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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뿌리깊은 영성/강준민/두란노

강효주 | 2003.06.30 00:17
  영적 성장은 깊은 깨달음에서 온다. 즉, 영성의 깊이는 깨달음의 깊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핵심을 깨달음으로 보신다. 시편 49편 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깨우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깨우침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셨으며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리운 씨앗을 설명하시며,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다(마 13:19). 또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내가 되느니라 (마 13:23)」고 말씀하셨다. 그런즉, 열매 맺는 비결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며 깨닫는 사람은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과연 열매 맺는 영성인 깊은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먼저 가장 흔한 방법이 영적 안내자들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다.「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행 8:31)」. 영적 안내자는 깨달은 자요,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자이다. 깨우침이 '길'이라면 그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안내하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일인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은 말씀에 빛을 비추어 주시며 우리 안에서 말씀을 열어 주신다. 마지막은 기도하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예레미야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읽다가 바벨론 포로가 끝나는 70년의 년수를 깨닫게 되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통해 응답하셨다.
  결국 말씀에서 깨닫기를 사모하는 다니엘의 겸손이 깨달음을 입게 했고 큰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깨달음이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니듯이 이 오랜 깨달음의 가운데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또하나의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는 첫 번째 수업은 기다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부르신 것도 그가 80세일 때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생각보다 대체로 더디게 온다. 우리는 급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며 항상 정확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님이 귀히 사용한 사람일수록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으며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드셨다.

  광야 학교에서 받는 기다림의 훈련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모세가 40년을 잊혀진 존재로 살아야 했을 때, 요셉이 13년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2년 동안 옥중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셨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원망하고 세월을 낭비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뿐만 아니라 내일의 사역을 준비했다. 기다리면서 기도했고 기다리면서 계획을 세웠으며 기다리면서 준비했다. 결국  요셉은 기다리는 13년 동안 애굽의 문화와 언어를 익혔고 하나님이 국무 총리로 그를 사용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기다림은 자신의 백성들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기다림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먼 훗날 크게 쓰임 받을 자신을 생각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로써 기다림을 지혜롭게 이겨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홀로 있는 훈련을 통해 더욱 뿌리깊은 영성을 다져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통과해야 할 수업이 있다면 외로움일 것이다.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다. 홀로 있어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준비시키시며 외로움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신다. 깊이 있는 사람은 홀로 있음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토저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모세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도 외로웠다.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외로움을 통과하게 하실까? 왜 홀로 있게 하실까? 그것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도 화려한 궁중이 아닌 외로운 광야에서 였다. 홀로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고독이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고독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다.

  비록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세와 같은 광야는 없지만, 이 광야는 단순히 특정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고난의 현주소요, 내적 상태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
  
  홀로 있음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면 이젠 자아를 깨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뜨리신다. 그러나 아주 부서뜨리지는 않으신다. 성경은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 3:2-3)」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만드시되 금을 연단하고, 은을 연단하시듯 우리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지나친 자기 과신은 하나님의 사역에 장애가 된다.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육을 신뢰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육의 힘과 세상의 실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애굽 사람 한 명을 쳐죽이는 것이었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의 육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의 자아를 철저하게 깨뜨리셨다. 모세의 자아가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 그는 육신의 방법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겨우 애굽 사람 한 사람을 쳐죽였던 모세가 장정만 60만, 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른 것처럼 우리는 '나'를 깨고,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사용하실 수 없다.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그를 광야로 보내셔서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이런 깨어짐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영광이다.

  자신을 깨는 훈련을 겪었다면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열매 맺는 영성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모습이다.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속에 감추어져야 하고 그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도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땅속에서 감추어져야 한다. 자신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열매는 풍성하지 못하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영성이 아니다. 주님의 깊은 영성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감추기를 힘쓰셨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여지듯 그분은 유력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기대 할 수 없는 여인의 몸에 자신을 감추셨다. 주님이 드러내길 꺼려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에 충분히 나와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신 후 자신이 그 병을 고쳐 주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다가 왕을 삼으려 했을 때도 예수님은 그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요 6:15).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내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며 사람들의 평판을 자기 존재 가치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실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지 않는다.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이다. 열매를 풍성히 맺는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 영성은 뿌리깊은 영성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홀로 있는 다는 것과 자신을 깨는 것 등은 분명 우리 인간에겐 고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귀히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깨끗하고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과는 정반대인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볼 때 지헤롭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사람을 쓰시는 것은 아니다. 은혜로 사람을 선택하시며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어 나가신다.

  깊은 영성, 깊은 인격, 깊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즉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쓸 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잠언 25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는 길은 찌끼 있는 은그릇을 풀무에 집어넣는 것이다. 풀무는 고난을 상징하며 바로 그 곳에서 찌끼 있는 은그릇이 정결케 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욥' 의 고난을 살펴보자.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라고 자신이 깨달은 고난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서 찌끼가 제해지고 정금 같은 모습이 나오기까지 연단하셨다. 그래서 흔히들 욥기를 읽어보면 인생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욥기'에서는 심오한 하나님의 지식과 사상을 배울 수 있다. 아마도 고난 중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욥'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깊은 영성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바울'일 것이다. 바울의 인생 이력서는 고난의 이력서였다. 그의 그릇은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었다. 그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력은 컸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도피하지 말고, 고난 가운데서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고난을 깊은 영성을 형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이나를 쓰실 때를 기다리며 홀로 있는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을 깨는 훈련을 모두 거쳤다면 이제 '인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성경은 바로 '인내' 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 됨의 표를 오래 참음으로 보았고 바울은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고 말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별히 인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 서신인 디모데서 그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성품을 인내라고 말했으며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딤후 2:12)」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복음을 전파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거듭 가르쳤다.

  왜 인내가 이토록 중요할까? 바로 인내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게 만드는 능력이 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라는 말씀처럼 인내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하고  그 비전을 가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향해 인내하게 한다. 또 모든 유혹을 이겨 낼 수 있게 해준다. 주님의 삶 속에 나타난 인내는 비전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 12:2)」라고 말한다. 부활의 비전, 영광의 비전을 보셨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다.
  인내는 성숙한 영성의 표지이며 이러한 인내를 이룬 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깊은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내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하며 인내가 거룩한 습관, 거룩한 취미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그분을 본받아 인내라는 마지막 단계를 통해 뿌리깊은 영성을 만들어 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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