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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김재윤 | 2004.04.11 22:32
호라티우스 보나르 지음,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지평서원

이 책은 찬송가 작시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호라티우스 보나르 목사의 책으로서, 복음의 핵심을 다루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호라티우스 보나르가 얼마나 복음에 열심을 품고 있고, 사로잡혀 있는지를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은 사람이 파멸에 떨어진 존재요, 탈선한 존재요, 반역자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롬 1:30)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때때로' 죄인이라고 선언하시지 않고, 사람이 '항상' 죄인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부분적으로 죄인이며 선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시지 않고, 사람이 전적으로 죄인이며 그것을 보상할 만한 선함이 전무하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악하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고 선언하신다(엡 2:1). 하나님은 사람이 악을 행하는 자요, 그런 까닭에 저주 아래 놓여져 있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요,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의로운 율법을 파기한 자요, 그런 까닭에 '율법의 저주'(갈 3:13) 아래 있다고 선언하신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는, 사람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큰 죄이다. 우리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부모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고소하시는 내용은 단순히 사람이 윤리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서글프게도 불행에 빠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고소하시는 내용은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책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영원한 저주를 선고받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죄 중에서도 가장 악한 죄, 곧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이 옳지 않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그의 마음이 진실치 않다는 것 때문에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2. 사람 자신의 성품은 화평의 근거가 아님

사람이 하나님의 판단에 불복하여 반항하고 투덜거려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시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 판단에 있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냉혹하리만큼 엄격하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조금 율법을 범했다 할지라도, 일단 율법을 범하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된다.
죄를 자각한 사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증오심을 깨닫게 된다. 또 죄인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자각한 사람은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죄인 자신의 성품에서 올 수 없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요인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죄인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다.
죄인 자신의 성품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또 그것이 어떤 발전의 단계 속에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없다. 죄인 자신의 성품은 그것이 아무리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죄인의 양심에 평강을 말해 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보장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또 그것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불화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경우에 완전함이 아닌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하시지 않는데, 죄인은 당장 불완전한 모습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기만은 언제나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 자신의 체험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산물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눈을 어둡게 하는 모든 종류의 세력에 훤히 노출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나, 값없이 그리고 즉시 죄사함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그 영에 간사함이 없게 된다'(시 32:2)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선한 감정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서 본다고 말해도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시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감정들을 본다면, 어떤 측면에서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3. 우리의 안식처인 하나님의 성품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이 은혜롭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우리의 행복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싶은 의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 어떤 화평도 그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다만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기만 할 것이다. 우리의 형편은 마치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믿으면서도 두려워 떠는 마귀들의 형편과 같을 것이다(약 2:19).
하나님은 자신이 은혜롭다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하나님은 자신의 이런 은혜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런 은혜가 불경건한 자, 악인, 부적합한 자, 마음이 완고한 자,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자를 위한 것이라고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모든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다.
모든 불신앙에는 다음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자신의 자아에 대한 좋은 견해와 하나님에 대한 나쁜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 한, 구원을 추구하는 영혼이 안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신앙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에 대해서 나쁜 견해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인격적인 선함이나 개선된 삶, 또는 독실하게 의무를 이행한 것, 또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복음의 본질은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우리가 그 안에서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구원자이시며,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말이다.

4. 공의로운 은혜

단순히 부성애적인 사랑에서 일어난 모호한 용서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죄사함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죄사함이 '천하를 공의로 심판'(행 17:31)하시게 되어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절대적인 죄책을 온전하게 인식함으로써 온 것인지 아닌지를 알 필요가 있다. 올바른 종류의 죄사함은 사랑으로부터만 오지 않고 율법으로부터도 온다. 올바른 종류의 죄사함은 관대한 마음으로부터만 오지 않고, 공의로움으로부터 온다. 올바른 종류의 죄사함은 죄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오지 않고 거룩함으로부터 온다.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속죄 제사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이 의로운 행위임을 보여 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속죄 제사 사역은 구원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고로 의로운 행위 중에 하나님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속죄 제사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용서해 주고 계시는 죄라는 것을 본래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또 얼마나 정죄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저 위대한 속죄 제사 사역은 그런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셔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때문에 그런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 끔찍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 성경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는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사된 이 화목은 공의로운 화목이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확보된 양심의 평안은 시험이 와도, 질병이 찾아와도 끄떡없고, 죽음의 순간에도, 심판의 날에도 끄떡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조차도 "누가 정죄하리요?"(롬 8:3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5. 뿌린 피

대속의 상징으로서의 피와 대속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서의 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특별하게 나타난 것은 매일 드리는 번제와 아침과 저녁마다 드리는 어린양에서였다. 이 제사들은 옛 족장 시대의 번제를 참되게 지속시키고 그대로 보여 주는 전형이었다.
피를 뿌리는 것은 희생 제물이 흘린 피를 어떤 사람들이나 물건들에 바름으로써 희생 제물의 죽음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피를 뿌리게 되면 피 뿌림을 받은 사람들이나 물건들은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러므로 율법의 형벌를 모두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망'이라는 율법의 형벌을 지불하지 않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부정하고 부적절한 것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형벌을 다 지불하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에 정결하고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로 이것이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의 기쁜 소식이다. 이 생명의 기쁜 소식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기쁜 소식이다. 오직 이것만이 죄인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다. 오직 이것만이 죄인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오직 이것만이 죄인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 수 있다. 이런 피 뿌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아는 지식은 죄책으로 인해 근심에 빠져 있는 심령의 불안함을 제거해 주고 그를 완전한 평강 가운데로 인도해 들이는 효과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의 핵심 본질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그가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걸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다(롬 6:3). 그렇기 때문에 그 죽으심의 도구가 된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죄인이 받아야 마땅한 형벌을 다 지불한 것이요, 죄로 말미암아 진 모든 채무를 소멸시켜 준 것이요,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이나 속박을 다 찢어 버린 것이다(골 2:14).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값을 지불한 것이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인정하시고 친필로 서명해 주신 하나님의 영수증이다.

