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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료나눔

조나단 에드워즈와 설교 - 양낙흥 교수

김재윤 | 2004.04.03 18:52
조나단 에드워즈와 설교



                                                        양낙흥 (고신대 신대원)



I. 목사와 부흥                


목사직에 대한 에드워즈의 인식
        에드워즈는 당시 기성 목사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심히 부정적인 인식을 노출한다. 하나님은 “무감각이 특징인 지난 시대의 목사들에게서 발견되는 영적 죽음, 게으름, 세상적 마음, 허영을 책망”하시기 위해 어떤 이들의 “연약함과 죄”를 이용하신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에드워즈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일부 친부흥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목사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열광적 설교자들의 무절제한 열기, 조야함, 궤도 이탈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가증스럽고 탈선적인 일”은 목사들의 영적 둔감함과 무기력한 경건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일부 극단적 부흥주의자들의 “신중치 못하고 성급한 열심, 그리고 비판적 정신”을 이용해서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목사와 교인들”을 징계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일부 친부흥주의자들의 일탈된 행동이나 탈선적 행태마저도 기성 교계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혹시 경건한 신자들과 목사들이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참 자녀들과 종들을 겸비케 하시고 정화시키셔서 더 큰 일을 감당케 하시고 미래의 더 큰 영광을 얻기에 합당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Yale vol. IV, 295-6.


부흥에 대한 목사들의 책임
        에드워즈는 부흥을 지원하고 진작시킬 일차적 책임이 목사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눈은 우선 복음의 사역자들 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일어나 이 위대한 사역에서 그를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며 그것을 격려하고 진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한 사역을 진작시키는 것은 그들이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바로 그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회심시키는 일이며 성도들을 세우고 굳게 하고 위로하는 일이었다. IV, 374.
여기서 목사직에 대한 에드워즈의 인식의 일단이 드러난다. 그는 목사들을 “하나님 나라의 장교들”이며 “전쟁에서 무리의 대장들”이라 보았다. 목사들은 지상에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변하는 자들이며 “그의 집의 청지기”였다. 불멸의 영혼들이 양떼로서 그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대를 이해”해야 하며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하나님은 “도성의 파수꾼들”인 그들에게 시온 성문의 열쇠를 맡기셨다. IV, 374.
이 때문에 부흥과 개혁은 주로 목사들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저 위대한 신앙 부흥과 세상의 개혁이 주로 목사들의 수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목사들에게 필수적인 것: 은혜, 열심, 그리고 용기
        에드워즈는 목사들이 이 부흥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사들이 은혜, 열심, 그리고 용기와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첫째, 은혜의 체험이었다. 목사들은 무엇보다 먼저 당시 그 땅에 부어지고 있던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saving operation)를 자기들 각각의 마음에 체험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것이 없는 목사가 구원에 관해 영혼들을 지도하는 것을 에드워즈는 아주 불행한 일로 보았다. 많은 죄인들이 각성되고 회심되고 있을 때,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신적 빛과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할 때, “목자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목사가 체험적 신앙도 없이 “다양한 상황들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우울한 일인가”라고 그는 탄식했다. 영적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목사에게 나아와 영혼의 문제에 대해 상담할 때 그러한 체험이 없는 목사가 그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상태를 판단하는 것을 에드워즈는 “위선“이라고 보았다. 자기 마음속에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의 회심을 기뻐하는 것처럼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할 때 목사는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Ibid., 506.
에드워즈는 세상적인 목사에 대해 심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불경건한 목사들만큼 지옥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사람들은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에드워즈는 목회후보자들에게 안수를 주기 전에 기존 시험 외에 한 가지 시험이 필수적이라 믿었다. 그것은 그들의 “덕과 경건”에 관한 시험이었다. 다시 말하면,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있었다는 만족스러운 위로(comfortable satisfaction)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없이 그 “위대하고 신성한 일”에 뛰어드는 것은 아주 경솔한 짓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판단이었다. Ibid., 510.
  
