 사회 안에서 수용되는 믿음과 관행의 유형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어떤 믿음이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타당하며 어떤 믿음이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한다.(p.26)"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재미있는 예화를 하나 읽어보고 넘어가자. 이 예화는 불가지론자들이 자주 얘기하는 "소경과 코끼리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 종교적 불가지론자의 주장을 돕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소경과 코끼리의 유명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진짜 요지를 항상 간과해 왔다. 그 이야기는 왕과 궁정 신하들의 관점에서 진술된 것인데, 그들은 소경이 아이여서 소경이 코끼리의 실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진실의 일부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위대한 종교들의 주장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이 이야기를 하였고, 어떤 종교도 진리의 한 측면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을 배울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진짜 요지는 정반대이다. 만일 왕 또한 소경이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왕에 의해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세상 모든 종교가 그저 더듬어 찾으려는 완전한 진리를 왕 한 사람이 볼 수 있다고 암시하는 엄청나게 교만한 주장이다. 그것은 그가 모든 종교와 철학의 주장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완전한 실재를 알고 있다는 주장을 내포한다.(p.27-28)"


  우리가 살고 있는 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궁극적인 믿음을 자신감 있게 진술하는 것, 즉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식하고 교만하며 독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 비난 자체도 철저한 비판에 개방되어야 하는 가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비판받지 않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현재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p.28)"


다원주의의 근원 : 회의주의


  나는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수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기독교적 입장에 대해 의심(회의 또는 고민)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의심은 기독교의 부패를 막으며, 더 많은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나는 이와 같은 자세를 "긍정적 회의주의"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나누고자 하는 "회의주의"는 그와 같은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의 회의주의이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회의주의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회의주의는 동일하게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의심함으로써 좀더 나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우리는 그 장점들의 결과들을 누리며, 학문의 성장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세가 "이성의 자율성"에 의지함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성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은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책을 보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을 의지하면 믿음은 무가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것을 신조(creed)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지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은 그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다.(p.42)"이라고 말한다. 의심이 유익하나, 의심은 제일 우선순위로 가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 회의주의에 대한 뉴비긴의 비판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우리가 어떤 말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의심하는 바로 그 때에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믿음들의 기초 위에서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다른 많은 것들의 기반 위에서 어떤 진술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의심받는 그 말과 그 말을 의심하는 기반이 되는 믿음을 동시에 의심하는 것을 불가능하다.(p.43)

(2) 무엇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무엇이 그런 앎의 과정에 개입되었는가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믿음의 행위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 어떤 다른 분야를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는 가르치려는 분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p.43)

  그렇기에 믿고 의심하는 것이 안다는 것의 전 과정에서 모두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믿는 것이 우선적이고, 의심하는 것은 이차적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왠지 의심이 믿음보다 좀더 정직해 보이는,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대인의 견해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편견이다. 그것이야말로 아주 파괴적인 독단주의의 한 형태이다.(p.44)

(3)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알다시피 두 가지 믿음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주는 합리적이라는 것과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우주의 합리성은 과학이 논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합리성은 과학적 노력의 출발점으로 가정해야만 하고, 그런 가정을 위해서는 신앙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p.44)

(4) 믿음에 관한 진술을 단지 주관적인 것으로(즉 당신에게는 진리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평가절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진리로 믿지 않는 지식을 '객관적인'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p.47)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회의주의의 기본인 의심은 결코 중립적인 위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역설적이게도 그 의심은 일정한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주의가 유용하나,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체 이성중심적인 판단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면 분명 오류가 생기게 된다. "이성은 사물의 진상에 관한 독자적인 정보의 출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한 단면(p.30)" 일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


  뉴기빈이 거듭 주장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만,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적이지 않다(p.55)"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가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인데 이제 다룰 내용의 논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은 데카르트의 회의론을 분석하면서 시작된다.

