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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죠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김재윤 | 2003.11.28 11:38
죠나단 에드워즈 지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지평서원

올해는 미국의 대신학자요 철학자이자 경건한 목회자였던 죠나단 에드워즈의 300주년이다. 이 책에는 에드워즈의 주옥같은 10편의 설교들이 담겨 있다. 이 중에서 두편의 설교들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Ⅰ. 의지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9-31).  
사도로부터 이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지혜가 크게 논란되는 지역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학식있는 헬라인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은 소위 자기들의 모든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노력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啓示)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 사도는 다음 본문에서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다.
1) 구속의 일에 수반된 여러 가지의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곧 사람이 자신을 결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이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주목할 수 있다. 곧 살마들이 자기들의 선을 위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오직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타락하고 난 뒤 다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바로 그 네 가지 항목에 들어있다. 달리 더 잘 나눌 수 없을 정도이다. 분명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네 가지 모두가 되신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GP가 되셨으니' 그 안에 있는 모든 합당한 선함과 총명의 참된 탁월함이 있다.
둘째로,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을 의지함에 달려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이런 은혜를 입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되셨으니.'
셋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안에 있는 분깃을 얻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통하는 믿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식의 본질과 방도는 구속받은 자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나 즉각적으로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게끔 하는 데 있다. 구속받은 자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의뢰한다.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좋은 것의 '원조'이시다. 우리는 구속주를 하나님에게서 받았다. 우리를 위해 구세주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실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직무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다. 그리고 그에게 하실 일을 맡기사 세상에 보내셨다. 구세주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구세주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실 이를 주시기도 하시고, 구속하신 이가 사신 것을 제공해 주시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우리가 그에게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가 그와 친밀하게 교제할 믿음을 받아 그 안에 분깃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 놓으신 모든 은택을 우리가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지옥불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리고 은총으로 받으사 구속받은 이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구속받은 이들이 자기들의 모든 탁월한 지혜와 거룩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도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은혜는 주어진 것의 탁월함에 비례하여 볼 때 대단한 것이다. 은사는 정말 무한하게 보배로운 것이다. 그 은사는 무한하게 가치있으신 분, 즉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무한하게 친밀하고 가까운 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 가지고 있는 은택에 비추어 볼 때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은택은 이중적으로 무한하다 할 수 있다. 우리가 무한한 자로부터 구원을, 바로 그분 안에서 받았다는 데서 그러하고,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는 데서 그러하며, 그리고 우리가 또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은사를 주신 은혜의 처사는 그것을 받은 우리들의 무가치함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은택을 받기는커녕 그 정반대로 나쁜 것만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감안하여 볼 때도 그 은혜는 위대하며,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가지는 그 통로가 되는 방편과 방식의 쉬움과 용이함을 생각해도 그 은혜는 역시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다. 우리게 그를 내어 주시되 육신, 또는 우리의 인성(人性)을 취하게 하사,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신 것이다. 죄는 없지만 죄있는 연약의 모습으로 임하게 하신 것이다. 그는 낮고 환란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주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은혜를 주셔야 하는 의무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에게 하신 것같이 타락한 인생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회개하기 훨씬 전에 은혜를 주신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매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그리스도의 여러 은택들이 이러저러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하심의 결과로 돌린다. 그런 면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신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이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사람은 이제 타락하기 이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타락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한다. 타락하기 이전에는 온전한 순종의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한다.
우리가 아예 나면서부터 죄악적이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거룩에서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산출되는 효력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먼저 비참하고, 후에 행복하이 위해 하나님께 더욱 분명하게 의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의 공력을 인정받을 만한 탁월함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피조물의 탁월성 안에 공로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펴본다 하여도 전혀 없다. 우리는 어떤 참다운 탁월함 없이 무한하게 괴이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체가 다 그렇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어떤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가, 후에 모든 선한 것으로 부요함을 입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모든 은혜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리고 마음에 그 은혜의 역사를 실행에 옮길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죄를 다스리고 자기의 마음의 부패한 성향을 제어하고 거룩한 원리를 증가시켜 선한 역사로 열매 맺게 하는 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 그리고 은혜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영혼이 온전히 본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기쁨을 전달받음으로써 아름답고 복된 존재들이 된다. 마치 달이나 항성들이 태양 빛으로 말미암아 밝게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영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출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신령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한다. 곧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고 하나님께 참여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에 아무리 크게 의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를 깨닫되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에 비하여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는 정도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여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영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를 하나님과 평준한 수준에 놓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다투는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인다면, 자기가 마땅하게 처할 위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것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덜 높이게 될 것이 틀림없다.

