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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요약본

승리하는 기독교

김재윤 | 2004.12.22 00:50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승리하는 기독교, 복있는 사람

사도행전 강해설교 시리즈 셋째권 「승리하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되 죽기까지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의 놀라운 일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5:17-6:9 말씀으로 초대교회 안팎의 시련과 성장을 밀도 있게 탐색하면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저항할 수 없는 믿음의 담력으로 행한 신앙고백을 통해,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메시지의 참된 본질과 정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결국 그 과정에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려는 사도들의 선택은,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의 하나님 구원의 역사와 복음에 대한 변증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은 감동으로 증거한다.

Ⅰ. 회개, 죄사함에 이르는 문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의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29-32

우리는 지금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거부한 예루살렘 당국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는 중이다. 이것을 보면 이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메시지가 거부당한 이유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극적이고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구주의 성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복음 메시지를 거부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주의 성격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부터 고찰할 주제, 즉 회개에 대한 메시지와 연결된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회개의 필요성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또 한 가지 원리인 동시에, 사람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진리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예루살렘 관원들처럼 회개에 대한 가르침에 심히 격분한다. 이 점에서 1세기와 20세기는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이 회개의 메시지를 엄청난 모욕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자기 의가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좀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사도행전 5장의 묘사는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 의 때문에 복음을 거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회개의 필요성을 살펴보자. 복음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무엇보다 회개가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난번에 죄사함을 먼저 다루고 이제야 회개를 다루는 것인가?”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즉 사람들의 필요를 보여주고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필요를 채우고자 공급하시는 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루려 한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그 죄사하에 이르는 문은 회개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가 항상 우선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회개의 필요성과 관련된 가르침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이야말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느끼는 적개심을 가장 선명하게 입증하는 증거이다.
사람들이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에 이처럼 반감을 느끼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작음의 사고풍조이다. 세상은 남을 비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잘못이 생길 때마다 남의 탓을 하고, 국가적․국제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집권당이 어디든지 정부 탓을 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정당들을 판단하며 다 엇비슷해서 딱히 선택할 정당이 없다고 불평한다. 우리는 전부 그들 잘못이라고 하고, 그들은 전부 우리 잘못이라고 한다. 각자 자기가 옳다는 것이다. 정당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자기들 같은 안목만 가지고 자기들의 하라는 대로만 하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태도의 기저에는 인간의 타고난 자신감과 의가 자리잡고 있다.
정치권은 자신감으로 충만한다. 정치인들은 실수란 없으며 약속을 어기는 일도 없고 무슨 일이든 설명이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지금도 그들은 그런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똑같다. 정치인들은 어쩌다가 이름이 알려지고 권력의 원천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 다를 뿐,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인간의 정신은 똑같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있을까? “다음번에는 잘하겠다”는 말은 누구나 기꺼이 한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잘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이번에는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데 전문가들이어서, 어떤 변명을 해서든지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 물론 남의 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남의 죄는 가차없이 정죄하면서, 자기 죄에 대해서만 “사람들도 진상을 알면 우리를 비난하지 않을 텐데”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타락의 결과 생겨난 본성의 일부이자, 오늘날 비기독교적인 견해를 특징짓는 표지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20세기 교회까지 스며들어 왔다. 현대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 역시 세상과 똑같은 태도와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율법을 전하고 죄의 깨달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구식설교는 율법적인 접근으로서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설교자들이 불행히도 율법적인 바리새인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바울의 영향을 받아 헤매고 있으며, 만인에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만 말씀하신 예수의 단순하고도 즐거운 복음을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로 바꾸어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의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신학과 논쟁과 교리는 전부 불필요하니 치워 버리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하는 설교의 임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떤 사람들이며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예전에 무엇을 했으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무도 벌 받을 필요가 없다. 율법이 없으니 보응도 없고 지옥도 없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요청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그들의 주장은 이어진다.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든지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회개를 요청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므로, 이런 식으로 용서하지 않는 분은 하나님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의와 공의와 율법과 처벌과 정죄는 언급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전부 잘못된 용어라는 것이다. 사랑이 전부이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도 ‘종교적이지 않은 기독교’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개중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기 원하는 사람은 예배장소에 가지 말하는 말을 버젓이 책에 쓴 사람도 있다. 자신은 교회보다는 알제리의 술집과 매음굴에서 하나님을 더 발견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친절이야말로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바로 이런 것이 지극히 똑똑하고 현대적이며 교양 있고 철학적인 현대인들이 하는 말이다. 회개는 전혀 필요 없다.
