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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천지 창조의 목적

김재윤 | 2004.02.26 17:24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천지 창조의 목적, 솔로몬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책에서 깊은 사색적인 논리와 성경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이제부터 간략하게 살펴보자.

세상 창조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에 대한 그 어떤 개념도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데, 곧 그 이성은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어떤 빈곤, 불충분, 그리고 돌연변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존중을 가지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 되든, 그리고 너무나 본래적으로 세상 창조에 우선하고 그것이 창조로 말미암아 이루게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만일 모든 다른 것보다 가치 면에서 우월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될 가치가 있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어떤 점에서 정당하게 세상 창조에서 주님 자신의 목적이 되는 것을 수용하실 수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이 사역 가운데서 자신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고차원적 목적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상상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적으로 세상 창조의 효과가 무엇이든 그것은 그 자체가 단순하게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이 알려지고 또 그 완전성의 활동과 표현들이 그분 이외의 다른 존재들에 의하여 보여져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적절하고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영광이 알려져야 한다는 사실이 본질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그것이 동일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알려졌을 때는 그것을 그 존엄성에 맞게 존중하고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모든 가능하고 좋은 것이 무한히 충만해 있는 것처럼-모든 완전함의 충만, 모든 탁월성과 아름다움의 충만 그리고 무한한 행복의 충만-그리고 이 충만이 전달 가능하고 또는 밖을 향하여 유출 가능한 것처럼, 이러한 무한한 선의 근원이 풍성한 흐름을 발산해 낸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호의적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질적으로 뛰어나고 가치 있는 것을 존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그래서 그 존재 가운데서 기쁨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치가 되든 아니든 둘 중 하나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에 대한 사랑과 공중에 대한 사랑이 사람 안에 있는 그것과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적절하고 알맞은 것에 대한 사랑은 그 자신에 대한 사랑과 구별된 것일 수 없다.
하나님보다 무한히 못한 존재들 가운데서조차도 적절한 기쁨을 취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무가치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다. 민중의 칭찬을 고려하여 그 행위와 업적들이 조종되는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무가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된 내용에 대하여, 나는 그들의 칭찬을 너무나 사소한 존중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무지, 경박함, 불공정이라고 주장하는 바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사랑에 유폐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자비심과 반대된다.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그 선의 관대함을 훼손하는 또 다른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선을 위하여 그들에 대한 의존 관계에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이는 것을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몇몇 사역들 가운데 성경에 의하여 최종 목적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전반적인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드러난다.
세상 창조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그분의 모든 섭리 사역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덕적 세계 혹은 우주 체계의 지능을 갖춘 부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전반적인 면에서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다.
하나님의 주된 섭리 사역에서 성경에서 그분의 궁극적 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세상 창조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라고 우리는 당연히 결정할 수 있다.
성경을 통하여 무엇이 도덕적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섭리 사역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타나든지, 우리는 당연히 세상 창조의 최종 목적이 되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 존재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하는 선에 있어서 선한 도덕적 세계의 그 부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되도록 보여 준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지능적이고도 도덕적인 부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높은 목적을 추구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드신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할 이유를 가지고 있고, 그 결과 세 번째 입장에 의하여 하나님이 온 세상을 만드신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도덕적 세상의 선이라는 주된 목적으로 진술된 성경에 있는 내용이-그리하여 그들의 선에 대한 존중과 또 선에 대한 관계가 주로 그것을 가치 있고도 바람직한 것으로 만든다-도덕적 세상 창조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래서 네 번째 입장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성도들로 인정되고 경건의 모범으로 제시된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은 선한 행실과 인정받은 행위라는 실생활 가운데서 자기들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높은 목적을 추구했는데, 우리는 그들이 자기들의 최종 목적으로 추구해야 했던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 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최선의 영혼들의 욕망 가운데서, 가장 자연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자기들의 선을 행사하는 그들의 최선의 구조들 가운데서, 또한 이 목적에 대한 자기들의 바람을 표현하는 가운데서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한 존중이 가장 적절하고도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덕적 세계의 머리시고, 특별히 그 선한 모든 부분들의 머리 곧 자기의 성도들과 천사들의 머리로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들의 머리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선의 우두머리요 선의 가장 완전한 양식과 모범이라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앞의 입장에 의하여 당연히 그분께서 자기의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신 것이 세상 찾오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것은 자연히 우리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과 여러 사역들 가운데서 자신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으시는 방법, 곧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시는 일이 '자기의 영광'을 자기의 최종 목적으로 만드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선한 도덕적 세계의 부분들이 만들어진 최종적 목적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창조의 도덕적 부분의 선하심이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 목적을 주로 그들의 덕의 가치가 내재하는 관계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이 하는 일들 가운데서 가장 높고 최종적인 목적으로 갈망하고 또 추구해야 한다고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내용들이 있다.
