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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보스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김재윤 | 2004.12.31 12:05
게할더스 보스 지음,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내용은 아주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공통적인 증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언으로 갈릴리에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누가복음 4:13에서는 예수께서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역의 목적이라고 선언하시기까지 하셨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이처럼 우리 주님의 사역의 시초에 의미심장하게 나타날 뿐 아니라 산상수훈이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 등 그의 주요 가르침 가운데서 다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강림이 예수께서 자신의 나타나심과 활동과 연결시키시는 위대한 사건이라는 점과, 또한 예수의 가르침(그의 활동에 항상 밀접하게 연관되는)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강림 사건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나라의 중요성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는다.
또한 「은혜와 영광」은 탁월하고도 희귀한 설교집이다. 독자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효과가 생기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설교들 자체의 성격이다. 이 설교들에는 성경과 신학의 이해의 놀라운 깊이와 그 높이 날아오르는 말 솜씨가 멋지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어느 강단에서도 그런 비슷한 설교를 들어볼 생각을 감히 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 설교들은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요구하며 또한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찬란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설교들은 풍성한 신학적 지식의 보고(寶庫)요, 광맥마다 찬란한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는 금광이라 하겠다.

Ⅰ. 히 12:1-3 경주를 경주함

이 구절은 히브리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권면 부분 가운데 하나의 서두에 해당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의 그 어떤 책도 이 서신서만큼 신학적인 해석과 실천적 적용의 두 가지 요소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면서도 그렇게 유기적으로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은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절대로 신학적 교리를 실천적 권면으로 대신하려 하지를 않는다. 실천적인 권고는 언제나 독자들의 지성에 호소하는 진리에 대한 사려깊은 제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보았고, 거기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철저하게 객관적이며, 잔잔하면서도 합리적이고 또한 신뢰성이 없는 그런 자세로 그런 상황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그 진리의 내재적인 능력에 의지하고 있다. 그는 진리를 완전히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전도자의 손에 쥐어지는 강력한 무기를 인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좌위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한다(사람의 가장 내면의 의식의 골수와 그 속에 있는 것에까지 이르러서 마음의 생각과 의도까지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반적인 침체 상태에 대한 기자의 한탄을 접할 때에 거기에는 기독교의 교리적인 인식에 진보를 보이지 못하는 점은 물론 그들의 신앙적 생활의 실천적인 영역에서도 발전을 보이지 못한다는 점에 대한 탄식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탄식은 5장에서 가장 잘 드러나듯이 스승의 탄식의 성격을 띠고 있다. 거기서 그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듣기에 둔해졌음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경륜의 초보적인 원리들을 다시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을 의의 말씀에 대하여 경험이 전혀 없는 어린 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앞 장 전체에서 옛 언약에 속한 거룩한 역사에서 믿음의 삶과 본질과 그 가능성을 옛 언약에 속한 거룩한 역사에서 실례를 들어서 보여주었던 기자는 여기서 다시 그 핵심되는 내용을 함께 모아서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이 모든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기자가 독자들에게 주는 개인적인 호소가 들어 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경주에 대한 비유는 특히 바울 서신서에서 아주 친숙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당시 운동 경기를 중시했던 이교도들의 삶을 옆에서 늘 접촉했던 기자로서 아주 쉽게 사용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 비유는 또한 그 당시의 종교적 상황과도 놀랍게 일치한다. 그 당시 초기에 기독교는 아주 열정적인 성격을 띠었다.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겹쳐 작용하였으므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일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경주를 경주하는 일로 제시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지극히 합당하게 된 무슨 특별한 이유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믿음의 에너지가 결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향하여 의연하게 고개를 들고 있지 못했고, 오히려 고개를 뒤로 돌려서 낡은 하나의 의식적인 종교적 체계를 바라보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이 체계에 대한 그릇된 사랑으로 인해서 그들은 기독교가 그들에게 제공해준 그보다 훨씬 더 큰 특권들과 보배들을 간과해 버렸다.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해도, 또한 선하고 영구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회복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건전한 영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거의 도움이 되지를 못한다. 