아주 공정하게 말하자면, 복음주의적인 사람들도, 또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할 때조차 회개를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제가 아는 복음주의자들 중에도 설교가 책을 통해 회개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고 가르친 이들이 상당수 있다. 그저 예수께 나아가 개인적인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회개는 나중에 해도 된다는 것이다. 괜히 회개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회개의 개념 전반에 대해 인간들이 느끼는 반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경은 회개가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들이 말한 대로이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오른손으로 그를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여러분도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이것이 성경의 변함없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일으키신 역대의 위대한 선지자들은 항상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너희의 모든 곤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돌이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신약에도 같은 메시지가 나온다. 신약에 맨 처음 등장하는 설교자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우리가 세례 요한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오랜 침묵의 기간을 보내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요한이 등장했다. 성경은 말한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있을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어떤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는가? 그가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눅 3:3). 회개의 세례 없이는 죄사함을 얻지 못한다. 회개의 메시지는 신약에 등장한 첫 설교자의 첫 메시지였다.
성경을 계속 읽다 보면,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두 번째 설교자이신 주님의 사역을 보게 된다. 거기에서 발견하는 것도 정확히 똑같은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마가복음 1장을 보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일을 어떤 순서로 하셨는지, 그 우선순위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의 사역 끝 무렵에 나타나는 메시지도 같은 것이다. 성경은 주님이 부활 후에 다락방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5-47).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여 회개를 죄사함의 앞자리에 두었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교회 자체와 오순절의 위대한 성령세례, 베드로의 예루살렘 설교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러 우리가 읽게 되는 말씀은 이것이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베드로의 설교는 교회의 후원하에 전해진 첫 번째 위대한 설교였으며, 이 설교에 감동받고 성령으로 죄를 깨달은 청중은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사도 바울도 정확히 똑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어느 날 오후, 바울은 아덴-모든 철학자들의 메카-이라는 유명한 도시 안에서도 온갖 철학학파의 중심지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철학자들과 함께 마르스 언덕의 아레오바고 회의(고대 아테네의 귀족회의) 앞에 섰다. 그들의 모든 학식과 재능과 철학을 익히 아는 바울이 무엇을 전했는가? 하나님을 전했다. 그 가르침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그 자리에는 값진 금속이나 돌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다양한 신전과 제단도 난립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말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
사도행전을 더 읽어 나가다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늘 전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상기시킨다. “너희는 나의 지난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무엇을 증거했는가?-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18-21).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이제 우리가 부딪치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회개가 우선되어야 하는가? 세상이 그토록 회개를 싫어하고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거부하고 모욕으로 여기는데도, 왜 항상 회개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가? 왜 회개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가?
성경 메시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가 꼭 필요하다.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 “일단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고, 회개는 나중에 해도 된다”는 말은 무익하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주님도 회개해야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셨다(눅 24:47).
그렇다면 왜 회개가 꼭 필요할까? 그 한 가지 대답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대체 왜 세상에 이 위대한 구원을 보내 주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은 대체 왜 세상에 와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을까? 이 구원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단지 우리 죄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사실 그것도 목적의 하나이기는 하다. 그러나 죄사함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며, 주된 목적도 아니다.
그렇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말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해방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구원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이며, 새로운 나라-빛의 나라, 영광의 나라,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은 주님의 설교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 나라는 의의 나라, 거룩한 나라이다.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며, 이것만이 회개의 필요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대답이다.
다른 대답도 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여러분을 구원하시는가? 무엇으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하시는가? 모든 내용들이 서로 잘 들어맞지 않는가? 여러분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필시 자신이 지금까지 죄에 빠져 잘못된 삶을 살아왔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분의 악한 행동이 불러온 결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말하는 ‘구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과거에 살아온 삶과 과거에 저지른 행동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것이 회개이다. 물론 일종의 주문을 외우듯이 무의미하게 “회개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그러 식으로 회개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이며, 그릇되게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회개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회개 없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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