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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존 라일의 요한복음서 강해

김재윤 | 2004.11.10 11:30
존 라일 지음, 요한복음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Ⅰ. 요 11:38-46 나사로의 무덤을 향한 그리스도의 말씀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은 일찍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최대의 기적 가운데 하나를 기록하며 그의 신성의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의 목소리로 죽은지 나흘된 사람을 무덤에서 불러낼 수 있었던 사람은 참으로 바로 하나님이셨음에 틀림없다! 기적 자체가 너무나 단순한 언어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인간적 논평도 그것의 생명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이 기회에 하신 주님의 말씀은 특별히 흥미가 있으며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1. 우리는 나사로의 무덤에 막아놓은 돌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을 주의해야 한다. 거기에 읽어보면 그는 매장지에 오셨을 때 자기를 둘러선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것을 말씀하셨는가? 그에게는 돌을 건드리지 않고도 굴러가라고 명하시는 것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것만큼 쉬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진행방법이 아니었다. 여기서도 다른 경우에서처럼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하시는 편을 택하셨다. 여기서도 다른 데서처럼 그는 그의 전능한 권능이 인간의 책임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큰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실 준비와 용의가 있었을 때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할 일 없이 방관하고 있게 하려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기억 속에 소중히 기억하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선을 행함에 있어서, 천국을 위하여 우리의 자녀를 단련시킴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매일의 생활에서 거룩을 추구함에 있어서, 이 모든 일에서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돌을 옮겨놓으라”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내리시는 매일의 명령이다. 우리는 겸손의 구실로 게으름 속에 가만히 서 있지 않도록 주의하자. 우리는 매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자. 그러면 이 노력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만나 주실 것이며 그의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2. 우리는 마르다가 무덤에서 돌을 옮겨놓는 것에 반대했을 때 우리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이 거룩한 부녀의 믿음은 그녀의 사랑하는 오라비가 누워 있던 돌이 막 열리려는 찰라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믿지 못했다. “주여, 지금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그녀는 울부짖는다. 그때에 우리 주님의 엄숙한 책망이 있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문장은 의미가 풍부하다. 이것은 오라비가 처음 병들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전달되었던 소식에 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르다에게 그녀의 선생님이 보내셨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려 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모든 성역을 통해 그녀에게 가르쳐주셨던 항상 믿어야 된다는 의무의 옛 교훈을 상기시키기를 원하셨다는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내가 항상 너에게 가르쳤던 믿음의 큰 교리를 잊고 있다. 믿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오직 믿으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교훈은 아무리 잘 알아도 결코 지니치다고 할 수 없는 교훈이다. 우리의 믿음은 시련의 때에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가! 건강과 번영의 날에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는 얼마나 쉬우며, 해도 달도 별도 나타나지 않는 암흑의 날에 이것을 실천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이곳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간직하자. 우리는 많은 내적인 믿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고난받는 차례가 올 때 인내심을 가지고 고난당하며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믿도록 하자. “나는 보아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나는 믿겠다”라고 말하기를 그치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나는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3. 돌이 무덤에서 옮겨졌을 때 우리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말씀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거기에 읽어보면 그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놀라운 언어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기적을 행하실 때 말했던 것과는 전혀 같지 않다. 사실상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찬양이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과 그의 하늘 아버지 사이에 계속되는 변함없는 신비스러운 친교를 의미하여 이것은 인간이 설명하거나 또는 이해할 능력을 초월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요한복음서의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그가 가르치신 모든 것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온전하고 완전한 일치를 가르쳐줄 의도였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한번 더 그는 그들 중에 단지 선지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또 아버지와 하나이신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하셨다. 한번 더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말씀들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씀하라고 주신 바로 그 말씀들인 것처럼, 그가 행하신 일들도 아버지께서 그에게 행하라고 주신 바로 그 일들이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게하려 하셨다. 요컨대 그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약속의 메시야이셨다.
이 진리는 깊고도 높은 만큼 이것은 이것을 완전히 믿고 이것을 단단히 붙잡아 우리의 영혼이 평화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구주는 아버지께서 항상 들으시는 분이시며 공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이신 분이며 영원하신 하나님과 조금도 못지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신앙의 확정된 원리로 삼자. 우리 중보자의 품격의 존엄섬에 관한 명확한 견해는 내적인 위로의 한 가지 비결이 된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4. 우리 주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셨을 때 그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그 소리가 발하자 공포의 왕은 즉시 그의 합법적인 포로를 내어놓았으며 만족을 모르는 무덤도 그의 희생물을 포기하고 말았다. 즉시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라고 하였다.
이 기적의 위대성은 가히 과장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행하여진 기적의 광대성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기 공개적인 날에, 그리고 많은 적개심을 가진 증인들 앞에서 죽은지 나흘된 한 사람이 순식간에 생명을 회복하였다. 여기에 우리 주님이 물질 세계 위에 절대권력을 가지셨다는 공적인 증명이 있는 것이다! 이미 부패했던 시체가 살아났다!-여기에 우리 주님이 영적 세계 위에 절대권력을 가지셨다는 공적 증명이 있었다! 자기의 지상의 거처를 떠났던 한 영혼이 낙원으로부터 소환을 받았으며 다시 한번 그 소유주의 몸에 결합되었다-그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었던 그는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셨다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위로와 위안의 생각을 가지고 전체 본문을 읽자. 우리의 영혼의 그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분이신 사랑하시는 죄인들의 구주는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분이라는 생각은 위로를 준다-너무 지나치게 죄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살리시고 회심시킬 수 없는 죄인이란 아주 없다는 생각이 위로를 준다. 나사로의 무덤 곁에 서 있던 분은 가장 타락한 인간에게도 “나오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우리 자신이 무덤에 누울 때 우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충분한 확신 속에서 누울 수 있다는 생각이 적지 아니한 위로가 된다. 나사로를 불러내신 음성은 어느 날 우리 무덤을 뚫고 들어와 영혼과 몸이 합치라고 명하실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하하리라”(고전 15:52)라고 하였다.