더구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목적을 두고 그것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목표를 가질 때에는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에너지가 결핍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시련과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 비정상적으로 완고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그들은 속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그런 그리스도인다운 인내와 영웅주의를 발전시키지를 못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의 중심 사상에 나타나는 대로 특별히 경기장을 달리는 달리기 선수의 비유를 통해서 권면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은 이런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자가 달리기 선수의 비유를 소개하는 방식이나 그가 그것을 강조하는 동기들을 볼 때에, 우리는 그가 이 편지를 통해서 대응코자 했던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가 있다. 잠시 동안 그 비유와 그것에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앞 장에서 묘사한 바 있는 구약 성도들의 모범을 지적함으로써 활기 있는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실행할 것을 권면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 이 말씀이 11장의 마지막 두 절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기자의 의미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구약 성도들이 증인들이라는 사상은 11장 39절의 말씀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거기서 표현된 관념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나 사람들이 그들의 고귀한 성격에 대하여 가지는 증거인 반면에, 여기서는 증인들 자신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영웅적인 믿음에 대한 역사적 증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준다는 그런 의미에서 증인으로 불리고 있느냐, 아니면 그 증인이라는 관념을 경주의 비유와 좀더 밀접하게 연관지어서 그들이 실제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싸움을 직접 관전하며 목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합당할 것이다. 앞 장 전체는 전자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들이 역사에 나타났던 인물들로서 우리에게 증거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후자의 해석이 여기의 비유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생각하여야 하며 동시에 그들이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런 표현들은 경기장 주위에 앉아 있거나 서서 구경하는 큰 무리들을 지칭하는 것임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저자가 하늘의 성도들이 “우리의 지상의 삶과 교감하며 그것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세상을 떠난 과거의 성도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여기 나타난 사고 전체는 비유적이요 관념적이므로, 따라서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문은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가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이 그들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 상상하기를 바라고 있느냐, 아니면 비유적으로 또한 관념적으로 그들이 우리들 주위에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라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후자의 해석이 전자의 것보다 더 포괄적인 것으로서 그것까지 어느 정도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구약의 성도들이 우리를 둘러싼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그들의 관념 상의 임재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효과는 주로 그들 자신이 한때 동일한 경주를 경주했던 자들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겪는 경험을 그들도 한때 겪었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상상할 그때에 그들이 견디고 이루었던 그 일에 대한 모든 기억들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나 이 서신서를 처음 읽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 고귀한 비유에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항상 과거의 성도들을 되돌아 보면서 그들과 충분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과거의 교회와의 이런 영적 연속성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른다. 자연적인 혈연 관계에서 볼 때에도, 우리는 역사 속에 명예로운 기록들을 남긴 그 분들의 후손이라는데 큰 자부심을 느끼는 데는 아주 재빠르다. 그렇다면, 신앙적인 영역에서도 그렇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자연적인 혈연 관계에서 뿐 아니라 믿음을 실행하는 면에서도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무(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의상의 의무)라는 원칙의 강도를 느껴야 마땅하다.
때때로 우리는 현재의 세상이 우리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 것이냐 하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진다. 세상이 우리를 진보주의자로, 계몽주의자로, 자유주의자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한다. 신앙의 인물들이 우리들 주위에 모여서 우리가 현재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데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 그들이 우리의 행동들을 보고서 부끄럽게 생각할지, 혹은 기뻐할지 모르지만 - 바라보고 있다면, 당연히 그 과거 시대의 교회가 우리에 대해서 어떤 역사적인 판단을 내릴지에 대해서 생각하여야 마땅할텐데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가끔씩이라도 우리의 현 상태와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이런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노력하며, 또한 과연 우리가 부끄러움이나 자책감이 없이 우리의 믿음의 건전함과 우리의 삶의 순결함과 우리의 봉사의 헌신을 과거 어느 시대든 하나님의 교회가 이룩한 업적들 밑에 놓을 수 있는지를 자문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반대로, 세상이 우리를 반동주의자들이라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경멸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과거의 백성들을 향하여 그의 역사적 인증을 통해서 인쳐주신 그 원리들에 충실해왔다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무수한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존귀하게 보셨듯이 그들이 우리를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생각하고 거기서 위로를 찾도록 하자.

