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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김재윤 | 2004.03.12 10:13
호라티우스 보나르 지음,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지평서원

이 책은 찬송가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호라티우스 보나르의 작품으로, 이신칭의가 새로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중요한 저서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확인케 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 죄의 사면을 받는 과정과 심판의 질서를 정하기 위해서 어떠한 것도 제공되지 않았다면 단순히 그 질문을 법정에 가지고 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는'분이시다(롬 3:26).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사 45:21). 그것은 율법이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닌 그의 죄를 사하는 것으로써 그의 편에 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속을 통한 구원은 여자의 후손과 그의 상한 발꿈치에 관한 최초의 약속 안에서 구현되었다. 그분께서 원수에게 자기를 내어 놓으시어 상함을 입으심으로 우리의 강한 원수를 이기신 승리가, 그 순간 그 곳에서 선포되었다. 우리의 최초의 부모가 입었던 옷은 그들이 죽음을 통과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 옷으로 쓰인 희생양의 가죽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원리로 대속의 요소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히브리서에서 대속의 원리를 성전에 적용하듯이, 로마서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법정에 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예배자로서 완벽한 자들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종과 자녀로서 의롭게 만드시는 것을 또한 보게 된다.
연약한 믿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많은 죄인들이 제단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를 구원하는 것은 그의 강한 믿음이 결코 아니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희생 제물의 온전함이다. 연약한 믿음도 의미한 눈도 두려움으로 떠리는 손도 우리의 번제물의 효력을 바꿀 수 없다. 우리 믿음의 생기는 그것에 어떤 것도 보탤 수가 없으며 믿음의 빈약함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도 앗아갈 수 없다.
인격과 사역, 삶과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의 대속자였다. 그분의 대리성은 그분이 대표하시는 자들의 죄와 결핍, 시간과 공간을 같이 하며 그들 삶의 여러 다양한 환경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시대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십자가에 국한되어 그분께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전 삶을 통해서 그분께 주어진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 47). 천사도 목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그분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셨던 사건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계셨던 낮아진 삶의 한 부분으로 옛 신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부분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추방당한 자로서 우리의 추방을 대신 감당하셨다. 그분께서는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자로 이 땅을 사셨다. 스스로 버림받은 자의 자리에 서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들을 감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죄들을 지고 가신 분이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또한 그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또 그분의 매일의 삶에 대하여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도 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대리, 혹은 대속은 그분의 죽음만큼이나 그분의 삶의 각 영역 속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그분께서는 구유에 누우셨을 때 우리의 죄의 짐을 지셨으며 십자가에서 비로소 그 짐을 내려 놓으셨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죄를 지고 가신 그분의 삶 전체를 가리킨다.
우리의 보증자께서 무덤에 이르시기 전에 대속은 이미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부활은 그 사역이 받아들여졌으며 보증자께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아버지의 복된 선포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속죄나 의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도 이루지 못한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것과 승천하신 것은 갈보리에서 이루신 속죄를 실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의롭게 되는 속죄에 있어서는 어느 한 부분도 이루지 못한다. 보증자께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영원하고도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제사장과 제사장의 직분을 본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왕와 왕으로서의 능력을 본다. 죄의 사면과 정결케 함, 그리고 의롭게 함은 제사장에게 속한 것이다. 죄를 사함받은 자, 정결케 된 자, 그리고 의롭게 된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는 것은 왕에서 속한 것이다.
부활이 가능했던 것은 의롭게 하시는 사역이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께서는 무덤의 권세 아래 계속해서 누워 계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그분의 교회의 의를 이미 완성하였다. 그분께서는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을 다스릴 수 없었다. 사역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빚은 완전히 변상되었다. 그리고 보증자께서는 이제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대속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하도 해도 내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즉시 나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롬 4:6)의 위치에 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완벽하심이라는 기초 위에서 기꺼이 나를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의 완벽하심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면 모든 계약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모든 불완전함과 악함을 지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는 그러하다.