        부흥이 일어날 때는 목사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당시의 상황이 성령을 “갑절로”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얻기까지 목사들은 “쉬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성령의 충만을 위해 목사들은 “다른 누구보다 은밀한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함께 많이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근 목사들끼리 자주 만나서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위로부터 오는 신적 은혜의 비범한 공급을 간절히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그는 역설했다. 에드워즈의 글에는 당시 목사들이 만나 교제하는 방식의 일단이 나타난다. 그들은 가끔 서로 방문할 때 앉아서 담배피우고 기분전환을 하면서 “세상적이고 무익한 잡담”이나 하곤 했다. 이런저런 소문이나 소식들을 전하고 자질구레한 문제들에 대해 자기 생각을 피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종교적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에드워즈는 제안했다. Ibid., 507.

        에드워즈는 목사들의 자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목사들은 목사 욕을 많이 하는 열성적인 교인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목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깊은 반성과 커다란 정죄”가 있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왜냐하면 목사들 스스로 교인들의 비판적 태도를 자극할 일들을 “아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판단의 죄를 범하게 만드는 커다란 시험거리”를 그들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이 목사를 욕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더라도 목사들 스스로는 과오를 회개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믿었다. 교인들보다는 자신들을 향해 “분개”하라는 것이었다. Ibid., 508.
에드워즈는 또한 부흥을 위한 목사들의 협력과 하나 됨을 강조했다. “목사들은 현재의 영광스러운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한 마음과 한 영이 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종종 함께 모이고 협력해야 한다.”
        둘째, 열심과 각오가 목사들에게 필요했다.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하려 할 때 아주 필요한 두 가지는 “열심과 각오”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위대한 일들, 지상의 나라들과 제국들에서 완수된 위대한 혁명들”은 주로 열심과 각오 덕분이라고 그는 믿었다. “온전히 헌신된 정신은 겁 없는 용기와 불굴의 각오와 더불어...목적 달성에 커다란 효과가 있다.” 알렉산더 대제, 올리버 크롬웰,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라고 에드워즈는 보았다. 능력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열심과 각오만 있으면 그들보다 “열배의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열심과 각오가 없는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며 그것 없이 몇 년간 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단 며칠 만에 할 수 있다고 그는 장담했다. 어떤 사람이 분명하고 강한 열심과 각오가 있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들은 경외심을 품게 되고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들은 굴복당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앞에 부복하며 논쟁이나 논란을 피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믿었다. Ibid., 508-509.

        그러나 목사들이 냉랭하고 냉담하며 구태의연하고 미지근하면 결코 어떤 위대한 일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경고했다. “무관심(indifference)과 겁(cowardice)은 단지 반대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미지근함과 겁 때문에 “선한 계획들과 제안들이 실패하거나 제안되자마자 실종되어 버린 일들이 종종 있었다.” 요컨데 “우리의 불행은 열심과 용기의 결핍이다.” Ibid., 509.

        에드워즈는 재능은 있지만 열심과 용기가 없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커다란 아쉬움을 표현했다. 미국에 명석한 두뇌와 학식이 있는 목사들이 많은데 이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시는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들이 가진 빛에 비례하는 "하늘의 온기와 신적 열기"가 마음에 있기만 하다면 장차 얼마나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안타까워했다. 만일 미국에 태어났던 어떤 위대한 인물들이 철학에 만큼 신학에도 뛰어났더라면, 그리고 “열정과 열심”으로 기독교 사역에 종사했더라면 아마 온 기독교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며, ‘세상을 뒤집어’ (행17:6) 놓았을 것이라고 그는 탄식했다. Ibid., 510.



