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로그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 로그인하시면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회원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독자요약본

경외함의 진수

김재윤 | 2004.10.08 15:23
존 번연 지음, 경외함의 진수, 지평서원

존 번연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했기에 사람이 만든 법과 제도를, 그리고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경외함의 진수(The Fear of God)는 저자 존 번연의 대표적 신학서로 꼽힌다. ‘천로역정’의 유명세에 가리어 그의 많은 논저들이 일반에게 익숙하게 다가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은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 독자들로부터 의외의 큰 반향을 얻어 금방 품절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한동안 구하기가 힘들었다. 책을 찾지 못하여 훗날 그의 전집을 편집할 때 빠지는 웃지 못할 일도 있게 되었다. 그 뒤 번연을 열렬하게 사모한 조셉 벤쳐 목사의 집요한 노력으로 원본을 발견하게 되어 독자들에게 다시 안겨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엄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공포의 두려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너무나 확연하게 구분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죄가 엄정한 형벌을 가져온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들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는 의식에서 비롯됨을 그는 주장한다.
그러한 의식은 죄의 형벌만을 두려워하는 불경건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죄 자체를 미워하는 ‘양자의 영에 의한 아들로서의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거룩한 두려움을 지속적으로 가짐을 뜻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거룩되이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땅의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지금쯤 필히 읽혀져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장 숭고한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무를 가장 숭고한 의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것이야말로 본질상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모든 경건한 의무에 맛을 돋우는 소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통상(通常)적인 임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도 두려운 것이다. 심지어는 가장 편안하고 가장 즐거운 임재까지도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에게 자비와 구원의 소식을 가져오실 때, 바로 그런 방문조차, 바로 그런 임재조차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실 때에, 하나님의 임재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진정한 실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들은 다른 시간에 다른 모든 빛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인격과 그 이름에 있어서 매우 위대하시고 엄위로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반드시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며 여호와의 두려움이라고 불려질만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른 아닌 내세(來世)에 있어서의 죄인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경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는 죽이고, 그 다음에 살리는 것이다. 먼저는 때려서 상처를 입히고, 그 다음에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계명이 바울에게 이르렀을 때, 죄는 살아났고 바울은 죽었다. 그것도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바울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롬 7:9,10).
오직 성령님께서 죄인을 다루시는 자신의 사역에 변화를 주시고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감미로움과 평안한 소식으로 그 죄인의 가련하고 낙담하고 고통받는 양심에 임하실 때 비로소 죄인은 풀려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사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믿게 만들고 싶으면, 그는 사람들이 아직 노예일 때, 즉 자신과 그들의 정욕의 노예일 때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믿도록 만든다.
만일 사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노예라고 믿게 만들고 싶으면,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양자의 영을 이미 받았고 양자의 영에 의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증거를 다 받았을 때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노예라고 믿도록 만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양자로 입양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 성경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 관계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근원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사람은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 말씀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식의 근본이지만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과 영생과 사후 세계를 위하여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두려움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자들을 덮쳐 그들을 영원토록 삼켜 버린 영적이고 영원한 저 파멸을 피하는 법을 배우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두려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두려움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그가 다른 방면에서 제아무리 현명하고, 다른 분야에서 제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그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호와를 경외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가장 탁월한 것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내팽개쳐 놓는다. 그리고는 죽음이 임할 때 자신을 옭아맬 것들만 전심으로 추구한다.
죄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죄에 대한 적대감을 영혼 속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이 말은 죄의 존재 자체가 우리 영혼 안에서 소멸된다는 뜻이 아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죄의 정욕이 죽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솔로몬이 다른 문제를 다루면서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잠 26:20)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혜의 훈계이다. 그것은 사람이 본성의 모든 능력과 본성의 모든 지혜를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만일 우리가 훈례를 더 잘 받기만 하면, 심지어 자연에 속한 허다한 것 안에서도 영적인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한결같이 그 속에 어느 정도의 영적인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하나님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을 숙고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수단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도 똑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는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또한 방자하여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역시 죽임을 당하도록 명하셨다. 