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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성령 하나님

김재윤 | 2005.02.24 11:43
마틴 로이드죤스 지음, 성령 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Ⅰ.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됨

여러분에게 드렸던 15번째 강의는 제게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또한 매혹적인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칭의의 성경적 교리인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위대하고 중요한 교리를 생각할 것인데 이것은 저를 매우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생명의 질을 알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즉 “칭의”라는 단어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것이 특히 현 시점에서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적용해야만 될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보다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던 단어를 꼽는다면, 그 단어는 바로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의 재발견은 루터의 생애를 강력하게 변혁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그 이후 개신교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이것은 항상 영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단어에 지금까지처럼 반응해서는 안 될 약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개신교에서도 무엇인가 잘못되어지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반카톨릭주의를 뜻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반카톨릭주의란 아주 다른 것입니다-저는 적극적인 개신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라는 단어에는 떨림이 있어야 하는데, 특히 그 역사를 분석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큰 질문은 이것입니다: 개신교 종교개혁이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루터는 무엇을 재발견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과 같이 필수적인 무엇이 있으며 또한 우리들이 분명하게 해야만 될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다른 좋은 방법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험지와 함께 우리 자신을 책상에 앉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의 교리에 관하여 설명하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개신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당신이 로마 카톨릭과 차이가 있음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이 교리를 살펴봅시다. 아마 살펴보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은 역사적인 접근일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의 개심 이전에 왜 그렇게 고통에 빠졌을가요? 그에게 이 진리가 갑자기 오기 이전에 어떤 잘못이 그에게 있었을까요?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전체 질문에 대하여 불명확하고 부정의적이고 불확신했던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을까요? 루터가 ‘칭의’란 용어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칭의’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잘못되었던 것은 칭의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전형적으로 로마교회의 칭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그 교리를 선포했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가르친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이란 견해를 개신교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면 첫째로, 로마교회의 잘못을 살펴봅시다. 그들의 본질적인 면은 이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성화와 함께하는 칭의를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심 이전의 루터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를 가장 먼저 죄악들을 용서함을 의미하며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들도 옳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안에 본래적으로 내재된 죄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선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칭의 안에 우리 안으로 적극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는 과정이 있으며 이것은 물론 세례에 의해서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례의 행위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은혜가 주입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칭의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제거함, 즉 사죄 역시 세례의 행위시 적극적인 의를 주입하는 것이며, 단순히 적극적인 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의 주입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교회에 의하면 칭의는 점진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전적으로 일치합니다. 만약에 은혜의 주입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자라고 발전하기에 칭의는 점진적이어야만 합니다. 더욱더 전형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 죄’를 우리가 범한다면 그 주입된 은혜는 상실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은혜를 상실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리고 연옥에서 완성되는 재획득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그 은혜를 획득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 같은 것들이 바로 로마교회가 가진 견해의 특징이었는데, 그 견해를 바로 루터가 그의 개심 이전에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루터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가 성경의 진술을 갑자기 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전에도 루터는 그것을 수없이 읽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을 진실하게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가 보았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그리고 이런 말씀들은 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그 후 그의 전생애는 혁명적이었으며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칭의에 있어서의 과거의 모든 견해들이 전혀 비성경적이며 전적으로 거짓된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영혼의 커다란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설교하기 시작했고 종교개혁의 위대하고 능력있는 사역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정확하게 무엇을 보았습니까? 칭의란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며 공언하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며 돌리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가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순간에 하나님과 함께 그는 스스로 의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문제는 바로 욥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루터의 마음과 생각을 억압했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구역 속에 있는 한 수사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금식했고 기도했으며 고행했으며 선행했습니다만, 그 모든 시간 동안 루터는 말할 수 없는 의와 거룩에 대하여서 있는 자신의 마음이 전적으로 검고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방법을 따라 자신을 맞추려고 애쓰며 또한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그때에 그 말씀을 갑자기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루터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의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루터의 것으로 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욱더 즐거워해야만 될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루터가 빠졌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그런 큰 실수는 칭이란 루터가 의롭게 하며 선하게 혹은 바르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칭의에서는 우리가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여러분이 의롭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화와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 혹은 법정에 관한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 책임자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신데,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를 만족하시어 그 법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칭의는 선언적인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에 대하여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저의 실제적인 내면적 상태나 조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저의 선 자리, 저의 위치, 저의 모습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칭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이것을 설교하는 데 그는 남은 일생을 다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개신교의 위대한 중심 교리이며, 모든 위대한 부흥에서 여러분은 이것이 항상 가장 선두에 온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웨슬 리가 강조했던 것이며 휫필드가 설교했던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을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칭의와 관련해서, 특히 로마교회의 잘못에 대항해서 이것이 진실로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그러 잘못은 로마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법정적이며 선언적이라는 점이 바로 성경이 선포하는 바임을 살펴봅시다. 