2. 그리스도인의 삶을 달리기 경주로 비유하여 묘사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비교해야 할 그 다음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곧, 그 경주의 전체적 성격이 앞을 내다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게재된 모든 것은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경주의 목표점은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다. 상을 바라보고 경기장을 달리는 사람이 이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의 - 아니 유일한 - 관심으로 삼듯이, 참된 신자는 그의 마음과 에너지를 미래에 집중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이라는 근본적인 법칙에 순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장 40절에서 족장들이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편으로 보면, 그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이점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소한 그 약속을 부분적으로나마 현재의 삶에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그들의 삶이 이 점에서 구약 성도들의 삶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가 없이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과 합류하여 그들처럼 다가올 세상이 이 세상 앞에 실제로 나타나게 될 그 때를 바라보며 그 때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우리와 그들이, 동일한 사고를 통해서 활력을 얻으며 그 이상적 삶, 이상적인 나라에 대한 동일한 비전으로 영감을 받는 하나의 신자들의 큰 모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구약 역사에 대한 저자의 개관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인 경주를 경주하여야 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그런 사상의 틀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특별히 변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무엇보다도 앞을 바라보는 시기요, 예상의 시기요, 매 발걸음마다 장차 나타날 무언가 더 높고 더 나은 것을 상기시키는 그런 시기였다. 에녹과 모세와 아브라함과 모든 선지자들은 그들이 현재는 그들에게 잠정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그들의 삶의 모든 자세를 통해서 증거해주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당시의 형편을 최종적이며 충분한 것으로 믿어서 거기에만 매달렸다면, 이는 그들에겐 큰 잘못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 역시 미래의 세계를 자신의 전 생애와 사상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의 목표로 인식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영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다른 어떠한 차이들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구속 역사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 전체와 하나이다. 곧 우리는 온 교회와 함께 절대적이며 최종적이며 완전한 것을 추구하는 동일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주를 본질상 믿음의 경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믿음이란 그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이 아니라 특별히 이런 종말론적인 방향성을 가진 그런 믿음을 지칭한다. 곧 하늘의 세계의 보이지 않는 실체들과 활기있게 접촉하게 하며 또한 그것을 향해서 전진하도록 만드는 그런 믿음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사상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이 말씀 역시 달리기 경주에서 빌어온 것이다. 경주자가 모든 거추장스러운 옷을 다 벗어두고 또 경주를 방해하는 모든 무거운 물건들을 옆에 두고서 달리듯이, 미래의 하늘의 삶을 향하여 목표를 두고 달리는 신자도 그 믿음의 경주를 지체시킬 수 있는 현 세상의 모든 관심거리들을 벗어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특별히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종교의 의식적인 형식들에 얽혀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그런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일하시는 그 하늘의 실체를 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고 그들을 잡아끄는 것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 말씀은 좀더 폭넓게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무거운 것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하늘을 추구하는데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이거나 아주 어울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거운 것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순수한 의미에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에 연루되거나 참여하는 일은 합당한 의미에서 무거운 것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그런 일이 무거운 것에 속한다면, 이 말씀은 수도원 생활의 원리를 취하여야 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를 있게 하신 자연적인 환경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자는 이 세상에 속한 자녀들이 현재의 삶에 대해서 갖는 것과 똑같은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신자는 그 삶의 무게 중심을 미래의 삶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관심사로 갖는 모든 접촉들을 그 미래의 삶에 종속시키고 복종시켜야 한다. 이런 이 땅의 일들이 무거운 것들이 아니라, 앞을 향하여, 그리고 위를 향하여 하나님께로 더 빨리 나아가도록 해주는 날개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는 영적인 세계의 요구에 대해 불성실하게 되고, 저자가 아주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음행자요,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거운 것들이 신자의 경주를 방해하고 타락하도록 미혹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옆에 내려 놓아야 하지만,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그보다 훨씬 단호해야 한다. 저자는 죄를 무거운 것이라는 일반적인 범주와 분명히 구분하여 별도의 범주로 간주하고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죄는 아주 특별하게, 단호하게 처리하여야 한다. 죄는 저자가 바로 뒤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야 한다. 여기서 저자는 또다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위험이 다분한 - 그들 가운데 이미 범한 사람도 있겠지만 - 그런 특정한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곧 복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믿지 않고 결국 유대주의로 혹은 유대주의보다도 더 악한 상태에 빠져 들어가는 죄가 그것이다.