II. 에드워즈의 설교



에드워즈의 설교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큰 명성과 영향력을 가진 노샘프턴 교회 강단에서 에드워즈는 평생동안 천 수백 편의 설교를 전했다. 지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천 편 이상 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예일대의 에드워즈 프로젝트에 의해 시대별로 분류되어 이미 여러 권 출판되었다. 과거 에드워즈를 연구하고자 했던 학자들은 예일대학의 고문서 도서관인 바이네크 도서관에서 극히 작은 글씨로 씌어져 판독하기 심히 어려운 에드워즈의 수기 원고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과정을 다 거쳐 출판된 믿을만한 예일대판 설교집들이 있으니 에드워즈의 설교 연구가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에드워즈는 매주 두 편 이상의 설교문을 작성했다. 그 길이는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더라도 대개 90분 이상 걸리는 장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긴 설교를 그처럼 자주 준비했는데도 어휘 선정, 논리 전개, 조직과 구조에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는 원 포인트 메시지의 그 긴 설교문들이 완벽한 논리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설교가 평생에 걸쳐 매주 두 편 이상씩 기록되었다는 것은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아주 강력했다. 그는 개념들을 정밀하게 해설함으로써 그것들을 생생하게 만드는 특유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설교는 완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긴 논증을 풀어 나갔는데 강해의 압도적 능력 위에 가공할만한 엄숙함이 있어 그의 영혼 속에 상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회중은 그 설교에 저항할 수도 그것을 망각할 수도 없었다. 죄와 구원에 대한 그 평범한 옛 진리를 풀어 나갈 때 그는 청중들이 두 시간을 20분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었다. 에드워즈의 “빈틈없는 분석의 고요한 장엄함 앞에서 사람들이 느낀 진리의 능력은 조지 윗필드의 열광적 격렬함”이 가져다주는 것 이상이었다. Packer, The Quest of Godliness, 314.
실제로 로이드 존즈는 에드워즈를 조지 윗필드보다 높이 평가한다고 고백한다. D.M.Lloyd Jones, The Puritans, 365.
에드워즈는 전형적인 원고 설교자였다. 그는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원고를 작성해서 감정을 섞지 않고 그대로 읽어 내려가는 식으로 설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소위 “웅변적” 설교자는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유창한 설교자입니까?” 하는 질문을 그의 청중들 중 한 사람이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유창함이란 말을 당신이 일반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는 유창한 척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목소리를 연구하지 않았고 힘찬 어조                로 강조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제스쳐를 쓰는 일도 드물었고 심지어 움직                이지도 않았습니다. 청중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                거나 아름다운 묘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유창함이란, 압도                적 논증의 무게와 집중적인 감정으로 설교자의 영혼 전체가 개념들과 전달                의 각 부분에 투입되어 모든 청중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엄숙히 설교에 주                의를 기울이게 하여 그들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식으로 중요                한 진리를 청중에게 제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에드워즈씨야말로 내가                 들은 사람들 중 가장 유창한 설교자였습니다. Jonathan Edwards, Works, I:ccxxxii(from Dwight's Memoirs of Edwards).



        때로 에드워즈는 설교 원고를 아주 꼼꼼히 준비하느라 한 편의 설교를 수없이 다시 고쳐 쓰곤 했다. 한 단락 전체나 한 어구가 마음에 들 때까지 손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항상 원고를 완벽하게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바쁠 때는 단지 개요와 핵심 단어들만 적어 강단에 올라가기도 했다. 심지어 전에 했던 설교를 다시 하거나 그 중 일부를 이용해서 새 설교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또 처남에게서 선물 받은 여백 성경(Blank Bible)에다가 자기 자신의 주석을 달아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약 900 쪽의 간지가 끼워져 있는 이 여백 성경은 그의 문집(Miscellanies)과 함께 설교를 위한 착상의 원천이 되었다. Nichols, 53.

