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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주기도문강해/김세윤/두란노

채선희 | 2003.06.29 14:31
1장 서론

주기도문의 본문은 두 개의 판, 즉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으로 되어 있다. 마태판은 6장 9-13절까지의 말씀이고, 누가판은 누가복음 11장 2-4절의 말씀이다.
그 중에 누가복음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려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해주는 것들이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그런 성격의 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아마도 18번 축복기도와 함께 드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18번 축복기도를 대신했다가 마침내 교회의 유일한 공통 기도로 자리잡게 된 것 같다.

이에 비하여 마태복음판은 주기도문을 산상수훈 본문의 구조상 한가운데 즉 핵심에 위치시켜 놓았다.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부분에서도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장 5-15절이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6장 5-9절 전반부에서 그릇된 기도들을 먼저 다룬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지적하고, 두 번째는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한다.
이 기도가 우리의 제자도의 가장 기본이고, 우리의 제자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해 마태는 이렇듯 정교하게 산상수훈을 조직했고, 그 핵심에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넣어 놓았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과 대화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능한 한 은밀한 중에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의식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절실한 헌신이 이루어진다.

마태복음판에 의하면 주기도문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과 여섯 개의 ‘청원’들, 송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여섯 개의 청원은 세 개의 ‘당신’ 청원들과 또 세 개의 ‘우리’ 청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복음판과 비교해 보면, 마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한 반면, 누가는 그저 ‘아버지여’라고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주기도문이 네 개의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분석해 볼 때, 이 주기도문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고, 그 뒤에 나오는 세 개의 청원 즉 양식(마 6:11), 죄 용서(마 6:12),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달라는 청원(마 6:13a)들은 부수적인 청원이다. 그러므로 네 개의 청원이 원래 예수께서 의도한 청원이라고 볼 수 있다.


2장 하나님 우리 ‘아빠’

앞에서 논증한 것처럼 주께서 가르쳐주신 네 개의 청원들을 가만히 보면 모두 우리의 삶과 실존에 필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주기도를 열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단어는 다름이 아니라 ‘아빠’다. 주기도문의 제일 천 단어가 ‘아빠’인 것이다. 마태판도 누가판도 그렇게 시작한다. 아빠라는 단어 하나에 담긴 진리는 엄청나다. 이 아빠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아빠와 똑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이다.

또 하나 관찰할 것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기도의 첫마디에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예수의 자기 이해 곧 자신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을 아빠라 하는 것이 친근감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시는’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아빠라는 표현은 초월해 계시지만 우리의 아빠되시는 친근하신 분임을 즉 하나님의 초월과 친근하심의 변증법적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며 그래서 초월하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아빠 노릇을 해주시는 분이시다. 초월과 내재 또는 거리감과 친근감의 양면이 적절히 강조되는 변증법적 하나님 이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빠라고 할 때 아빠인 나의 사랑을 확신하고 나를 의지하고 나에게 순종하듯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언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먼저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순종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언어다. 주기도문 첫 마디인 ‘아빠’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로써 이제 ‘아빠’ 부름에 뒤따라 나오는 모든 청원들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그렇게 청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의 원래 개념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첫째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한 것은 오로지 초월자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존중은 하나님 경외에서 비롯된다. 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생명에 대한 경외함의 근본이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경외심, 즉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외경심에서 나온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경외의 삶을 요구한다. ‘거룩하다’는 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경외심을 재차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은 우리가 가장 힘써야할 것이 첫째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인정 즉 경외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마디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전제는 부활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부활이 전제되어 있다.


3장 하나님 나라의 도래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과 나머지 모든 청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6장 33절 전반부인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6장 10절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요약이고, 6장 33절은 후반부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덧붙여지리라‘는 것은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라는 세 개의 우리 청원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면 다 해결되는 양식, 죄용서, 사탄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등을 요약한다고 볼 수도 있다.
주기도문은 간략함을 특징으로 한다. 18번 축복기도는 굉징히 복잡하고 중언부언하는 기도인 반면에 주기도문은 너무도 간결한 기도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었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가 새롭게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통해 불러모아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하는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았다.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아담의 타락을 전제한다.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에 연상되는 것에는 창조주가 온 세상을 창조하셔서 다스리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 위에 아담을 자기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당을 통치하시겠다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의 귀환과 해방과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의 귀환과 해방과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 부흥 운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이것을 추구했다는 것이 라이트의 주장이다.

진정한 귀환은 하나님의 자녀로의 회복이다. 예수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숙명인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여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가 되어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한 참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진정한 귀환으로 보았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인간의 근본 문제는 아담적 실존이다. 그것은 아버지 곧 부요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말하며, 바로 그것을 인간의 근본 문제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제한성이다.