히브리서의 몇몇 구절들에서 이 “죄”라는 낱말이 그런 특정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말씀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저자가 죄에 대해서 말씀하는 바는 모든 죄의 형태에 일반적으로 다 적용된다. 신자가 경주에 성공을 거두려면 반드시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죄는 우리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는 싸움의 목표 사이에 장애물을 세워놓는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전에 도달한 지점에서 거꾸러 돌이키게 해서 오히려 뒤로 처지게 만든다. 죄는 하늘의 상태에 대한 시력을 흐리게 만든다. 하늘의 상태를 누리고자 하는 열심을 약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의 힘을 깨뜨려 버린다. 저자는 죄를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으로 보는데, 저자의 이런 입장을 우리 스스로 그대로 취해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영광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관심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접촉을 상실하는 것은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경주를 도중에 중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더욱이, 죄에게는 하나님과 더 높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을 방해할 수 있는 기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죄를 가리켜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말은 어느 특정한 형태의 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묘사를 “얽매는 죄”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죄의 일반적인 성격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죄로서는 우리에게 접근하기가 매우 쉽다. 우리는 언제나 죄를 지니고 다닌다. 말하자면 죄가 우리와 함께 경주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죄는 동시에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 가운데 가장 위험스럽고도 가장 광범위하게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얽매이기 쉬운 것이라고 한 말씀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성화의 경주를 경주하는데 온 정력을 기울이는 동안 그것을 벗어버리고 그것을 철저히 끊어내도록 하는 강하디 강한 동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다. 죄는 그야말로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될 원수이다. 우리가 죄를 우리와 함께 있도록 내버려두면, 그것은 어느 순간에라도 우리를 넘어뜨리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죄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공격적인 자세이다. 그것을 그저 저항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우리 스스로를 죄에서 끊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성화의 과정을 그저 산만한 문제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아주 지능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추구해야 할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3. 본문이 강조해주는 그 다음의 사실은 그리스도인은 인내로 경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그저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견디는 것을 뜻한다. 비유에서, 상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선수는 모든 난관을 단호하게 극복해 나간다. 그리하여 그런 난관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난관으로 인해서 목표에 도달하는데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데에는 고난과 시련이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의 경주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속에 인내력이 생기도록 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런 덕을 배양하는 것이야말로 경주를 경주하는 일 그 자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장에 나타난 실례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 성도들의 영웅적인 인내를 믿음의 일면으로 보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인내는 신자로 하여금 목표를 향하여 더 빨리 전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으로 보는 관념과, 또한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결연한 의지의 근원으로 보는 관념과,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원리로 보는 관념이 이 서신서에서 매우 밀접하게 서로 연관되고 있는 것이다.
