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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칭의 교리의 진수

김재윤 | 2004.07.11 20:16
제임스 뷰캐넌 지음, 칭의 교리의 진수, 지평서원

탁월한 전기 작가 이안 머레이 목사는 이 책에 대하여 이렇게 추천하고 있다. “뷰캐넌 박사의 본서는 칭의 교리에 관한 한 최상 최고의 작품이며 완벽한 저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서는 우리의 가슴을 적셔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책은 제1부와 제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주로 칭의 교리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제2부는 칭의 교리의 성경적 주해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칭의 교리를 연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칭의 교리를 사랑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성장에 지대한 유익을 끼칠 수 있는 명저이다.

Ⅰ. 칭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과의 관계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이 하나님의 율법과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칭의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전 성경에 계시된 명백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에 의해 우주적으로 공인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불의한 자’를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하심에 있어서 나타난 그의 도덕적 완전함의 뛰어난 현현을 통해 인간의 타락을 기각하고 사면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영원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1:9; 3:11). 이 목적과, 그리고 이 목적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구원의 전체 계획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심’에 목적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자비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비였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결과를 양산하는 자비였다. 이것은 창세 전에 삼위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천상 회의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미리 예견되었던 타락 그 자체는 이 위대한 계획과 설계의 성취를 위해 정복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삼위 하나님의 각 위, 즉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신 것이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확실한 결과를 양산하시기 위해 각각의 독특하신 직무를 대표하셨고, 동일한 사역의 각기 다른 부분들을 수행하셨다.
우리는 성경 여러 부분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분리될 수 없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버지는 위엄을 대표하시고 죄의 사면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아들에게 중보자의 직임을 수여하셨고, 그의 사역을 위임하셨으며, 그리스도를 그의 아들로, 그리고 동시에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는 종으로 보내셨고, 구속받고 구원받아야 할 백성들을 그에게 주셨으며, 그가 이 목적을 위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조건들을 규정하셨고, 그가 그의 영이 고난을 받을 것을 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만족을 얻으실 것을 약속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자 하나님은 중보자의 사역을 수여받으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의지에 공식적으로 복종하시기를 동의하셨고, 자원적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이 있기 전 성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소유하셨던 그의 영광’을 숨기시기를 기뻐하셨다.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고난당하시며, 순종하시고, 죽으시기 위한 사역에 착수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고무시키고 자극하거나 구속 언약을 획득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사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 구원의 전 계획을 일으키게 하고, 또한 그 구원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까지 공급하신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의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중보자의 직무에 임명하셨고, 그 백성들은 ‘세상의 기초가 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것’이었다(엡 1:4). 그들은 구속받고, 새로워지며, 거룩해지고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명이나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선택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반드시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이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본질적 성격과 순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적뿐만 아니라 그 수단들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과 그의 전지하신 지혜 안에서 일어났던 무조건적이며 자발적인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모든 완전하심을 계시하시고, 의로우신 통치의 설립과 변호를 위하여 타락 그 자체를 압도하심으로써 반드시 결과와 효과를 제공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인간들은 언제나 항상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불완전하며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취하는 경향을 가진 존재들이며,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 내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사법적 불만 혹은 진노의 율법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는 참된 사랑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또한 사랑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심각한 진노나 정의에 대한 엄격한 집착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죄인들의 구원에 나타난 자비와 정의의 놀라운 협력은 복음 안에서만 계시된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처음 지위를 지켰던’ 천사들과 같은 의인들의 칭의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순종했던 계명의 조건에 따라 이미 영원한 거룩으로 확증받았고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처음 지위를 떠나 타락했던 악한 영들의 정죄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응적인 엄밀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이미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의 신기하고 놀라운 현현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모든 직무를 수행하고, 모든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합당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한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만족이라는 용어는 종종 마치 죄로 말미암아 위반되어지고 멸시되어진 율법의 형벌에만 독점적으로 관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만족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특별한 언급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견디신 고난과 고통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가실 때 보여 주셨던 순종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경건한 자의 칭의와 악인의 형벌에서보다 우리의 칭의에서 더욱 완전히 나타나고 표현될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가? 죄인 중의 죄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시행되는 자비를 위한 길을 열어 주는 하나님의 계명의 위엄과 장엄함이 손상되지 않고 존경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모든 의로우신 통치의 지고하신 목적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보장되는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Ⅱ. 