성경에 제시된 근거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도덕 세계의 최상의 부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열렬하게 갈망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최상의 구조들 가운데 참된 선의 정신과 도덕적이고 경건한 그들 마음의 애정의 직접적 경향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그 결과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최고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셨다고 생각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대섭리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최종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세상의 도덕적 통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 가운데서 주님의 여러 사역들의 최종 목적으로 말해졌다.
성경에 의하면 피조물들에게 전달해 주시는 선하심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속 사역이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식으로 말해지고 있는데, 이는 오직 부차적으로만 그들에게 선을 전달하려 하신다는 사실과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전달, 특히 죄 용서와 구원은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된 것이라고 살펴본 바와 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하여 그리고 자기의 자비로 인하여 되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세상 정부의 각 부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영원한 주제가 될 것으로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로서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켜 줄 목적으로, 천사들과 인간들의 왕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주의 머리로, 교회에 만물 위에 머리가 되시고, 그들의 선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 가르치고 있는 내용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가운데 자기 백성의 선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은 신명기 33:16에 가장 고상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그들의 영원한 멸망은 하나님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영원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속하게 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창조의 모든 부분들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창조와 섭리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이 시편 136편에서 자기 백성들을 향하신 선하심 혹은 긍휼의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다.
심판 날에 의인에 대해 선고한 복된 문장의 표현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의 열매가 세상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행사에 있어서도 그분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과 일치하여, 인간들의 선도 도덕적 세계의 덕의 궁극적 목적으로 말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문구는 가끔 삼위 하나님 중에서 제2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 반드시 성경의 특별한 구절로 그것을 입증할 필요는 없다.
영광이란 단어는 가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자주 내적 영광의 나타냄, 발산, 전달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다시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된 그 영광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한 봄 혹은 지식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영광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자주 찬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내적 선 혹은 영광의 총체는 이 세 가지 요소들, 즉 그분의 무한하신 지식, 그분의 무한하신 덕 혹은 거룩 그리고 그분의 무한하신 기쁨과 행복 가운데 있다.
우주 혹은 본 저자가 '세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우주에 대한 하나의 분명하고도 포괄적인 입장은 우리로 하여금 크게 두 개로 분석하도록 만들어 주는데, 그것들은 물리적,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주 가운데서 물리적 부분에 대한 창조와 배치를 통해서는 주권적 지혜, 능력, 그리고 선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자연적 속성들의 영광이 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도덕적 부분의 창조와 통치를 통해서는 무한한 도덕적 공정성 혹은 공평을 가진, 그리고 주권적 자비와 은혜를 가진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무한하신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참작 없이 다만 무한한 공정성의 지배를 받아 혹은 자기 자신의 특성의 일관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형태를 수용할 수 있는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물리적, 도덕적으로만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성의 도덕적 속성들 밖으로의 충분한 발산과 나타남이 관계라는 그 모든 잠재성들 가운데 있는 도덕 체계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지능을 갖춘 존재들의 물리적 활동을 포함하여 우주의 물리적 부분은 주권적 지혜, 능력, 다른 선하심 가운데 포함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영광의 나타냄을 요구하는 것 없이 존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일 완전한 혹은 절대적 공평과 주권적 자비가 나타난다면 하나의 도덕 체계가 필요하다.
우주의 도덕적 부분의 전체가 죄로부터 지켜져 왔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주권적 자비가 완전하고도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공정 혹은 공평의 시행을 좌절시키기 위해 삽입하기를 생각했다면, 이 하나님의 완전의 영광을 영원히 감추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 절대적 공정.
피조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용하는 것과 절대적 공평을 시행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공평은 동시에 같은 대상을 향한 주권적 자비의 시행과 실질적으로 조화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한편으로 공평은 자비와 대립되는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공평은 불공평의 배제를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은혜의 배제 또는 주권적 자비의 감화의 배제를 의미한다.
결점의 허용이 공평에 의하여 배제되는 도덕 체계의 관겸 자체는 가장 모순된 것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겠다. 즉 우주의 책임성 있는 지능을 갖춘, 그리고 도덕적 능력들의 충분한 범위에 이르기까지의 도덕적 부분을 향한 하나님의 공정의 영광은 죄에 대한 허용이 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
죄의 일을 허용하거나 혹은 금지하지 않는 것은 그 결점의 원인이 그 허용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허용을 받을 자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연 및 하챦은 자유이든, 아니면 자아 결정적 능력이든, 어떤 독립적 전체 원인이 죄 혹은 도덕적 체계의 타락이라는 사건의 근거에 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허용은 공평의 한 행위다. 그러므로 만일 공평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이라면, 그 공평의 발산과 시행은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긍휼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속성인 것처럼, 그것의 시행 역시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될 것이다.
우주의 도덕적 부분의 창조와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도 주된 목적은 그분의 도덕적 극치의 영광이며, 이것은 사실상 엄밀한 공정과 주권적 자비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만일 엄밀한 공정이 그 체계의 타락한 부분을 향하여 시행된다면, 그 엄밀한 공정의 대사이 되는 사람들의 회복은 가능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만일 타락한 도덕 시행자가 회복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긍휼이라고 부르는 주권자의 자비이 시행에 의해서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타락하고 잔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잔혹하심을 보라!"

이 책은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가 모든 목사들에게 강제적으로 읽히고 싶어했던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정독하여 읽어 본다면, 그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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