그 증거를 먼저 구약에서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23:7을 봅시다: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계명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나는 악한 자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런 자들이 죄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신명기 25:1 역시 봅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여기서 여러분은 ‘재판하다’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다시 봅니다. 여기서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판결을 받기 위하여 옵니다.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재판합니다: “의로운 자를 정당화하고 악한 자를 정죄하시오.” 분명히 그 경우는 순수하게 법정적 문제입니다. 이런 판결문들은 두 분쟁자들의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선언을 해야만 합니다. 즉 재판관은 판결을 선언하여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옳다고 선언하는 행위는 “의인은 의롭다”는 것으로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정적 행위입니다.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그렇게 가장 중요한 잠언에서 칭의는 정죄에 반대되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양자가 다 법정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결단코 금지하시지 않으실 것이기에, 만약 칭의가 성화와 동일한 것이라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악인을 의롭다 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두 사람 모두를 비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 용어는 법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 7:29).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성이나 존재를 변화시키지 않았고 단지 그분에 대하여 선언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여러분이 칭의에 대하여 가르치고 이는 성경을 볼 때에 그 칭의가 어느 곳에서나 그런 의미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3:39이 바로 그곳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이런 모든 문제에 관한 위대한 전통적인 구문은 바로 로마서 3:20-28인데, 이 안에 ‘칭의’의 의미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미셔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3-27절).
그리고는 놀라운 결론을 28절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또한 로마서 4:5-7에서 중요한 진술을 볼 수 있는데 특히 5절이 그렇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그가 선하기 때문에 의롭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선언은 불경한 자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고,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그리고 이런 구절들에서 다른 진술들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로마서 5:1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자.” 그리고 로마서 5:9에서도 역시 그 동일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로마서 8:30-34속에서도 이 위대한 진술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31절). 그리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2-34절). 여러분은 칭의가 정죄의 반대라는 것과, 누구도 비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됩니다.
칭의의 모든 시간은 법정적인데 여러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그리고 갈라디아서 2:16에서도 로마서에서 볼 수 있는 동일한 진술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는 루터에게 자유를 선물한 위대한 서신서입니다.
루터의 유명한 갈라디아서 주석 책은 여러분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며, 또한 여러분이 계속 참고하면 할수록 더욱더 여러분은 그것을 즐길 것입니다. 그 주석을 로마교회에 대한 논박으로만 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엇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무엇이 바른 것인가를 여러분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루터는 그것을 썼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루터를 그것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시대에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루터의 주석서를 사서 2:16과 3:11 같은 위대한 구절들에 대한 그의 능력있는 해석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해 드린 하나님께서 법정적 선을 하신 그 모든 예들 속에서, 삶의 조건으로서 우리들에게 부과된 법의 모든 요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완전하게 만족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의 선언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법을 주신 분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법을 만족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롬 10:4). 하나님께서 이 선언을 하셨고 이것이 바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위대한 선언에는 두 국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칭의에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부정적인 요소는 우리의 죄들이 용서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언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는 먼저 필요합니다. 율법은 우리 모두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리고 율법은 말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롬 3:19)했습니다. 저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저의 죄책에 반하여 무엇인가 해져야만 합니다. 칭의에서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저의 죄들이 덮어졌고 용서받았다는 것, 즉 그 죄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이것이 요점입니다) 칭의는 죄 용서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칭의와 죄 용서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제가 정확히 멀하자면, 복음적인 사람들도-칭의와 용서를 동일시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앞장에서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그들의 구속론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수동적으로 순종하기 전에 구속의 한 부분으로 율법에 대하여 적극적인 순종을 드렸다는 점을 깨닫지 못합니다. 달리 말해서 칭의에 있어서 두 번째 적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점에 더하여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거나 아니면 우리의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준수하셨고 또한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율법의 요구들 하나 하나를 만족시키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저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이 중요합니다. 칭의를 단지 나의 죄가 용서받았으며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리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자신을 의롭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제 자신의 의로운 삶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에, 당신은 경건한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렇게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당신의 것으로 인정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제 자신의 칭의에 있어서 저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저의 것으로 돌리고, 저의 것으로 여기시며, 저의 것으로 전가시키십니다. 저는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상태나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저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게 입혀 주셨습니다. 진젠돌프의 찬송은 이 점을 완전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의의 옷이
나의 아름다움이며
나의 영광의 옷이네