칭의; 즉각적이고 유일한 기초로서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죄인의 칭의의 근거가 되는 의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용어들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면서 칭의의 본질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종합한 완전한 의미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일치하는 의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미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셨으며, 혹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을 때 앞서 언급한 그런 희미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의가 왜 ‘하나님의 의’로 불리는지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의의 이중적 명시가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만족을 요구하시며 죄로 인한 형벌을 부과하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의의 명시이다. 이에 대해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으셨는데, 이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의의 역사이다. 그것은 그의 백성의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를 말한다. 곧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죽음’을 뜻하며,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선언되어진 하나님의 의와 십자가에서 나타나고 표현된 그리스도의 의는 서로 구별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화목 제물 안에서 하나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칭의를 위해 계시된 이 의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불리면서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희생 제사의 공로와 완전한 순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우리의 대속자와 대표자로서의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라 불리는 이 동일한 의는 또한 ‘그리스도의 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 의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또는 하나님과 구조 에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보배로운 믿음’을 얻게 된다(벧후 1:1).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그가 우리의 의로 불리는 것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루어진 의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과 명백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사 42:21). 그리스도는 자신의 대속적인 고난들과 순종을 통해 명령과 형벌로서의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이제 ‘그리스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롬 10:3,4).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의로 간주되었던 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
동일한 방식으로, 이 의는 ‘한 사람의 의’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불리어졌다(롬 5:18,19).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즉각적으로 연결시키는 한편,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개인적 순종들을 배제한다. 이는 우리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이며 자비롭게 수여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는 믿음 그 자체와 구별되며,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 않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를 통해 얻으려는 다른 종류의 의와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믿음의 의’이며,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 불리는 것이다(롬 3:30). 그러므로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것임을 나타내면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하나님의 의’라고 불리는 것이다(롬 9:32; 3:21).
실제로, 칭의는 한편으로는 죄인에게 개인적으로 속해 있던 죄의 ‘무전가’에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이 이전에 전혀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의의 ‘전가’에 있다. 칭의의 완전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양자가 모두 필요한 한편, 하나의 의미가 확실해지면 나머지 다른 하나의 의미도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수행되어지고 종결된 사역의 공로로서의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의 칭의를 위해 전가될 수는 있으나 주입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의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일한 유효성이 다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만 제공한 것이지 실제로 누구의 구원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또는 그것이 쉬운 조건들로 말미암은 구원과 신실하지만 인간의 불완전한 순종에 기초한 하나님의 용인을 제공하는 소위 ‘은혜의 새 계명’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 사역의 공로는 그 범위 내에서 반드시 우리에게 전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공로가 만일 그러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성취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이 율법을 완화시켜 주지 않고 오히려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것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수행되고, 또 성취된 것이라는 사실이 성경에서 명백하게 증명된다면, 그리고 그들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효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대적하는 어떤 반대로 전가의 사상에 기초될 수는 없다.
하나는 전가되고 도 다른 하나는 전가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그분의 거룩한 순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신 그 인개’와 관계되었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높이고 성취하신 표현’이었던 그리스도의 순종의 다른 모든 행위들이 전가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땅에 선고된 저주와 우주적 죽음의 심판, 하나님 형상의 상실, 하나님의 은총의 몰수,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 그리고 죄의 결과로 말미암았던 모든 종류의 악들과 고난들이 바로 이 율법의 시행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었고, 이 모든 고난과 악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만큼 무시무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제까지 증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에게 그 조건들의 성취를 부과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그의 사역의 유익을 확보하게 하신 둘째 아담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구속의 계획을 선포하셨고, 역시 이것도 언약의 형태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법의 제정 역시 아마도, 아니 반드시 결과를 낳고야 말 것이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참여함으로 결과를 생산해 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독특한 모든 계시들이 마치 실제적인 중요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변적인 관심의 문제인 것처럼, 성경의 모든 독특한 계시들을 대적하는 유사한 편견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이 각각의 독특한 하나님의 게시들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사실의 진술이며, 이것들이 모두가 다 실재하는 존재이신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 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실제 사건들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

Ⅲ. 칭의; 믿음과의 관계 속에서의 칭의의 본질과 이유
도무지 유지되기 힘든 행위들로 말미암은 칭의가 폐기되고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가 인정될 때, 주입되고 타고난 믿음이,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요구되어 왔다. 이 사실은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새 계명으로서의 복음적 의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핑계와 구실 역할을 한다. 이는 옛 언약 아래 존재하는 우리의 칭의와 동일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안식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 용인의 즉각적인 근거가 되는 의로 간주되는 것이다.
