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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오늘의 웨슬리/장기천/전망사

조성원 | 2003.06.29 14:26
◉ 저자: 장기천(張基天)
∙함경북도 청진태생 ∙감리교신학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회장역임, 동대문교회 목사, 저서:황혼에 쓴 낙서외 9권 ∙역서:강자와 약자 외 2권.

요약본

서론: 본서는 저자가 “감리교 신앙”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은 진리와 역사 의식을 웨슬리를 통해 다시 배우게 된 것을 감리교도들과 함께 생각하며 경험을 나눌 필요를 느껴 책으로 엮은 강좌 내용이었다.

내용요약: 웨슬리는 분명히 진리를 탐구하던 종교인이였다.
본서의 차례의 내용을 요약하고저함

1. 버릴 수 없는 것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목적과 의도를 위해서 모이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영감이 넘치고 헌신적인 사람들일지라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자체를 영구화하거나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또 교인들의 복지를 도모하고 향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는 믿음과 희생을 요청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신앙에 의하면 교회는 다음의 네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교회는 하나이다.(마16:16,요17:11,엡4:4-6) 둘째, 교회는 거룩하다.(아울렌, 조직신학 p293) 셋째, 교회는 우주적이다.(골3:11) 넷째, 교회는 사도적이다.(아울렌, 조직신학 p228, 고전12:28-30)

2. 교회의 기능

흔히 사람들은 현대교회는 세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1. 하느님의 말씀선포적(케리그마) 기능. 2.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적) 기능. 3.교회의 봉사적(디아코니아) 기능(첫째, 어둠을 비추는 빛, 마 5:14-16). 둘째, 누룩과 같아야 한다(마 13:13). 셋째, 소금과 같아야 한다(마 5:13).

3. 존 웨슬리와 감리교
  
웨슬리는 1703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1728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목사였다. 1735년에 미국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감리교회는 1729년에 시작된 교회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1729년 존 웨슬리를 비롯한 10여명의 청년들이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감리교 모체라 할 수 있는 “신도회”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감리교회는 한 마디로 존 웨슬리에 의해 태동되었고 창설되었고 그 방향이 설정된 교회이다.
성서와 이성, 전통과 경험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감리교 신앙이 무엇일까? 감리교 신앙은 존 웨슬리의 25개조 “종교 강령”과 53편의 “표준 설교” 그리고 그의 “신약성서 주해”와 “일기”속에 함축된 신학사상을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4. 전통- 성서
감리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규범을 알아야 한다- (성서, 전통, 경험, 이성이다).
웨슬리는 스스로 규정하여 “나는 한 책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책이 바로 성서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로 하여금 한 권의 책을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표준설교 서문).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합니다(딤전 2:4).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 동일한 성령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 항상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웨슬리의 “구약성서 해설”서문).
웨슬리는 성서 읽기의 여섯 가지 원칙을 가르쳤으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기도하면서 읽어야 하고, 둘째,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결심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전통- 종교 개혁
종교 개혁의 신학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근거한다. 이것은 바울사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종교 개혁의 신학은 성서에 기초한다. 종교 개혁의 신학은 평신도의 발견이다.(평신도는 하느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종교 개혁은 인본주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인본주의-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상체계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인간은 그 몸의 지체라는 바울의 신앙에 충실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은 경건주의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신앙의 개혁임과 동시에 생활의 개혁이기도 하였다. 루터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를 복음서가 아니라고 악평한 일이 있다.

6. 이성과 계시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합리한 것은 용납하지도 않고 용납해서도 안 된다. 이성이란 사고력과 이해력, 그리고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이 세 가지 힘에 의해 사물과의 바른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요, 종교와 이성은 병행을 이루며 모든 비이성적인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교리이다”(웨슬리가 루더포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
“계시란 하느님의 자서전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해 진술해 놓은 이야기이다”(버나드 램 웨슬리 연구가).
하느님의 계시는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계시자 자신이다. 이는 하느님이시다. 둘째는 계시의 도구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다. 셋째는 계시를 받는 존재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믿는 사람에게 임하신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와 이성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존중하신다.
계시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선포의 형식으로 역사하신다(설교), 글의 형식으로 역사하신다(성서). 인격의 형식으로 역사하신다(예수 그리스도).” 선포와 글을 통해서 계시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계시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

7. 중생의 교리
감리교회 교리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첫째, 중생의 교리이다. 중생이란 사람이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즉 육의 생명만 가졌던 사람이 하느님의 역사로 영의 생명을 가지게 된 사람을 뜻한다. 바로 거듭남을 말한다.
웨슬리는 “신생의 표”라는 설교를 통해 감리교회 중생교리는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중생의 첫 번째 증거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와 감동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중생의 두 번째 증거는 소망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벧전 1:3.고전15:14).
   세 번째 증거는 사랑이다. “웨슬리는 우리가 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우리 형제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거듭남의 네 번째 징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성서의 중요한 메시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증언하는 것이다.