레위기는 십자가에 못박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실체와 진리로 변형될 표준적인 상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세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선지자는 여자의 후손과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상함과 연결 지으면서 레위기의 표현으로 이러한 진리의 요약된 내용을 보여준다.
그분께서 감당하신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이것이 바로 그분을 '간고를 아는 자'로 만든 것이었다. 그분을 본 사람들은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맞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였다(사 53:4).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상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아니, 그분을 상하게 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었다. 메시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을 때보다 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들'이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질고 가운데 놓으시기를 '원하셨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가 잠시 단절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두 분 사이의 연합은 결코 끊어질 수 없었다.
대속이 단번에 이루어졌다. 보증자의 몸이 무덤에 이르기 전에 그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무덤 안에 누워 계신 것은 그 사역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가시적이고 명백한 징표이자 표증이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완성된 희생 제물의 탁월함과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온전히 성취하신 분의 완벽함에 찍힌 아버지의 인자이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사 53:11).
구약 시대 제사장들이 서 있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그들이 수행했던 일이 온전히 완성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댖사장께서 앉아 계시다는 것은 그분의 사역이 온전히 행해졌음을, 그리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암시된 것은 이 땅에서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들을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선포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희생적인 사역의 온전함에 대한 증거들은 너무나 온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 사역이 진정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그러하기에 죄인 중의 괴수에게도 그것이 온전히 효력을 미치는 것임을 확신시켜 준다. 우리는 이 온전함에 대하여 묵상하는 것이 양심을 만족시키고 영혼을 채우며 모든 의심과 불신을 내쫒고 믿음과 확신을 낳고 기르는 데 너무나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십자가는 결코 끝난 것도 아니며 결코 끝날 수도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경이로움은 항상 새로운 것이어야 하며 항상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계 5:12)은 항상 우리가 올려 드리는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은 달라질 것이다. 갈보리에서의 희생적인 사역의 온전함은, 깨끗케 하는 그 능력에 의해서 모든 죄가 영원히 우리에게서 씻겨져 나간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묵상의 주제가 될 것이다.
어린양은 그분의 특별하고도 영원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께 존귀를 올려 드리며 그분을 경배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 속에서도 십자가를 놓지 말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되 영원토록 따라갈 것이다. 말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사하심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의로우시고 참되시며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사하심을 기뻐하신다. 어떠한 죄도 사하심을 받지 못할 만큼 크지는 못하다. 그리고 어떠한 죄인도 구원받고 복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 죄 속에 너무 깊이 빠져 있지는 않다. 구원의 근원이 되는 의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죄인이 안식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제사는 '의의 제사'이다(신 33:19; 시 4:5). 의는 구원의 하나님께 얻는 것이다(시 24:5).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의로운 제사이다(시 51:19). 주의 제사장들이 입는 옷은 의의 옷이다(시 132:9).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하늘에서 하감하는 것이 의이다(시 85:11).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며 서로 입맞추는 것이 의와 화평이다(시 85:10). "의의 공효(功效)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우리 편에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전가' 혹은 '간주'하심이 있다. 우리는 믿고 그분께서는 전가하신다. 그렇게 전체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속해주는, 혹은 덮어 주는 피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준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하며, 의로운 자일뿐만 아니라 '여호와 우리의 의'이신 분과 동일한 자로서 우리를 제시해 준다.
우리 편에는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불의가 있다. 하나님 편에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복을 베푸시는 의가 있다. 불의와 의는 서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평화를 맺기 위해서 만난다. 그둘은 서로 적의가 아닌 사랑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의의 손은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그 팔을 내민다.
우리를 모든 선함의 원천으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들이 전혀 없음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그 원천은 그러한 모습으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기반을 의지하고 나오는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닫혀 있다. 우리를 빛과 생명의 원천인 분에게로 이끄는 것은 바로 그 빛과 생명의 철저한 결핍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은신처로부터 찾아내실 때 발견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교환은 너무나 온전하며 우리의 위장은 너무나 완벽하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위장이며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위장이다. 그것은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의이다.