믿음과 의를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로마 가톨릭 저술가들은 은혜, 믿음, 의, 그리고 칭의를 말함에 있어서, 마치 이 네 가지들이 모두 다 하나이고 동일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들은 은혜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자비나 은총이 아니라 주입된 주관적 습관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은혜와 믿음을 혼동했다. 그들은 또한 믿음을 우리가 하나님의 용인을 받게 만드는 선천적인 특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믿음과 의를 혼동하고 말았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영적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만일 믿음 그 자체가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 의가 아니며, 우리의 개인적 의가 아닌 전가되는 다른 종류의 의를 수여받는 통로라고 주장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의 주장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들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안에 얼마나 많은 혹은 얼마나 적은 칭의의 요소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나, 또는 성령의 다른 은혜들로 말미암아 동반되고 제시되는 다양한 믿음에 대한 표현과 질문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 믿음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주어진 믿음에 대한 다양한 묘사와 표본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께서 그것을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때때로 진리를 인정하는 신념이나 사람에 대한 신앙으로 묘사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에서 부상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본 것처럼 ‘예수를 바라보라’, ‘우리 앞에 제시된 소망의 안전한 피난처로 피하라’,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그리스도께 나아오라’와 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라든지, 우리의 확실한 기초로서 ‘그 안에 안식하라’. ‘심판의 날까지 우리를 능히 지키실’ 분에게 우리의 영혼을 ‘위탁’하라는 표현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칭의와 관련하여 실제적인 영향력이나 유효성은 믿음에 속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무조건적인 선물을 수용하고 사용하게 만드는 신적 임명 수단에 속해 있을 때에 한한다.
우리의 칭의와 관계되어 있는 믿음에 속해 있는 영향력과 유효성에 관해서, 그것이 수단으로서 묘사되는지, 도구로서 묘사되는지, 아니면 조건으로 묘사된 것인지는, 이것이 단순히 이 용어들의 용법에 관계하고 있는 한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수단이나 도구나 상태는 모두 다 각각 건전한 의미로서 적용되고 사용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자선이나 선행과 결합됨으로서 죄의 사면과 하나님의 용인을 확보할 수 있는 공로적 수단으로 제시된다면, 또는 이러한 특권들을 즐길 수 있는 성취로 말미암은 법적 조건으로 제시된다면 이는 대단히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믿음이 가난한 거지가 손을 내밀어 구제를 받는 단순한 도구적 수단과도 같이,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고 그의 구원의 유익들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구원의 유익들은 그리스도께서 즉각적으로 획득하신 열매이며, 그의 은혜의 무조건적 선물이다.
믿음의 유일한 이유나 보증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구원을 위해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뢰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혀 지체 없도록 만드는 의무가 되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이시다.
믿음의 보증에 관한 질문이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안식하게 만드는 이유에 관한 질문은 계시된 진리라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답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신념의 근거가 수립되어진 신적 권위의 증거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 질문이며,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보다 더 중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오히려 특별히 복음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나 의무, 즉 그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 안에 안식하게 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사람이 이렇게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즉 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계시적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느냐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남아 있는 죄와 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증으로서의 “믿으며 살리라”라는 말씀에 대해 불신과 차이점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선택 교리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에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는 믿음의 보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에 의한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지만, 어떤 개인이 그 선택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은 모든 죄인들에게 예외 없이 제공된 것이다. 복음의 약속은 철저하게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뢰하게 해 주는 보증을 위한 조건을 아니다. 그 보증은 모든 죄인들 개인들을 향한 복음의 무조건적인 선포, 은혜로운 초청들, 그리고 복음의 명백한 명령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한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왜냐하면 구원을 위해 복음 안에 무조건적으로 밝히 계시된 다른 은혜가 아닌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믿고 오직 그 분만 신뢰하는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할 때 우리의 칭의와 관련해서 믿음에 속해 있는 독점적인 도구성과 독특한 특권은, 첫째로, 하나님의 용인의 유일한 근거가 그리스도의 종결된 사역 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라는 것에 의해 충분하게 설명되고 입증된다. 이는, 둘째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우리가 이 근거를 의지하거나 이 근거에 안식하게 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에 대한 진심 어린 신앙고,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뢰로서의 믿음이라는 사시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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