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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복음 잔치 오라, 강청하시는 그리스도

김재윤 | 2004.06.10 19:26
  조지 휫필드 지음, 복음 잔치 오라, 강청하시는 그리스도, 지평서원

  이 책에는 휫필드의 주옥같은 설교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적 생명의 거룩한 원리’를 삭개오와 사울의 회심, 그리고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통해 설득력 있게 풀이한다.
  
  1. 삭개오의 회심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 10).
  
  성경 어느 곳에서나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니,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구원의 선물을 어떤 자에게는 베푸시며 어떤 자에게는 베풀지 않으신다.
  삭개오처럼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 자기 앞을 막고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삭개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자기의 키가 작아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가슴을 치거나 절망적으로 주저않아서 “더 이상 그분을 보려고 따르는 것은 헛되구나. 나는 결코 그분을 볼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계속 있으며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4)라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하였다.
  뽕나무가 등장하여 삭개오가 그 뽕나무에 오르기 위해서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뵐 사람들은 조소받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어려움과 역경들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더 배울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삭개오는 그 두 장애물을 다 통과하였다. 그가 앞으로 달려 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으며 사울의 딸 미갈의 말처럼 소리쳤을 것이다. “저 부자 삭개오가 오늘 체통을 잃어버렸나? 자기의 위치가 크다는 것도 망각하고 불쌍한 군중들 앞서 달려 나가 뽕나무에 올라가서 그 광신적인 설교자를 보려고 하네!”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고 실제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삭개오처럼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을 것이며,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생명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나.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모든 여자가 똑같은 정도의 해산의 고통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을 똑같은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동일하다. 모든 사람이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시련을 겪지 않던 사람들도 그 후에 더 큰 갈등을 겪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은 후에도 시련을 당할 수는 있지만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롬 8:15).
  삭개오는 자기가 자선을 베풀기 전에 먼저 의로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공직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일을 스스로 의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을 들이라. 왕에게 바쳐야 할 세금을 내지 않은 양심 없는 사람들, 물건을 사고 팔 때 부정직하게 속인 사람들은 이 말을 잘 들이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면, 삭개오처럼 있는 힘을 다해서 보상하기까지는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여러분의 조상이 아니라 마귀가 여러분의 아비가 된다. 마음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갖지 않으면, 여러분은 영원토록 마귀들과 저주받은 영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삭개오는 비웃음을 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삭개오는 면류관을 쓰고 영광 중에 있다. 만일 여러분이 계속 주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는다면 머지 않아 여러분도 면류관을 쓰고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오지 않아도 될 만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여러분은 병들지 않았거나 적어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 전능하신 의사께 말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칼로 여러분의 심령을 쪼개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는 화살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오, 신령한 빛을 여러분의 영혼에 비추시기를 원하나이다!
  오! 세리들과 죄인들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온 마음을 드리라. 만일 주님의 부르심에 청종하기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의 저주는 정당한 것임을 기억하라. 이제 여러분 모두의 피에 대해서 저는 자유하다. 그 무서운 심판 날에 구주 앞에서 나의 말에 대해 여러분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영원한 평강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기를 소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마다 “아멘”이라 말할지어다!