        에드워즈는 20대에 이미 어떤 논리적 비약이나 불필요한 문장, 심지어 단 하나의 무의미한 단어도 사용하지 않는 설교 작성의 습관을 체득하고 있었다. 한국의 신학도들과 설교자들은 이 점에서 에드워즈에게서 큰 도전을 받게 된다. 28세 되던 해 보스턴 목요 강좌에서 에드워즈가 행한 설교는 고도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젊을 때부터 성경 본문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얼마나 날카롭게 분석했는지, 그리고 한 편의 완벽하게 짜임새 있는 설교를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심혈을 쏟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에드워즈는 청교도들의 전형적 설교 구조인 명제(교리), 증명(논증), 적용(용도)의 세 부분으로 된 설교문을 작성했다. 서론적 도입에 바로 이어 그는 청교도들이 “교리”라고 부르는 설교의 주제를 선언한다.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그분에 대한 구속받은 자들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의존 안에서이다.” 교리적 명제의 선언에 이어 본론에서 교리의 논증이 뒤따른다. 구속받은 자들은 모든 선을 위해 하나님께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의존한다. 이 점을 상술함에 있어 에드워즈는 세 개의 전치사들을 재치 있게 구사한다. 그것은 “~으로부터”(of), “~을 통해”(through), 그리고 “~안에서”(in)이다. 첫째로, 구속받은 자들은 그들의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of God) 받는다. 둘째,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의존하는데 이유는 그들이 모든 것을 그를 통해(through)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구속받은 자들은 그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 안에서(in) 가진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어 보면 그 대부분이 심오한 영성과 충실한 내용을 갖춘 걸작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한국 설교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에드워즈의 설교들 중 상당수가 거의 논문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는다. 놀랍게도 에드워즈는 매일 평균 열 세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물론 그 시간이 모두 연구와 집필만을 위해 투입된 것은 아니고 그 중 일부는 기도를 위해서도 할애되었겠지만 그의 엄청난 설교문들이 어떻게 생산될 수 있었던가를 짐작케 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에드워즈가 하루 13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목사가 본래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재고하게 해 준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매일 서재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설교에 있어 지성과 감정
        제일차 대각성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당시, 부흥 설교자들이 청중들의 지성(understanding)보다는 주로 감정(affection)에 호소한다는 비난이 있었다. 부흥주의자들은 명료한 논증과 정보 제공에 의해 청중들이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방식의 말과 음성, 그리고 제스쳐에 있어서의 아주 진지한 모습에 의해 청중들의 정열 (passions)을 최고도로 높이려 한다고 반부흥주의자들은 비판했다. 당시에 오랫동안 유행하던 설교관은 열렬하고 감정적인 설교를 멸시하는 반면 풍부한 지식과 강한 논증을 과시하며 정확한 방법과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를 높이 평가했다. Ibid., 387.
“이해력(understanding)에 대한 상응하는(proportionable) 조명이 없이 감정을 움직이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Ibid., 385.

        이러한 비난에 대해 에드워즈는 감정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대답한다. 하나는 지성에 빛이 비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지성에 어떤 실수나 망상이 작용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열렬한 설교자들에 의해 청중의 감정이 고조될 때, 그것이 실수나 망상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진리에 부합되는 이해”의 결과인가 하는 것이다. 만일 후자 쪽이라면 그 감정은 제대로 일어난 것이다. 즉 그것은 정신(mind)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이해력(understanding)에 빛을 전달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Ibid., 386.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열정적 설교가 그것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낳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냉랭한 설교보다 복음의 진리들에 대한 더 참된 이해를 낳는 경향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설교 전달 방식이 아주 감정적이고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제의 성격에 어울리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리하여
                주제의 중요성을 능가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식이나
                억지만 아니라면, 그것은 설교자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나 이해를 청중의 마음에 일으킴으로써  
                이해력을 밝혀 주는 효과가 그만큼 더 크다. Ibid., 387.


그래서 에드워즈는 청중들이 다름아닌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주제의 성격에 상응하기만 한다면 “가능한 한 청중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빛”은 풍부하면서도 “열”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신학에 관한 사변적 지식의 증가보다 교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믿었다. 그는 자기 시대만큼 설교에 있어 정확한 문체, 철저한 논증, 풍부한 학식, 명료한 표현이 넘쳐난 반면 “죄의 사악함에 대한 감각”이 그처럼 약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처럼 작으며, 거룩한 삶이 그렇게 희귀한 시대가 어디 있었던가고 묻는다. Ibid., 387-388.
여기서 에드워즈는 교회사, 특히 설교사에 길이 기념될 명언을 남긴다.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는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이 더 필요하다.”(Our people don't so much need to have their heads stored, as to have their hearts touched." Ibid., 388.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신학적 지식보다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설교에 있어 감정이나 열렬함을 정당화하는 것이 성경적 근거를 가진 주장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다음의 성귀들을 제시한다. “소리를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처럼 높이라....”(사58: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말할지어다.....”(겔6:11). 이러한 본문들은 많은 경우 “가장 감동적이고 열성적인 방식의 전달”이 설교에 어울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Ibid., 388.
그는 이사야 40:9 절을 근거로 기독교의 번영기가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특별히 진지하고 강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Ibid., 389.


