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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마틴 로이드 죤스의 크리스마스 메세지

김재윤 | 2003.12.29 09:13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마틴 로이드 존스의 크리스마스 메시지, 청교도 신앙사

금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 목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와 함께 성탄을 보낸다면 최고의 성탄이 되지 않을까? 이 책에는 마리아의 찬가를 강해한 로이드 존스 목사의 탁월한 설교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하나님을 찬양하며(눅 1:46-55)
마리아의 이 찬송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이 말씀 속에 나타난 마리아의 감정의 깊이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리아는 말하기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도다'라고 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기의 혼(魂)과 자기의 영(靈)을 구분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 무엇이 그녀의 인격의 중심,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와 닿았음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찬송의 모든 내용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구원의 복된 소식이 영혼에 닿을 때에 일어나는 효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복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진정 깨달았을 때에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런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리아가 토로한 찬양의 내용을 읽노라면, 두려움과 경이, 예배와 경탄의 감정이 그녀에게 충만했음을 느끼게 된다. 마리아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안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다. 나는 지금 온통 감동의 도가니 속에 있어요. 내 혼과 내 영이 감격으로 충만해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늘 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일어난 일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 사건의 영원한 의미에 대해서 그 깊고 깊은 의의에 대해서 그 놀라운 성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반드시 우리의 영과 혼이 그야말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러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갈 4:4) 사실을 과연 올바로 깨닫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궁극적인 테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절에는 특히나 더 우리의 생각이 세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도록 해서는 안된다. 성경과 그 가르침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길은 바로 이 여호와로 시작하며, 그를 지극히 높이라는 것이다. 성탄절에 일어난 모든 일 하나 하나가 바로 여호와의 하신 일이다. 그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찬송받아야 할 분은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구주로서 역사하셨다. 그가 그 백성들을 잔악한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신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그 백성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강하신 능력으로 대적들을 물리치신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능하신 이'가 아니라면, 구주가 되실 수도 없다. 이 세상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요, 힘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바울을 말씀한다. 왜인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능력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마리아의 혼이 주를 지극히 높이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하겠다!
세상에 과연 소망이 있는가? 국제적인 교류에 소망을 걸 것인가? 미래가 소망일 것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세상은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 세상에는 없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한가! 우리는 전능하신 분을 알고 있다. '그가 그의 팔로 강력한 힘을 보이셨고 그가 사람들의 마음의 상상하는 온갖 교만을 흩으셨다. 그는 과연 전능자이시다.'
구원이라는 것이 대체 왜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가? 대체 무엇 때문에 갈보리 언덕 위에 십자가가 있었는가?
결국 그 대답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이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고도 말씀한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고도 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대체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하나님께선느 영원토록 죄와 대적하신다. 죄를 미워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 그것을 완전하게 지으셨다.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흠도 없었다. 그래서 그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
이 구원에 관계된 모든 것이 거룩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셨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는 아담의 본성 안에 있는 죄를 물려받지 않으셨다. 그는 순결하셨고, 그는 거룩하셨다. 그의 가르침 전체에서 그의 행하신 일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온통 이 거룩의 요소가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가 어린 아기로 나셨다. 그렇다. 그러나 그는 그저 보통 어린 아기가 아니셨다. 그는 죄에서 분리되신 분이셨고, 죄인들에게서 분리되신 분이셨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는 바로 거룩하신 분이셨던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기만 하다면, 우리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전능하신 분이요 거룩하시며 순결하신 분으로서 죄를 쳐다보실 수조차 없으신 분이시라는 말만이 진리라면, 우리로서는 지금 이 본문을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송을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은혜란 죄로 인하여 자격을 상실한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요 호의(好意)이다. 은혜란, 죄인들이기 때문에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자비와 선하심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의미이다.
그러면 긍휼이란 무엇인가? 긍휼이란,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긍휼의 차이점이다. 은혜는 좀더 개괄적인 반면에 긍휼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란 곧 하나님께서 인류를 내려다 보시되, 그 비참함과 그 고뇌와 그 고통을 돌아보신다는 뜻이다.
그 전능자께서, 그 거룩하신 분께서,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그분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다. 위대한 권능이요, 위대한 긍휼하심이 아닐 수 없다. 오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여! 그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그의 은혜의 그 측량할 길 없는 풍성함이여!