  2. 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 44).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마지막 부분에서 행하신 일이 가장 최고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을 돌아보시면서 ‘그것들이 좋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운 피조물인 사람이 지음을 받았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으나 나사로는 병이 들었다. 그가 병든 마당에 그의 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의사에게 찾아갔을 것이다. 우리의 건강이 나빠졌을 때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들을 게을리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방편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열심 있고 부지런한 사람들을 비평하고 정죄하며, 그들이 일을 너무 멀리까지 끌고 나간다고 말하기 쉽다. 그렇게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의 근저를 살펴보면,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나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임을 발견한다.
  위대하고 긍휼이 충만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념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들이 자기들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위선적으로 가리고 있는 베일을 거두어 내신다. 결국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예수님을 기다리면 예수님의 뜻이 이것이든 저것이든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 11:14)라고 말씀하셨다.
  오, 신자들은 환난 중에도 거룩한 확신과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배양하고 견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신자의 힘이기 때문이다. 불신앙에 자신의 마음을 내어 주어 마음속에 억울함과 부질없는 망상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고, 총명을 흐리게 하여 마땅한 의무를 실행하는 데 더디하여, 고통의 강물 속에서 고기 잡기를 즐겨하는 원수 마귀에게 우리를 이길 큰 기회를 주는 것은 정말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연단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하기 위해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을 혼자 내버려 두기도 하신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태에서는 그러한 연단이 최선일 때가 있다. 하지만 하늘에 가서는 상황이 아주 달라질 것이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면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을 때 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책망을 던져 보는 것이 좋다. ‘내 영혼이여, 이것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만일 자기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본다면 우리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나서 담대한 확신과 즐거운 심령을 가지고 마르다처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여러분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부름받을 날이 온다. 언제 주님게서 여러분을 부르러 오실지 어떻게 여러분이 아는가? 더 이상 지체하지 마라. 이제는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서 즉시 주님께로 나오라. 재빨리 일어나 마리아처럼 예수님께로 나오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르심에 매우 민첩하게 순종했다. 그녀를 찾아온 방문자들의 눈에 띌 정도로 민첩했다.
  예수님의 죄 없는 영혼 속에 어떤 죄악적인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거나, 악에 속한 어떤 것이 주님의 죄 없는 영혼 속에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지금 느끼신 고통을, 마치 물병 속에 들어 있는 수정같이 맑은 물의 흔들림에 아주 정확하게 비유하셨다. 맑은 물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흔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다른 불순물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물은 수정같이 맑은 물이다.
  유창하게 말해야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우리가 가장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때에도 가장 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말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벅찰 때가 있다. 성령께서는 성도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시되,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신다. 한나가 아들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그러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삼상 1:13). 우리 주님게서도 바로 이 때에 그러한 방식으로 기도하셨다.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거룩한 고요함과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신다. 한나가 아들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그러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삼상 1:13). 우리 주님께서도 바로 이땡에 그러한 방식으로 기도하셨다. 영혼이 가장 좋은 상태에 있을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거룩한 고요함과 말로 할 수 없는 침착함 속에서 자신을 예수님의 손 안에 있는 백지 수표처럼 나타낼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 백지 수표 위에다 은혜를 채우도록 맡겨 두는 때일 것이다.
  그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라.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버리셨다. 주님께서 그보다 더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제발 죽은 죄인들이여, 나오라. 나와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들라. 이것이야말로 나사로가 받은 영예였다. 이와 같은 영예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친히 앉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나사로는 그랬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식탁에 함께 앉게 될 것이다. 특별히 주님의 성만찬에 함께 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앉게 될 것이다.

  3. 사울의 회심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 9:22).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는 결코 화해될 수 없는 적대감이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것과, 우리의 열매를 통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택하여 내신 자들의 무리에 들어있음을 드러낸다면,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마다 이 진리가 적용된다.
  영혼의 고통과 지독한 죄에 대한 철저한 각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어떤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하기를 아주 즐거워할 것이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흔히 죄에 대하여 처음 각성케 하실 때 지독한 시련도 함께 주신다. 특별히 사울같이 교회에서 빛을 비추어야 하고,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는 그릇으로 사용될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또 크게 높임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먼저 깊이 낮춤을 당해야 한다.
  누구나 관찰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에 속한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새로운 피조물의 호흡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기도가 없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 되고, 간구의 영이 없다면 결코 우리 영혼 속에 은혜의 성령을 모신 적이 없다는 서글픈 표증이다.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우리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모든 죄를 빽빽한 구름을 흩어지게 하듯이 지워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으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 주셨다. 주님게서는 영광스러운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나서 즉시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간구를 덧붙이신다. 마치 우리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지각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의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는가? 진정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역자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일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역자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열변을 토할 수도 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책들을 써서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따라서 설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체험으로부터 나온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심자는 반대자들을 만나도 결코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데는 그를 대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양들을 돌보지 않는 삯꾼 목자가 아니고서는 이리들이 으로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사자처럼 담대하다. 달아나는 삯꾼 목자들과 같지 않다. 달아나는 것은 그들답지 못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면 사람들과 마귀들의 핍박도 역시 더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사람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러분에게 권하노니 오직 그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 대적들의 횡포를 얼마나 빨리 잠재울 수 있는지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나중에 하늘에 가서 사울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사울에 대한 설교를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 사울과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놀라운 위로가 될 것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울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불쌍한 모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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