설교에 있어 율법과 복음의 조화
        에드워즈 시대 대각성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부흥 설교자들을 향해 쏟아진 비난들 중 하나는, 이미 커다란 공포(terror) 속에 있는 자들을 그들이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외과 의사가 환자의 몸에 수술 칼을 들이대기 시작하자 환자는 이미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움츠러들며 소리를 지르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을 밀어 넣어 환부의 중심에까지 칼을 들이민다고 해서 그 의사를 비난하는 것에 비유한다. Ibid., 389-390.

        물론 양심에 각성이 일어난 자들에게 공포 외의 다른 것, 즉 복음도 설교해야 함을 에드워즈는 인정한다. 예비 된 구주가 있는데 그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으며, 그가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서 계시므로 그들은 구주께로 와서 그를 영접하고 그 분에게 자기들의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Ibid., 391. 이 부분은 복음주의 설교의 원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양심의 각성 하에 있는 죄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위로가 제시되어야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현재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로 피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제시되어야 하지만 현재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베풀면 안 된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자기들 속에 있는 어떤 것들, 기도라든지,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공로라든지 하는 것들이 위로받을 자격을 제공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자격으로 생각하는 죄인들이 발견되면 목사들은 설령 그들의 공포가 크게 증가될지라도 그들로부터 그러한 거짓된 위로를 박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Ibid., 391.

        물론 에드워즈는 죄인들이 어떤 오해나 실수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자기 혼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가 유기된 자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함으로 일어난 공포는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서 비롯된 것이지 양심에 죄를 깊이 깨달음(conviction)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선을 그었다. Ibid., 39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양심의 눈을 열기 시작하실 때 목사들은 그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쇠가 달궈져 있을 때” 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모든 적합한 수단을 사용해서 죄를 깨닫고 양심이 각성되는 작업이 철저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러한 방식의 대응은 결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주 많은 경우 복된 결과가 매우 신속히 도출되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고뇌가 순수히 죄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라면 그로 인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했다. Ibid., 392.

        에드워즈는 비범한 현상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두 종류였다고 분석했다. 하나는 그들의 죄와 비참을 깨달아 커다란 고통 가운데 있는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신적 일들의 위대함, 경이로움 및 탁월함에 대한 달콤한 감각으로 압도된 부류였다. 고뇌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온전히 사용하고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극단적 고뇌 속에서 이성의 사용을 어느 정도라도 박탈당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고뇌 속에 있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 중에 지속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에드워즈는 증언했다. 그가 아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울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의 괴로움은 “순수히 죄에 대한 깨달음”(mere conviction)에서 비롯된 고통과 종류가 달랐고 드러나는 양상도 달랐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단지 진리가 아니라 성경이나 이성에 굴복하지 않는 망상들, 즉 “많은 헛된 그림자들과 관념들”이었다. Ibid., 264.

        당시 어떤 사람들은 육체에 미치는 비범한 영향을 경험한 사람들이 겪는 공포(terrors)가 단지 “겁(fright)을 먹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쓸데없고 이유없는 “겁”을 어떤 무시무시한 진리를 이해함으로 인해 생기는 아주 커다란 두려움 및 극단적 고통(distress)과 구별했다. “겁”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진실이 아닌 것에 의해 놀라는 것인데 에드워즈는 우울증의 경우 외에는 그러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다른 하나는 단지 어떤 끔찍한 외적 모양이나 소리에 의해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린아이같이 겁을 집어 먹는 경우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를 에드워즈는 본 적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 죄인들은 대개 다음의 것들을 표현한다고 에드워즈는 열거한다.