이 '영원한 의'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5:1). 그리고 그것의 열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롬 5:1).
그분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모든 계약 관계를 통해서 획득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그것을 우리의 탄원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얻는다. 그분께서 하지 않으신 것들이 그분께서 지으신 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마치 그 모든 죄들을 실제로 범하신 자인 양 취급받으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행하신 것들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모든 일들을 행한 것인 양 우리를 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단순히 이 의 때문이 아니라 법적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옮겨짐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의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인 양 그것을 사용할 수 있고, 그것으로 탄원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탄원할 수 있으며, 그 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가된 첫째 아담의 죄와 우리에게 전가된 마지막 아담의 의가 이렇게 나란히 놓여 있다. 또한 대속자가 되신 하나님께로 우리 죄가 옮겨지는 것과 대속자의 의와 온전함이 우리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반드시 함께 서 있거나 아니면 함께 넘어져야 한다.
재판자는 반드시 의롭게 하는 자이거나 심판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재판자이시다. 심판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일이다. 그러나 의롭게 하시는 것 또한 그분의 일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나오는 인간 안에 죄를 부어주시고 나서 심판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죄인 안에 의를 부어주심으로 의롭게 하지도 않으신다. 그분께서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은 재판자의 자격으로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단지 죄를 사해 주시거나 죄를 없애 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 이상의 일을 행하신다.
계약은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옮겨진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빌려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법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되며, 모든 법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의 것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우리의 것인 양 실효 면에서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계약은 모든 관점에서, 그리고 관련된 당사자들의 입장과 이익에 있어서 철저하게 의로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사랑이 인간에게 흘러 내려오는 의로운 통로로 제공된다. 그것은 죄사함을 위한 의로운 초석을 놓는다. 그것은 회심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위한 의로운 환영을 보장해 준다. 그것은 심판받아야 할 자의 심판을 의심할 여지 없이 의롭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무한하고 변동할 수 없는 의의 입증이요, 표증으로 만들어 준다. 또한 그것은 의롭게 된 자의 의를 그가 심판받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의보다 훨씬 더 의롭게 만들어 준다.
인격의 탁월함, 제물로서의 적합함, 대속적 가치에 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에 대한 깨달음만이 죄인의 심령과 양심에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심령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그분의 온전하심을 제시하여 심령을 만족시켜 준다. 또한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모든 기초들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심으로부터 제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그분의 온전하심을 제공함으로써 양심을 만족시켜 준다.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께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그분께로 옮겨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이 전가라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롬 8:1) 상태로 들어가는 온전한 교환이 가능해진다. 죄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자로 간주하고 의는 우리를 그 대소자를 받아들인 자로 간주한다. 이것이 구속이고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그가 비록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믿음이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의를 행한 자로 여기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의로 여겨진다는 것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롬 5:1). 믿음은 일로서, 도덕적인 행위로서, 하나의 선행으로서, 혹은 성령의 은사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와 대속자 사이의 유대 관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다. 그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유대 관계인 듯 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강철만큼이나 강하고 단단하다.
믿음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완벽함이든, 혹은 다른 이의 완벽함이든 오직 완벽함에 의해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불완전한 것은 의롭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불완전한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건 의가 될 수 없다. 의롭게 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완전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벧전 1:19) 것이어야 한다. 불완전한 믿음은 우리를 다른 이의 완전함과 연결시켜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진노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나 하나님의 죄사하심을 보장해 주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는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믿음은 부자의 금이 아니다. 믿음은 거지의 뻗은 손과 같으며, 닻이 아닌 닻줄과 같고, 문이나 궁궐이나 탁자가 아닌 두드리는 고리쇠 같으며, 태양이 아닌 빛을 들어오게 하는 격자창과 같다.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구유에서 무덤까지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모든 것들이 하나의 영광스러운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전체 중 어떤 한 부분도 필요가 없다거나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안에 선함이 철저히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결핍에 대한 대속물로서 십자가를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다른 이가 성취한 구원을 영혼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에 어떠한 것을 기여하기 때문에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우리가 믿는 그분 사이의 사역을 나누거나 공유할 수는 없다. 모든 사역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그분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전혀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십자가에 못박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보호자,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 우리의 의, 우리의 양식, 우리의 힘,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과 함께 나누는 교제는 축복과 거룩한 삶의 비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을 방해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는 생명의 주를 죽이는 일에 성공했다. 그리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 아니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삼손은 옥에 갇혀 있었고, 계속해서 그곳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큰 돌, 파수꾼, 로마의 인봉, 이 모든 것들이 이러한 확신에 대한 증거이다.