8. 성령의 증거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 둘째는 율법적인 인간, 셋째는 복음적인 인간이다.  
자연적인 인간이란 잠자는 상태의 인간을 의미한다. 자연적인 인간이란 어두움의 존재이다.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율법적인 인간이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인간을 안다. 율법적인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는데 대한 갈등에 고민한다.
복음적인 인간이란 하느님의 존재와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사는 인간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 해방시키는 자는 “성령”이다.
웨슬리에 경험에 의하면 성령의 구체적 증거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전혀 하느님의 역사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령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령에 대한 서술은 생기, 바람, 물, 불, 기름, 비둘기, 표(안수) 등 일곱 가지로 되어 있다.

9. 만인 구원의 사상
감리교 신앙의 특색 중의 또 다른 하나는 만인 구원의 신앙이다. 이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에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은 멸망에로 예정되었다는 이중 예정론은 하느님의 성품으로 보나 성서의 정신으로 보나 타당한 진리가 될 수 없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은 두 개의 거대한 줄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성화(聖化 Sanctification)입니다. 의인에 의하여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합니다. 성화에 의하여 우리는 죄의 세력과 뿌리에서 구원을 받으며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하느님과의 평화)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롬5:2-5). 의인이란 지난 죄의 사람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의인은 하느님의 사람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두려움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이것을 웨슬리는 “성화”라고 한다. 성화란 현실적인 죄의 세력이나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뜻한다.
웨슬리는 양심을 “선재은혜”(先在恩惠)라고 정의한다. “‘양심’이란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행적(先行的)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은 많든 적든 이 선행적 은총을 지니고 있습니다”(우리들의 구원을 성취하는 일에 관하여).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복종하고 헌신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신인공동설은 감리교 신앙의 특색중의 특색이다. 이것 때문에 다른 교파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다.

10. 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을 두 유형으로 나눈다. “엇비슷한 그리스도인”(almost)과 “완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반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반쯤은 발을 빼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맡기고 복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논문에서 첫째, 그리스도인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실수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 있어서 완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며 힘을 다하여 섬기는 사랑이라고 한다. 웨슬리는 성결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성결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에는 거룩 또는 성결(Hagios)이라는 단어가 234회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94회는 성령과 관련된 것이고 64회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있어서의 성결의 개념은 하느님과 관련되어있다.
사도들의 견해에 의하면 성결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성결은 사랑의 목적이고 사랑은 성결의 동기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견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11. 삼위일체 하느님
감리교는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누구라고 믿는가? 웨슬리는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하느님을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설명되어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길은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신구약 성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을 계시하는 책이다. 사랑이 없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하느님을 비정(非情)한 폭군으로 전락시키고, 거룩하심이 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목적 없는 감상주의에 빠지게 한다라고 표현했다.
  
12. 창조와 구속
웨슬리는 하느님의 사역에 대해 네 가지로 언급하였다. 창조와 통치, 심판과 구속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인간을 그 형상 때로 지으셨다. 그는 창조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다음 열가지 점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1) 하느님은 당신이 선히 여기신 어느 때에 창조를 시작하셨다. 2) 하느님은 당신의 주권에 의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셨다. 3) 당신의 뜻대로 우주의 위치를 결정하셨다. 4) 당신의 뜻에 따라 별들의 수를 정하셨다. 5) 생물을 창조하셨다. 6)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인간, 육체를 가진 영과 같은 존재를 만드셨다. 7) 국가의 경계를 정하셨다. 8). 인간환경을 결정하셨다. 9) 사람에 따라 약한 몸, 강한 몸, 건강한 몸과 병약한 몸을 주셨다. 10) 사람에 따라 이해와 지식의 정도를 정해 주셨다.
또한 그리스도 “선재론”에 따라 사실 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없었다면 하느님의 창조는 성립되지 않으며 또 믿음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는 신앙이 없다면 그의 인간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근거도 뿌리뽑히게 된다(요1:14).

13.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는 오래 전에 예언된 대로 세상의 구주, 메시야였음을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하여  사도신경을 신앙의 고백으로 삼는다. 바로 (요 1:1, 14,  20:31, 빌 2:6)의 말씀에 기초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역할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제사장과 예언자, 그리고 왕의 차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낮추어 종이 되셨다. 그리고 자신을 복종시켜 죽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자기 겸비”의 사상의 핵심이다.