인내가 어떻게 해서 상을 얻는데 유용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다. 저자는 바로 이어지는 진술에서 예수님의 경우를 언급하는데, 그의 경우는 직접적인 공적으로 연관되었다. 지상 생애의 경주에서 그가 견디신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영광스럽고 복된 그 높은 위치를 베푸신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가 받으신 즐거움은 그가 견디신 십자가와 그가 당하신 부끄러움에 대한 자연스러운 상급이었다. 물론 저자는 이런 의미를 신자의 경우에 그대로 전이시키지는 않는다. 이 땅의 시련과 환난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인내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우리의 그런 인내를 근거로 마지막에 올 그 영광을 요구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저자는 한 가지를 분명히 주장한다. 즉, 우리의 인내가 공적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리의 인내와 장차 올 영광 사이에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넓게 말해서, 이 말은 11장의 구약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보여준 영웅적인 행실의 모든 것이 포괄하는 것이다. 이 구약의 성도들이 상급을 받은 원리는 값없는 은혜의 원리였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원리를 아무렇게나 적용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두 가지를 기억하면 그 이유를 잘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시련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그를 순종하기 위하여 견딘 것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그들이 시련을 견디면서 보여준 그 인내는 신자가 상급이 기다리고 있는 그 하늘의 세계와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는데서 나오는 직접적인 결과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첫 번째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저자는 우리가 경주하는 경주가 하나님이 우리 앞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경주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정해 놓으신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우물쭈물하지 말고 그것들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가 많지만(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가 그랬을 것이다), 만일 그 어려움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일 경우에는 특별히 그것들을 그대로 이겨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은혜로 하늘의 생명을 상급으로 내리셔서 마치 경주가 면류관과 관련을 맺듯이 인내와 영광이 그렇게 서로 연관되도록 하신다는 것보다도 더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은 고난을 견딤으로써 드러나는 그에 대한 그 충성심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내하는 경주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배해 놓으신 것이다.
둘째로, 인내라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오직 하늘의 영적인 세계와의 참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솟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무감정이나 체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인내로 견딘다면, 그것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본 때문이요, 그것을 이길 만한 힘과 원리가 그의 삶 속에 있어서 그것을 기쁨을 창조해 냄으로써 환난의 고통을 이기고도 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적인 하늘의 세계 그 자체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 능력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하늘의 세계의 유업이 아직 미래에 속하여 있기는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그 유업이 이미 원칙적으로 실현되며 우리의 실질적인 소유가 되기 시작했다. 이 땅의 삶과 하늘의 삶의 이 두 영역은 서로 접촉이 전혀 없이 하나는 밑에 있고, 하나는 그 위에 있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거대한 대륙 한모퉁이에 툭 튀어나온 갑(岬)이 대양 속으로 그 자태를 내어밀 듯이, 하늘이 그 은사와 능력과 기쁨으로 우리의 이 땅의 경험 속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인내에 영양을 주며 그것이 없이는 한 순간이라도 인내가 존재할 수조차 없는 그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은밀한 가운데서 하늘의 세계와 진정한 교감을 누리는 것이다. 사실상, 인내 - 겉으로 보면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 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그것 이상으로 적극적인 것은 없다. 최소한 그것은 가장 적극적인 것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곧, 믿음 그 자체 속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인 에너지의 현현이 바로 인내인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하늘의 세계는 마치 고대 신화에 나오는 거인에게 있어서 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과 접촉을 계속 유지하는 한, 새로운 영적인 능력의 물줄기가 끊임없이 그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인내가 경주의 종착점에 가서 하나님의 약정에 따라서 상급을 받는 크나큰 전제 조건이 되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 상급을 재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보이는가?
우리가 저자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이 문제되는 원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지도자요, 완성자로서 이상적인 신자이셨으며, 따라서 이상적인 인내를 보여주는 전형이셨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참으실 수 있도록 해준 것이, 그가 침침하지 않은 분명한 믿음으로 앞에 놓인 즐거움을 향하여 줄곧 눈을 고정시키고, 하늘의 세계와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날마다 그의 경주에 필요한 충족한 힘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로마서 5장의 바울의 아름다운 진술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의 결론을 삼고자 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영원한 복락의 원리요 보증으로서 이 현재의 삶에서도 이미)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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