Ⅱ. 하나님의 지혜(눅 1:51-53)
온 세상의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는 일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나신 일을 생각하는 이 크리스마스 만큼 기독교 복음 속에서 마귀의 역사가 두드러지는 면이 나타나는 때가 없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훈계가 주가 될 수 없다. 그저 애매모호한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은 강력한 선언인 것이다. 따라서 성탄은 마치 국가 시책을 전하는 담화문이나 라디오 같은 데서 나오는 선언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전부이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행하겠다는 것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우리더러는 그저 뒤로 물러서서, 듣고 바라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과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하심에 대한 위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그의 능력을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사가랴가 후에 완벽하게 이야기하듯이, 그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셨도다'(눅 1:68).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그속으로 임하셨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은 바로 기독교 복음이다. 왜 그런가? 복음이야말로 여러분과 제가 상상하고 생각해온 모든 것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모든 것의 완전한 역전(逆轉)이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역사이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모든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요,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요, 경이(驚異)인 것이다.
진리는 여러분이나 여러분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진리는 계시(啓示)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보내기로 정하시고서 그 지혜를 어린아이와 목수, 말하자면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의 형태로 보내셨다. 헬라인들과 지혜자와 지성을 자랑하는 이들이 정말로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행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없는 그런 참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은 무지하고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상의 현실에 놀라지도 않는다. 놀라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람들이다.
복음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내가 죄 가운데서 나서 불의한 가운데서 자라났다. 나 자신이 죄를 범했다. 나의 본성이 부패했고 더럽다. 소망이 없는 처절한 절망 덩어리이다. 그런데 복음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나 자신을 그에게 맡기면, 그의 의가 내게 임하고 마치 내 생애 동안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것처럼 나의 모든 죄들이 씻겨진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신실하심(눅 1:54-55)
이것이 복음이 위대한 특징이다.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예수께서 오셨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또한 부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나'(막 2:17)라고 주님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6)라고 말씀한다.
긍휼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긍휼하심과 사랑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그들의 죄가 용서받고 두터운 구름이 사라지듯 사라질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광의 후사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할례 받은 자뿐 아니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도 그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신 그 모든 은혜로운 약속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 성취한 때는 제시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셨다! 그가 정하신 그 때에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의 방법이 있다. 그의 지혜 가운데서 온갖 일들을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갖 일들을 당하게 하셔서 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고, 결국 하나님의 마지막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면 다시 그를 하늘 구름에 태우시고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며 강림하게 하실 것이다.

                태양이 있는 곳마다 예수가 다스리시며
                그의 여정이 계속 이어지니,
                그의 나라가 이 해변에서 저 해변에까지 뻗치니,
                달이 녹아지고 시들어지기짜리 하리라.

                                                 아이작 왓츠
                                     (Isaac Watts: 1674-1748)

'아브라함과 및 그의 자손을 향한 그의 긍휼하심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마지막 증거요, 그의 약속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완전히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인 것이다.

Ⅳ. 그리스도인의 체험(눅 1:46-49)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환경과 사건들과 이런 저런 일들에 얽매어 살기가 얼마나 쉬운가? 이런 일들의 본질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과 의지는 있지만, 그럴 여유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가기가 일쑤인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현실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에 우리가 이 말씀, 이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 여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정말 엄숙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그의 말씀을 대면하게 될 것이고, 그 말씀에 대하여 대답을 하여야 할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을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7,48).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져 주셨다는 것이요, 또한 그것은 하나의 체험이다. 물론 경험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요소가 있고, 다른 많은 요소들이 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다룬 책들을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지고, 지적으로도 결실이 있는 굉장한 작업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도 그런 일을 평생토록 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적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거기서 멈출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표준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 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체험이 매우 갑자기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일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무슨 결단을 내린다는 것도, 내가 무슨 일을 행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행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루고 계시며, 여러분에게 관여하시며,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다는 각성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천하고 죄악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의 철저한, 완전한, 무가치함을 의식한다. 이런 일이 내게도 일어나야 한다! 엘리사벳도 똑같은 것을 느꼈다. 성령에 충만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42절). 바로 이것이다! 마리아도 이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임재하신다는 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우리의 불의와 우리의 무가치한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고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아래 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계시니 이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는 말씀이 과연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건강하고 소망이 있는 두려움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 2:12-13).
그리스도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저 하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인도할 자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 1:4)로 만들어 주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무언가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을 이해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라: '주여, 계속 하시옵소서. 제가 굴복하겠나이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나셨고 구유에 뉘어지셨다. 그리고 후에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담당하셨다.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며, 찬송을 돌리자: '놀랍고 이해하기 어려우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다.'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자.

이 책은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를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이 책을 통하여 더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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