6. 대속주의 인격과 사역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행하라. 힘쓰고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은혜의 방편을 활용하라"라는 점을 안겨 주지 않았다. 그것은 율법이요 복음이 아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셨다고 전파했다.
의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의는 우리 귀에 들리는 바, 의에 관한 말씀만큼이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롬 10:10). 우리는 의를 우리 가까운 곳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의를 우리에게 끌어당기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의는 이미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고,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더 가까이 끌어당길 수 없다.

7. 복음 진리의 말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곧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의 편에 서셔서 죄인의 원수, 즉 옛 뱀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이 모든 일이 여인의 후손, 곧 진정한 '은신처'가 되는 '그 사람'(사 32:2)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도이다(행 7:38).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영원히 있다(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고 반석을 산산조각 내는 방망이와 같다(렘 23:29).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우리 스스로를 천거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통해서이다(고후 4:2).

8. 믿어 구원을 받으라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 주고, 우리를 구주에게 단단히 결합시켜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 한 분이시다. 성령이 없이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악됨과 무능함을 아직까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만일 복음이 거룩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분명하게 선포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령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면, 복음은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닐 것이다.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한 가지 큰 어려움은 과거의 체험과 이전에 배운 것을 많이 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연구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죄인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고 불온전한 사람에게는 과거에 잘못 배운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동시에 진실하고 온전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믿음이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것이 되기 위하여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하는 영혼의 위대한 활동이거나 노력이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까닭은 믿어야 하는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반감 때문이요,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분을 향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적대감 때문이다.
믿는 일이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은 철저한 자기 의 때문이다. 그리고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바, 믿으려고 분투하는 것, 믿음을 갖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이런 자기 의의 징후이다. 이런 영적인 활동들은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는 증거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런 영적인 활동들은 영적인 교만의 표현, 다시 말해서 자기 의가 그 영혼 안에서 지독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표현에 불과할 때가 많다.

9. 믿을 수 있는 능력의 부재

성령의 사역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구원받기에 도움이 되거나 그를 구원해 줄 무엇을 행하도록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아니면 중립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모든 수고와 행위에서 분리시켜서 그로 하여금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주께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구원으로 만족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택의 교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을 방해한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부패는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반면에 선택은 그 장애물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10. 영적인 무감각

복음은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사도들이 사용했던 망치였다. 자기 의를 굳게 의지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녹였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이었다. 그들이 복음을 믿었을 때, 그들의 완고함은 녹아져 내렸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죄는 저주하시지만 죄인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풍성한 사랑에 관한 기쁜 소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마음을 녹이지 못할 것이며, 바위와 같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못할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그 특성상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에서도 회개는 믿음에 이르기 위한 자격을 갖추는 예비 단계일 수 없다. 죄로 인한 슬픔의 의미에서 무엇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죄인에게 그 어떤 종류든지 사전 준비를 절대 요구하지 않으셨다. 율법적이든 복음적이든,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 어떤 종류든지 사전 준비를 절대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영접을 받지 못할 것이다.

12. 오직 예수

하나님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한 가지는 믿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측은히 여기는 사랑이요, 다른 한 가지는 믿는 자녀들을 향한 기쁨과 만족의 사랑이다.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집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는 충실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동일하게 지극히 진실하다. 비록 그 종류가 다를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완전한 율법으로 말미암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구원은 부정한 구원일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것은 일점일획까지라도 다 지켜진 완전한 율법으로 말미암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구원일 것이다.
선택의 교리를 제일 우선으로 두는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아니다. 물론 선택의 교리를 부인하는 복음이 사도적 복음이 아닌 것은 더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참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탁월함은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들의 수를 공표함에 있지 않고, 위대한 속죄에 대한 선포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서 죄인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죄인은 그리스도게로 오기를 원치 않는다!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당기고 죄인의 마음을 설복하는 모든 것이 성경에 있다. 그런데도 죄인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영접하신다. 그런데도 죄인은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신다. 옛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죄인은 요지부동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으로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다 아신다. 하나님은 지옥의 끝없는 고통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지옥에 떨어진 영혼의 참사를 보시며 간파하신다. 그 영혼이 영원토록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을 아신다. 그 영혼이 저주와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재앙을 끔찍하게 경험하리라는 것을 다 아신다. 그 영혼이 영원한 세계를 잃어버린 대가로 치러야만 하는 최종적인 대가에 포함되는 무수한 비애까지도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리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물을 퍼부어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을 끌 수 없다. 아무리 큰 홍수가 일어나도 그 사랑을 침수시키지 못한다. 죄인이 하나남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을 쫓아가신다. 파멸시키기 위해서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쫓아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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