Ⅱ.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11).
이 시편의 몇 대목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이 시편이 기록될 때는 다윗에게 환난과 위험이 닥쳐 있었다. 특히 15절 이하의 말씀이 그 점을 드러낸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그의 곤고함은 자기 죄를 생각하게 하였고, 그 죄를 고백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 용서해 주십사고 울부짖게 했다. 이는 환난의 때에 마땅한 자세이다. 7절의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라고 한 기도의 내용과, 18절의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한 말씀을 보라.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용서해 주시기를 탄원하면서 어떤 논리를 제시하는지 주목해 보자.
1) 그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인하여' 용서를 탄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의로우니 용서해 주십사고 한다든지, 자기가 내세울 만한 어떤 행실이 있어 용서받기에 합당하니 용서해 주십사고 한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보상할 만한 일을 하였으니 용서해 주십사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2) 이 시편 기자는 '자기의 죄가 큰 것'을 들어 긍휼을 베풀어 주십사고 탄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가 이렇게 크다고 말하거나, 자기의 죄는 이렇게 작다고 구실을 늘어놓지 않았다. 내 불의를 보상할 만한 많은 선을 행했으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내 죄가 작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노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면, 우리 죄악의 크고 중대함이 용서받는 데 결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장애가 된다면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바와 같이 다윗이 용서의 구실로 그것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비참'을 알아며 하며, 우리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들의 비참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긍휼을 구하려고 하나님을 진실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비참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신적 긍휼의 진정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받을 자에게 비참한 것이 없다면 그 은혜를 베풀 필요가 없다.
자기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긍휼을 구하러 진실로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거지처럼 허리를 굽히고 나와야지, 보무도 당당한 채권자로 나와서는 안된다. 순전한 긍휼, 주권적인 은혜를 구하기 위해 나와야지, 자기가 마땅히 요구할 것을 얻기 위해 나오는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당하는 비참은 정당하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진노의 위협'도 정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긍휼을 구하러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긍휼의 모든 소망은 그리스도와, 그의 하신 일과, 그의 고난 받으신 일을 생각함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하늘 아래 인생 중에서 그리스도 외에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시오, 그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케 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받을 만큼 합당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가장 작은 죄를 용서하는 것과 똑같이 가장 큰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긍휼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은 작은 것에 대한 만큼 큰 것에 대해서도 훨씬 더 능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무한히 크신 분이기 때문에, 거지들보다 높은 만큼 왕들보다도 높으시다. 가장 비천한 벌레들보다 높고 이와 똑같이 가장 높은 천사들보다 높으시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조금도 장려하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한 증거들을 대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제 죄인들을 사랑하실 수 있고, 그러시면서도 죄에 대해 어떤 장려를 전혀 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무리 큰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긍휼을 구하러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그를 구원하시기를 '거절치'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이 바로 그 구원이기 때무이다. 그리스도의 임무는 죄인들을 구하는 구세주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바른 방식으로 나오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영광'은, 주로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기에 그 은혜가 충분하다는 데 있다. 구원의 방식의 전체 의도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영원 전부터 마음을 쓰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계획이 세워지는 것이다. 신적 은혜의 위대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장 큰 범죄자들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서 크게 드러난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께 바르게 나온다면, 바로 그런 죄인들에게도 용서가 '허락되고 약속되어' 있다. 복음의 초청의 말씀은 언제가 보편적인 어휘들로 되어 있다. "목마른 자마다 다 내게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 오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오라."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인들 만큼 많은 죄책을 짊어지고 있거나, 지옥에 있는 모든 저주받은 영혼들 만큼 많은 죄책을 짊어지고 신음하고 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비열함을 깨닫고 긍휼을 구하러 하나님께 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받기를 구한다면,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의 중대한 죄악들이 용서받는 데 결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그리스도께 나온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 내세울 만한 의가 전혀 없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영접받을 만큼 그리스도께 나가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영접받는 일은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자신을 더 선하게 만들거나 더 가치있게 하겠다는 식의 용기를 가질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합당성과 하나님의 긍휼을 용기있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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