그분께서는 구속자, 왕, 만민의 심판자이시다. 그분께서 자신의 교회 안에서 발(發)하시는 것도, 그분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벧전 1:3) 각각의 거듭난 자들을 적대감과 사망의 세상 속에서 외부와의 싸움과 내면의 두려움으로부터 지켜 주시는 것도 바로 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이다.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권능의 능력 안에서 힘을 얻는 우리는 정복자보다 더 강한 자들이다.
간고는 아는 자께서 무덤 속에 우리의 모든 죄를 버리셨을 때, 그분께서는 간고 또한 그곳에 모두 버리셨다. 그곳에서 간고는 모두 그분과 함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그분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의 충만한 기쁨이 시작되었다.
칭의에 대한 확신은 인간을 더욱더 자기 자신과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며, 예수님과 그분의 충만하심에 대해서는 더욱더 만족해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그에게 자신에 대한 만족함도 성장해 가는 자신의 거룩함도 자신의 기도나 선행의 분량도 아닌, 단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일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확신을 두도록 가르쳐 준다.
슬픔이 우리를 덮쳐 올 때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이 진정한 등불이 빛을 발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크게 요동치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은 폭풍 속에서 우리의 항구가 된다. 힘든 시간에 우리의 견고한 망대가 된다. 우리 마음을 위로해 주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을 빛이라 부르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에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게로 역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아들에 대하여 기록하신 것을 단순히 믿음으로써 이미 그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분을 섬긴다. 뿌리가 거룩하다면 가지 또한 거룩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뿌리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연결에 의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룩한 자가 된다.
심판은 우리의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먹구름이다. 죄사함은 구름을 흩어지게 하며 눈부신 빛으로 모든 선한 것들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고 익어가게 만드는 햇살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의 진수를 보여 준다. 우리의 강단이 다시금 이신칭의의 교리의 영광을 회복할 때 다시금 영혼들이 새롭게 소생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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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0 기질학습과 영적성숙 이종수 2004.05.20 14:47
29 초대 언더우드선교사의 생애, 연세출판부,1991 강석천 2004.04.16 17:53
28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김재윤 2004.04.11 22:32
27 회심을 위한 불같은 외침 김재윤 2004.04.01 17:29
>>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김재윤 2004.03.12 10:13
25 천지 창조의 목적 김재윤 2004.02.26 17:24
24 회심, 하나님께로 돌아서다 김재윤 2004.02.13 09:36
23 마틴 로이드 죤스의 크리스마스 메세지 김재윤 2003.12.29 09:13
22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김재윤 2003.12.18 17:13
21 부흥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채천석 지음/한국강해설교학교 출판부 강석천 2003.12.17 15:27
20 칼빈의 여성관 김재윤 2003.12.15 20:17
19 리챠드 백스터의 회심 김재윤 2003.12.05 13:37
18 죠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김재윤 2003.11.28 11:38
17 존 오웬의 죄와 유혹 김재윤 2003.11.20 18:05
16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토마스두리틀/기독교문사 김재윤 2003.11.14 11:06
15 토마스 왓슨의 경건을 열망하라 김재윤 2003.11.06 21:28
14 시험당하신 그리스도 김재윤 2003.10.3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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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진돗개전도왕/박병선/생명의말씀사 황성구 2003.10.29 22:00
11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김광훈 2003.09.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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