우리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로 덮어졌습니다.

오 죽었던 자로
주님의 음성을 이제는 듣게 하소서
사라져갔던 자들이 주님을 즐거워하며 살게 하소서
그들의 아름다움과 영광의 옷이
바로 이것, 주 예수님, 바로 우리의 의입니다.

칭의는 전적으로 용서 그 이상임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완전하고 흠없는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내용이며 우리는 그것을 이미 살폈던 성경 구절을 가지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0-22에서 이것이 완전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이며 적극적인 것입니다. 또다시 여러분은 로마서 4:6에서 이것을 보게 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하나님께서는 죄의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았고 이 점에서 그는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에게 이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가장 중요한 장에 속하는 제5장의 후반부 전체 속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위대한 가르침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7-19절).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적극적인 순종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준수하셨는데 이 점이 바로 율법을 깨뜨리고 타락한 아담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10:4을 살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또한 고린도전서 1:30의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리고 고린도후서 5:21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단순히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적극적인 의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3:9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나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런 모든 것들은 칭의에 관하여 적극적인 면이 본질적인 가르침임을 충분히 보여 줍니다.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매우 간단하게 보여 줌으로써 이것이 더욱 명확해진다면 제가 그 차이를 설명해 볼까 합니다.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시다: 칭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입니다. 반면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복되신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인격내에서 사역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기억하십니오. 의롭고 합당하다고 선언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십니다. 성화시키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칭의는 우리 밖 법정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의 내적인 생명, 즉 우리 안에서 발생합니다. 제가 의롭게 된 때는 법정에 서 있을 때였고 그때에 판사가 저는 자유라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밖에서 행해진 저에 관한 진술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제 내부에서 역사하며 발생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며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칭의는 단 한 번 영원한 행위입니다. 그것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반복될 수 없고 또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단 한 번 영원히 선포되는 선언입니다. 이와는 달리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우리는 희미한 것을 벗어나 완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은혜와 지식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오해하고 혼동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나아가 비성경적입니다. 우리가 살펴왔던 것처럼 이런 잘못은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식의 경건주의의 모든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를 속박했던 것인데, 그 잘못을 루터가 알았을 때 그는 자유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의롭게 되었으며, 나아가 영광을 돌리며 즐거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개신교 입장의 본질입니다. 물론 더 나아가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은 루터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면 여러분이 의롭게 되었는지 어떠했는지 의심히 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현재의 여러분의 상태와 조건에서 죄를 범한다면, 그때는 여러분의 칭의가 계속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칭의가 법정적이며 외적이며 선언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발생했던 간에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러면 칭의는 어떻게 발생합니까? 대답은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엡 2:9)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부정적으로 조심스럽게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4:5에서 반복합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는 우리의 칭의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인 요점에 도달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과 칭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본질적으로 이단의 가르침이며, 정죄당해야만 될 뿌리며 싹입니다. 만약에 제가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고 혹은 제가 믿음을 활용하기 때문에 의롭게 된다면, 제 구원은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며 하나님께서는 제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제가 행한 이 일 때문에 저를 의롭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가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고, 혹은 제가 믿음을 활용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제가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도구라는 의미입니다. 단지 도구로서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그 의를 저는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의 중요성을 여러분이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죽으심의 차이가 만든 것이 이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심판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은 한쪽에 버려져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것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시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저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저의 의입니다. 저를 구원하는 것은 그분을 믿는 나의 믿음이 아닙니다. 저를 구원하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저의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의 미묘한 위험을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로 옵니까?”라고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제가 올 수 있는 통로이며 도구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살폈을 때에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그렇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탄생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이런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믿음을 사용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의를 받습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엡 2:8).
만약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잠깐만”,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당신은 야고보가 그의 서신 2:14-26에서 믿음에 관하여 말하려고 했던 것을 잊으신 것은 아닙니까? 그곳에서 야고보는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가르치는 것과 대치시키고 있지 않나요?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고, 야고보는 ‘행위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확실하게 대답하자만 이 점에 관하여 바울이나 야보고 모두 칭의의 질문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다 단순히 믿음의 특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행위, 자신들의 삶 그리고 자신들의 일들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아닙니다.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을 구원한 것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오늘날의 어떤 신자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한 나는 구원받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만예요!”라고 야보고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순종과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만약에 당신이 참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믿음과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용합니다”라고 그 유용성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살도록 그 믿음이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살핌으로써 당신의 믿음의 참됨 여부를 당신 스스로 시험하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능동적이며 그 자체를 증거하고 그 자체를 보여주었던 믿음입니다. 진실로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야고보와 완전히 동일한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6장 전체는 야보고서 2장과 완전히 평형을 이룹니다. 바울과 야보고는 두 개의 다른 문제들을 보고 있으며 그리고 잘못된 두 개의 특별한 형태들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우리들을 위하여 이해해야 할 위대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시지 않으며 또한 제가 믿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제 믿음을 의로 여기실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준수했고 너의 죄를 위하여 죽었던 내 아들의 의를 너에게 주노라. 내 아들은 율법 앞에 완전히 의로우며 또한 그는 율법 앞에 너를 제시했다. 그는 율법의 작은 점 하나까지 성취했다. 따라서 나는 너에게 내 아들의 의를 줄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들을 믿을 수 있도록 저를 부르시며 또한 믿음의 선물에 의해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제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 자신이나 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내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엇도 심지어 저의 믿음조차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제 믿음은 저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를 저에게 전가시키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는 저와 하나님 사이에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선언을 믿습니다. 제 믿음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완전하고 흠없고 점없는 의의 옷을 저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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