14. 성령
웨슬리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끼친 공헌은 무엇일까? “성령을 신학의 주제로 삼은 것”, 인간의 영혼을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 것“(리처드 니브)이다. 또 ”나는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영을 믿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이시며 홀로 완전히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성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시며,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교정하시며,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인격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시고, 우리의 양자됨을 확신케 하시며,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하느님의 충만하시고 영원하신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15. 인간- 하느님의 형상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순한 물질이나 한 조각의 무감각하고 지성 없는 진흙덩이가 아니라 비록 물질을 덧입기는 하였으나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영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하여 이해력을 받았으며, 여러 가지 감정을 포함한 의지력을 바르게 혹은 그릇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를 부여받았습니다”(인간과 타락에 관한 설교).
웨슬리는 자신이 이해한 하느님의 형상을 세가지 의미로 해석했다.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적 형상은 양심 즉 선택의 자유이다. 도덕적 형상은 정의와 진리로 이해하였다. 인간에게 있는 정치적 형상은 사랑이다. 모든 정치는 지배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논리에 의해 이루어 져야한다. 또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자연적인 형상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 영성은 영원한 생명, 또는 참된 지식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참된 지식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심이다.

16. 인간- 죄인
죄의 본질 첫 번째, 죄란 불신이다. 두 번째, 죄란 교만이다. 세 번째, 죄란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다. 네 번째, 죄란 소외이다. 다섯 번째, 죄란 도덕적 부패이다. 여섯 번째, 죄는 우주적 타락(폐허)을 뜻한다. 일곱 번째,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것을 뜻한다. 사단의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와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당위에 오신 예수께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마 4장).

17. 은혜의 수단
웨슬리는 은혜 받는 방법에 대해 은혜의 수단은 기도, 성서읽기, 성찬참례, 금식, 그리고 집회 참례 등이다(은혜의 수단에 관한 설교).
기도하는 사람이 유의해야 할 것은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말씀이 영혼이라면 성만찬은 몸과 같다. 성만찬은 말씀의 객관화이고, 말씀은 성만찬의 내면화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는 것처럼 성만찬은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게 한다. 따라서 성만찬은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영성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18. 율법의 이해
웨슬리는 율법에 대한 견해에 있어 루터와 전혀 다른 태도를 견지한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의 율법이 죄 그 자체 또는 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율법이 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발견하는 것이고 어둠 속에 감추인 것을 찾아내어 대낮처럼 밝은 빛 가운데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율법에 관한 설교).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 들추어내는 것이다. 율법의 속성은 옳은 것이다. 율법의 본성은 선악의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본성은 죄를 고발하고,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다. 율법은 총화이다. 총화는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19. 사회 사상- 권력 이해
“모든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난다.” 그러므로 감리교도들은 가급적 권력과의 싸움을 피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국민의 권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신성한 것이며 나라의 방패이다.

20. 사회 사상-경제의식
웨슬리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사상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의 경제에 관한 윤리도 이 인류의 평등주의에 근거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경제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의 개념이었다. 이 소유의 개념은 감리교 정신에 있어서 협동정신으로 열매 맺는다. 전통적인 개신교 정신에 의하면 빈곤은 게으름의 결과로 알려져 있었다. 이를 웨슬리는 비판했다. 웨슬리는 당시에 영국에는 저 유명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nith)가 있었다. 그는 경제는 정부의 주도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방임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소위 근대 자본주의 경제 이론을 제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와 반대로 경제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부 주도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결코 사회주의자이거나 특히 국가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21. 사회 사상- 돈의 사용
웨슬리의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과 식견을 가지고 세 가지 원칙을 주장했다.
첫째,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둘째,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셋째,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가난을 하나의 악으로 여겼다. 그러나 생명을 해쳐 가며 돈을 벌어서는 안되며 건강을 해쳐서도 안 된다(돈의 사용).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귀중한 달란트를 바다에 던지지 마십시오, 재물을 무익한 경비로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활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에게 돈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들의 영혼을 멸망시킬 함정을 파 놓는 일이 됩니다.”
웨슬리는 돈을 쓸 때 다음 네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첫째,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쓰고 있는가? 둘째, 재산의 소유자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청지기로서 쓰고 있는가? 셋째, 이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는가? 넷째, 의인들이 부활할 대 상급 받을 만한 일인가?