이는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심에서 경계심이 나온다. 성경은 솔로몬의 하인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이 경외심 때문에 밤중에 솔로몬의 침대 주변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고 한다(아 3:7).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그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주의 깊게 경계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건한 경외심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마음을 경계하도록 만들며 모든 부지런함을 다하여 자신들의 마음을 지키는 데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의 이런저런 속임수로 인해서 본질적으로 사악한 일을 행하게 될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경외심은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만든다. 이는 지옥에서 오는 어떤 시험이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갈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경외심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을 항상 주의하고, 또한 입을 언제나 파수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때때로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고삐를 채우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이는 자신들의 혀로 범죄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혀가 불의(不義)의 지체이기 때문에 아주 쉽게 지옥 불에 타오르고, 아주 쉽게 온몸을 더럽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면 모든 활동에서 경건한 대화와 교제를 갈망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그렇게 한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교회를 훈련하는 것은 경건한 경외심의 당연한 결과이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말이다.
선하건 악하건 모든 두려움은 그 마음으로 하여금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숙고하도록 만드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싶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지옥이든 마귀이든 기타 다른 것이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생각하지 않도록 해보라.(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얼마 후에 두려움이 그 사람 안에서 조금이라도 활동하게 되면 그의 생각은 다시 그 두려움의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다.
경건한 두려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경건한 태도로 말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태도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생각하도록 그 사람을 훈련시킨다. 그런 묵상을 통하여 그의 영혼이 거룩해지고 부드러워지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례에 정통하다는 것과, 그 규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과 위엄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 규례에 정통하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사람들이 전자(前者)를 행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경건한 두려움이 없으면서 후자(後者)에 나온 것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라고 말한다(시 5:7).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저런 사심(私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자 하는 욕구나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그 행동을 명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해서 행동할 때, 바로 이것을 성실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그리고 자주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죄인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구원의 방법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그리고 경건한 경외심은 이 단어와 매우 특별한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그 죄인은 경건한 경외심과 아울러 이 방법에 자기 영혼을 의탁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감싼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서 곤두박질쳐 떨어지는 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을 살피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아주 진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눈이 이런 사람들을 살피는 이유는 그들이 장차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고 명령하시기 위해서이다.
마귀와 죄와 사망은 호시탐탐 하나님 경외하는 사람들을 삼켜 버릴 기회만 엿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늘 긴급 대기 상태에 있다. 만일 사탄이 유혹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즉각 대처하는 것이다.
만일 죄가 돌발적으로 그들을 속인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즉시 출동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사망이 돌연히 그들을 사로잡아 버리면 그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즉각 그들에게 베풀어진다.
힘이 약한 사람들은 힘으로 자신들을 짓이길 수 있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자라지 않는 마음에서는 그 어떤 은혜도 무성해지지 않는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그 어떤 은혜도 무성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저 일반적인 권고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0개(3/5페이지)
독자요약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0 존 라일의 요한복음서 강해 김재윤 2004.11.10 11:30
49 존 라일의 마가복음서 강해 김재윤 2004.11.10 11:30
48 신학의 체계 김재윤 2004.10.30 16:32
47 마태복음 강해 김재윤 2004.10.08 15:23
>> 경외함의 진수 김재윤 2004.10.08 15:23
45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행한 참된 성도의 사랑 김재윤 2004.10.08 15:22
44 철학의 위안을 읽고 강석천 2004.10.08 13:27
43 복음의 진수로 나아가라 1~3장 요약 채대광 2004.10.04 02:04
42 성도의 견인 (존 오웬) 채대광 2004.10.04 01:51
41 아이들의 회심 이야기 김재윤 2004.09.02 21:18
40 기독교 중심 김재윤 2004.08.23 18:42
39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김재윤 2004.08.11 20:11
38 사도신경 강해 1 김재윤 2004.08.02 22:20
37 칭의 교리의 진수 김재윤 2004.07.11 20:16
36 창세기3장 주해(나됨) 107p 사람창조 과정중 "생기"에 대한 부분을 이홍기 2004.07.07 22:29
35 놀라운 회심 이야기 김재윤 2004.07.05 20:16
34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헨리 블랙커비/NCD) 조영민 2004.07.02 10:53
33 창세기3장 주해 (나됨. 448p) 이홍기 2004.06.30 13:54
32 복음 잔치 오라, 강청하시는 그리스도 김재윤 2004.06.10 19:26
31 책 읽는 방법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채대광 2004.06.09 11:4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