아담적 실존은 결핍의 존재다. 이 결핍으로부터 모든 고난들이 온다. 성경은 이 아담적 인생을 양쪽으로 말한다. 즉 살아 있다고 하고, 죽어 있다고도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부터 온다. 성경은 구원의 상태를 영생이라 한다. 영생이라는 말은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문자적인 의미대로 한다면 오는 세대 또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복음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 노릇해주시겠다는 과거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탄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신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이 세대 끝에 하나님의 오심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만 결핍이 해결된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잔치로 그리는데, 예수가 바로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이제 곧 올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풍요로움과 배부름이다. 기쁨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누가복음 9장의 삭개오에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의인이 된 것이고,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죄용서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 구원이 참 구원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제한성 저 밖에 초월의 무한함에서 오는 것이라야 한다. 인간의 내재의 제한성 속에서는 구원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재 저편에 있는 무한에서 와야만 인간보다 추월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일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오는가? 바로 은혜로 온다.

초월성과 은혜성을 잃은 구원론은 절망일 뿐이다. 예수의 복음은 내재에 갇혀 있는 탕자 곧 아담을 하나님이 모른 척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4장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임하는 하나님 나라

우리에게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양식청원에 대한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의 본문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자세가 관건이다. 구하라는 것은 기도하는 태도에 대해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시켜 교훈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양식숭배는 맘몬 숭배와 대립한다. 아담적 실존은 언제나 맘모니즘적 우상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맘모니즘의 우상숭배에 빠지면 이웃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날의 만나 내려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양식청원은 하나님 신뢰의 신앙고백이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 속에는 첫째로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초월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 해주심에 의해서만 나의 생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문명낙관론은 있을 수 없고, 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안식일적 삶이다. 나의 스스로의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은혜로 오는 것을 의지해 살겠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다.

아담적 삶을 중지해야 한다. 아담적 삶이 올바른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태도는 자기가 자신의 일로 자기의 생명을 얻으려는 것으로, 결국 자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담적 실존을 지양하고 만나에 의지해서 살고자 하는 삶 곧 날마다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은혜 베풀어주심에 의지해서 살겠다는 의미다.

오늘날 영성조차 물질화되는 현실은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도 물질화되어서 교회 안에서조차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맘몬의 길은 슬픔의 길이다. 맘모니즘 우상은 이웃착취로 나타난다. 반면에 맘모니즘 청산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 맘모니즘을 청산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혼신을 다하는 사랑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맘모니즘의 탐욕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화된 것이고, 맘몬에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맘몬은 항상 이웃착취로 나타난다.

주기도문을 드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우리의 아담적 삶의 자세를 지양하고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삶의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5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과 필연성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자라나게 되어 있다. 인간들의 반대가 아무리 심하고, 사단의 방해가 어떠하더라도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식 경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적 경건주의를 반대하셨다. 예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은 왜곡한 채 율법의 문자에 집착해서 정결운동만을 열심히 하는 그런 바리새적 소극주의를 비판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온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이 땅에 실현된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순종의 요구로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살아야 하며, 죄용서를 청원하는 것은 막연한 회개가 아니다.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죄용서 청원은 용서의 서약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하여 죄용서함은 서로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용서가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용서 없는 용서 청원은 헛되다. 따라서 죄용서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의 청원들은 모두 서약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의 청원만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 또한 주기도문은 적극적인 제자도를 요청한다. 다시 말하면 제자도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하는 헌신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청원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는데, 누가복음은 이 청원의 앞부분만을 사용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는데, 마태는 아마도 이 청원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악으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를 덧붙인 것 같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단의 통치와 반대개념이다. 사단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통치한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잔치나 상속의 그림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한다. 이처럼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 간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종말론적 구조 속에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은 했지만, 그 완성은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로 하나님 나라가 출범하지만 예수의 재림 때 완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속히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오소서가 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정한 주권을 경험해야 한다. 사단이 유혹하는 영역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감정을 포함하는 인간의 전영역이다. 따라서 날마다 사단의 시험에 빠져들게 말아 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제자도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된 청원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이다. 이 청원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서약을 함께 담고 있다. 또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의 서원으로서 죄용서를 받은 자로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포함된 기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의 탁월함을 기억해야겠다. 이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 자기의 욕심만을 만족시키면 그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는 대조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당한 삶이 없는 것들을 구하는 기도의 태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둘째로 주기도문의 짧고 간결함은 마태복음 6장 7절의 요구에 잘 맞는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전한 삶을 위한 기도다.

셋째로 주기도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늘에 계시는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과 그분이 우리 아빠 되신다는 친근감을 아주 적절히 유지해준다.

넷째로 기도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을 다 읽어보면 나의 하나님이라고 쓴다. 예수의 주기도문도 우리의 언어로 하는 기도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항상 이웃과의 관계, 나에게 죄지은 자들, 나와 함께 있는 가난한 자들로서 사단의 유혹에 떨어진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내가 형제 노릇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다섯째로 이 기도는 항상 서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게 한다. 하나님께 우리가 비는 것이 실현되는 데 있어서 우리 쪽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서원을 하고, 그것을 열심히 하게 하는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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