22. 오늘의 웨슬리- 해방신학과의 만남
웨슬리 사상에 대한 현대 신학의 이해와 해석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특히 그의 “성화”의 사상이 오늘날 제3 세계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해방 신학”의 근거로 원용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신학은 대표적으로 세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인종 차별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관심을 갖는 흑인신학, 둘째,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불리한 사정과 희생 아래 남성이 주도적으로 문화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항거하는 여성 신학, 그리고 경제력을 지배하는 특권 그룹, 계층, 조직들이 제3세계 국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을 이용하는 남아메리카 신학으로 분류된다”(T. 러넌, “웨슬리와 해방 신학”).
해방은 단순히 성화의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성화는 곧 해방이다. 즉 자유를 위한 역사적 투쟁 속에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성화를 이런 식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즉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의 기초 위에 사회를 재건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제임스콘, “흑인 종교 전통에 있어서의 성화와 해방”).

23. 오늘의 웨슬리- 여성 신학과의 만남
해방신학에 있어서 새롭게 대두된 과제가 바로 여성 신학의 문제이다. 역사가 로버트 위머스(Robert Weamouth)는 “여성 해방은 웨슬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감리교 여성 해방의 신학적 근거는 하느님 아버지냐, 하느님 어머니냐의 차원에서의 성별 문제가 아니라 성령 임재의 차원에서 추구해야 할 문제이다. “감리교는 성서를 그 문자보다는 그 정신에 따라 해석하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적인 제약에 의해 여성 제한을 말하고 있는 성서를 율법적으로 해석하는 데도 방해받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하디스티는 여성 신학의 뿌리를 감리교회에서 찾고 있다.
지금 그리스도교 세계는 엄청난 변화와 도전을 겪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 개념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미국 교회에서는 여성 신학자들의 항의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도 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고 있다.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그리스도, 위로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하는 진풍경을 보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주기도문 속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여성 신학의 반론들의 원인이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인간 문화의 역사가 가부장적인 데서 비롯된 역작용이 아닌가? 어느 날 “하느님 어머니”로 부른다하여 하느님의 존재와 그 현존양식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 본서의 평가
먼저 본서의 각항목별 요약에서 살펴보면 각 항목과 내용 중에 다른 색으로(초록, 연 하늘색) 표시한 부분은 정통 개신교 보수 신학에 위배되거나 아니면 존 웨슬리의 사상을 나타낸 것들로서 중요하다고 인식이 된 부분들을 이라고 생각되어 색을 달리하였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서를 처음 접하고서 제일 먼저 느낀 점은 웨슬리는 분명히 진리를 탐구하던 탁월한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진리를 찾음에 있어 늘 자신의 지(知), 정(情), 의(意)에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갈망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그를 새롭게 하신 성령의 내적 증거는 그로 하여금 한 권의 책의 고집쟁이(성서)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나의 교구”로 감히 정하고 몸바친 사람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서는 그의 역사가 되었고 그의 교구는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서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최근 한국교회는 이상한 성령운동의 여파로 기도만이 은혜의 수단으로 존중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요소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그리고 기도로서 이 세 가지는 우리 교회로 교회 되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다. 그 중에도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없이는 성례전의 의미도 기도의 성취도 기대할 수 없다고 믿는다.
특히 본서에서 본인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부분들은 많으나 특히 장로교 교리와 달리하고 있는 만인 구원 사상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믿는 자신으로서는 성경에도 만인이 아니라 “많은 사람”(마 26;28, 막 14:24)임에도 모든 믿는 사람으로 하여 만인 구원사상을 주장한 것은 여러 가지로 궤를 달리하는 내용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회 사상과 경제 의식에서 경제 문제는 어디가지나 정부 주도형을 지지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하여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필자가 주장하나 결국 이현령 비현령(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라고나 할까?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태동의 빌미를 준 웨슬리의 “성화”의 사상이 오늘날 제3세계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해방신학”의 신학적 근거가 됨에 대하여 또한 역사가 “로버트 위머스”의 말대로 “여성 해방은 웨슬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미국에 있어서 여성 신학의 성서적 근거는 창조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사상에 근거하고 성령강림시절의 약속 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논쟁으로 가부의 판결이 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 중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도 성서의 증언이라고 함도 옳은 말이나 칼빈주의 사상에 입각한 교리를 신봉하는 본인으로서는 아무런 변론과 성경구절을 만인 구원 사상으로 호도한다고 하더라도 인증할 수가 없다.
본서를 접하면서 배우고 익힌 바가 적지 않음은 본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 내가 본서를 접하면서 감리교회에 대한 교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깊으신 뜻으로 본서를 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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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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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기도문강해/김세윤/두란노 채선희 2003.06.2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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