Ⅱ. 요 13:1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그 이하에 나오는 모든 일에서 즉 발 씻기신 일과, 고별인사와,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와 십자가에 달리실 일들 중에서 이 사랑의 동기가 동작하고 있다.

1.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자기 백성들을 향한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쓰여 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그들이 얼마 안가서 괘씸하게도 자신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나타내보일 생각으로 주님을 저버리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싫증내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복음의 본질이며 정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는 것,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그 분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어 우리의 본성을 입으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인간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이다. 인간의 편협한 마음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까지도 “알고 싶어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설교자들과 선생들이 끊임없이 선언하고 또한 선언하는 일에 결코 싫증을 내어서는 안될 진리이다.
그러나,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비교적 생각을 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모든 허물을 참으시고, 즉 주님께서 계속되는 그들의 모순된 행동과 비열한 도전에 싫증내지 않으시고 그러한 일들을 계속 용서하여 주시고 잊어버리시며, 화가 나시어 그들을 추방하고 포기하지 않으신 것, 이 모든 것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연약한 자기 자식이 어릴 적에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인내심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을 참아주시는 그리스도의 인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무한하다. 그리스도의 동정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 샘이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자신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죄인들의 괴수라도 그리스도께 담대하게 나아와서 자신있게 용서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주께서는 “죄인을 영접하기를”(눅 15:2)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일단 그리스도께 와서 믿게 된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과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쫒아내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전적으로 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가운데 자기 직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자신의 종을 거절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하신 자들을 항상 지키신다. 또한 처음에 사랑하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며 성도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도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즉,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1】 유월절 전에: 우리는 각 복음서 기자들이 항상 유월절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때라고 언급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 특정한 시기로 정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유월절의 양은 전 유대교의 의식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두드러진 상징이었으며 유월절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한다. 둘째는, 그것은 이스라엘의 큰 무리에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의 절기 중 이레에 가장 많은 무리가 예루살렘에 모인다. 유월절에 일어난 일은 무엇이든지 유대교 경배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전 세계에 전해지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어린 양”은 제사장들이 “축제 중에 행해져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 때에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 중에 정확히 알고 있는 날짜 중의 하나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태어나시고 또 넝제 세례를 받으셨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절 주간에 죽으셨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수난을 당하시며 또한 어떻게 당하실지를 미리 완전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아무튼 이 일은 고난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앞에 닥칠 일을 모른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앞에 놓여질 십자가를 분명하게 보시고 곧장 그리로 걸어가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주님 자신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며,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미리 알고 계신 일이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우리는 여기에서 죽음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죽음은 여행을 떠나는 것, 즉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님의 경우에 그것은 자기가 하고자 하셨던 일을 끝마치시고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으며, 또한 본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의 죽음도 본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칼빈은 “죽음의 이같은 정의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된다. 또한 죽음은 성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게서 자기 제자들을 항상 사랑하시고 그의 진귀한 애정의 증거를 많이 보여주시고, 또한 그들을 고아처럼 세상에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시기 전에 주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입증해 보이셨으며 죽으시기 전날 밤에 자신의 공생애의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시며 또한 그들을 싫증내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저버릴 것이며 겁쟁이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함께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한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24시간 내에 자신이 고난받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아셨다 해서 자신을 따르는 작은 무리의 양떼를 잊지는 않으셨다. 성도들은 그들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흔히 홀로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에 즈음하여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셨고, 또한 자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깊다. 즉,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랑이다.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자기 사람들”이란 표현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말이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소유물이며 그의 몸의 지체로서 주님께서 특별히 돌보시는 자들이다. “자기 사람들”이란 이 말은 믿는 자들의 특권을 알지 못한 채 생활하는 모순되고 연약한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에 있는”이라는 이 말도 역시 깊은 의미가 있다. 믿는 자들은 아직 천국에 있지는 않지만 자기들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천국을 찾아낸다. 그들은 냉냉하고 불친절하고 박해가 심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알고 계시며 잊지 않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게 하자. 예수님게서는 “내가 너희 행사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안다”(계 2:13)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자기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겸손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그들 속에 깊이 남겨주고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일을 주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저녁으로 미루셨다.
주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동정하신 가장 큰 세 가지 목적은 1. 한동안이라도 사악한 자들을 관대히 보아주고, 2. 가능한 한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삼가며, 3. 영원히 그들을 떠나기 전에 분명하고 온화하게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이 13장의 우리 주님께서 유다를 다루시는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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