  데카르트는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 곧 지식의 확고한 토대를 정열적으로 찾으려 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분명하고 뚜렷한 개념, 단어 그리고 의미가 확실한 관념의 토대 위에 체계적으로 지식을 구축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 이상은 수학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수학에서는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분명하고 뚜렷하며,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일관된 방식으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회의주의의 경우처럼 다시 몇 가지를 들어서 데카르트의 회의론을 비판해 볼 수 있다.

  위의 문장을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뉴비긴이 던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오류가 없음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p.57)". 뉴비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하고 뚜렷한 개념'이라는 대목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은 단어 사용에 의해서만 조정될 수있다. ... 개념이란 상호간에 통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모든 언어의 한 부분일 때만 유용하고, 모든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파악해서 질서를 부여하는 독특한 방식이다.(p.58)"

  과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마이클 폴래니의 주장처럼 불확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만이 실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만일 단어의 의미가 확정적이라면, 모든 언어적 진술은 동어 반복이 된다. 더군다나 단어의 완벽한 의미는 그 언어가 형성된 문화에 의존한다고 뉴비긴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불가능한 가정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와 같은 가정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서양 철학에서 여전히 강력한 핵을 유지하고 있는 "이성의 자율성"과 이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뉴비긴은 좀더 분석적인 접근을 위해 버트란드 러셀의 말을 살펴보고 있다. 러셀이 말하길

  "과학적인 법칙에 도달하는 데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의미있는 사실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둘째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런 가정에서부터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결과들을 추론하는 것이다.(p.59-60)"

  이제 이 말들에 대해서 다시 살펴보면 세가지를 비판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의미 있는 사실들을 관찰하는 것"이란 표현이 그렇게 간단하고, 객관적인 진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늘 수십 억의 '사실들'이 널려있다. 그 중 어떤 것이 의미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달려있다.(p.60)"

  아인슈타인의 말하길 "물리학자의 최고의 사명은 세상의 모습을 순수한 연역에 의해서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지극히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는 것이다. 이런 법칙으로 인도하는 논리적인 길은 없다. 그것들은 지적인 사랑과 같은 어떤 것에 토대를 둔 직관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p.61).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볼 수 없는 곳에서 믿어 버리는 것, 즉 믿음의 모험이다.이런 믿음, 즉 이런 '지적인 사랑' 없이는 과학은 시작될 수 없다.(p.61-62)

  두 번째로는 가정을 만드는 단계에 대한 지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가정을 만드는가? 이 과정에는 절대적인 법칙이 없고, 재밌게도 그것은 오히려 직관과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결코 객관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세번째로는 실험에 의한 가정의 검증에 대한 부분이다. "과학자들은 어떤 실험이 기존 이론이 옳음을 증명하지 않는 결과들을 산출했다는 것 때문에 그 이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좀더 나은 이론이 생겼을 때만 옛 것을 버린다. .... 진화론을 지지할 수 없게 만드는 이런 저런 모양의 사실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좀더 나은 이론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이 이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p.63)"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해 볼 때 현대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회의주의, 회의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안타깝게도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뉴비긴의 책을 통해 우리가 다원주의 사회 속에 살면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성에 기초를 둔 사상과 학문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된 문화는 결코 기독교와 다르게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그 또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반/비기독교적인 모든 것이 기독교와 다른 중립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를 통해 그들은 기독교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었다.)을 거부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 또한 하나의 믿음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는 그나마 왜소한 위치에서 상대적으로 대등한 위치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정신을 가진 헌신된 기독교인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신앙을 적용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중에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인생의 단계마다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알아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헌신이 있어야 하고,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도구 연장에 의지해야 하고,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 도구들이 탐구되는 실재에 좀더 적합한 것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도구들을 점검하고 고쳐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p.68)"

  이것은 폴라니가 말한 도구론이다. 그의 말을 충고로 듣는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적용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할 때, 먼저 그것을 신뢰해야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 도구를 다시 점검하고 수정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봐야 하는가?" 인데, 일단 우리는 좋고 올바른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가질 최고의 자신감이다. 이것이 이 글에서 내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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