                그들의 지극히 사악함에 대한 큰 감각, 그들의 실제 죄악들의 무수함과 심각함,
                그들 마음의 무서운 오염, 적개심 및 패역함, 마음의 무서운 완악함과 강퍅함,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큰 죄가 있다는 감각, 그 죄에 대한 처벌의 무시무시함,
                아주 자주...영원한 비참의 무서운 구덩이에 대한 생생한 관념...그들을 손 안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지극히 분노하고 계신다는 생각, 그의 진노가
                그들에게 엄청나게 두려워 보이며...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참아 주시지
                않고 당장 끊어 버리시고...무서운 구덩이로 던져 버리실 커다란 위험을 인식한다. Ibid., 265.


        그러나 죄를 깨닫고 양심의 고통 중에 있는 죄인에게 그의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어야 한다는 원리에도 한 가지 예외는 있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그것은 우울증의 경우였다. 물론 그 경우조차도 진리 자체가 그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 주면 가끔 그들이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 하더라도 그의 죄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및 심판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을 상대로 할 때에 그렇다는 말이지 회중 전체를 상대로 할 때는 그러한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회중 속에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하나님 말씀의 가장 엄위한 진리를 공중에게 선포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당시 뉴잉글랜드에서는 우울증이 있는 어떤 사람들이 두렵게 하는(terrifying) 설교, 혹은 각성시키는(awakening) 설교를 듣고 자살한 일들이 있었다. Ibid., 393.
그것은 기독교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성경의 엄숙한 사실들을 오용하여 자신을 해하는 일이 있으므로 그들에게서 성경을 압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에드워즈는 반박한다. 설교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엄위한 진리들을 최대한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했기 때문에 자살자들이 생겨났다고 설교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나 예수의 설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졌고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으며, 그들이 무서운 영벌에 처하게 되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에드워즈는 변명한다. Ibid., 393.
비록 어떤 이들이 각성시키는 설교를 오용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이 있었지만 그러한 일이 한 건 일어날 때 수백 수천의 사람들은 그 설교를 통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므로 각성시키는 설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확신이었다. Ibid., 393-394.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부흥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를 강조하고 그것도 격한 감정(pathos)과 열심(earnestness)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부흥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그렇게 무섭고 끝없는 고통의 지옥이 존재하며,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에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으며, 기독교 국가들의 대다수 사람                들이 그것의 무서움과 위험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적                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실제로 계속해서 거기에 빠져 들고 있다면, 영혼                에 대한 관심을 가진 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왜 부적절한가? Ibid., 246-247.


지옥에 대한 생생한 묘사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지옥의 형벌을 피하기 위한 주의를 기울이기를 소홀히 하는 자들에게 최대한 진실을 들려줌으로써 “최대한 생생한 방식으로 그의 비참과 위험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그에게 “가장 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에드워즈 및 그 동시대인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순진하게도) “일반적으로” 지옥의 실재를 믿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현대인들은 그것을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설교자들은 제 일차 대각성 시대의 순회 설교자들처럼 영원한 심판과 지옥에 대해 그렇게 절박하게 설교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율법의 공포에 대한 부흥 설교자들의 열정적인 외침을 에드워즈가 인정한다고 해서 오직 율법만을 설교해야 한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혀 있었다.  

                내가 오직 율법만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은 다른
                것들을 너무 적게 설교할지 모른다. 율법뿐 아니라 복음도 설교해야 한다.
                율법은 오직 복음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 설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설교자들의 주된 작업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다. 그리스도는
                의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만일 율법의 공포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그의 목적을 망각해 버리고 복음의 설교를 소홀히
                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그들은 아주 많은 것을 놓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아주 많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복음의 설교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Ibid., 248.


        에드워즈는 순회 설교자들의 그 열정적인 설교가 주제의 성격과 중요성에 부합되는 것이므로 “아름답다”고 찬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하는 내용과 방식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경우, 즉 소리를 지르거나 감정을 고조시킬 대목도 아닌데 공연히 목청을 돋우는 “점잖지 못한 떠들석함”(indecent boisterousness)은 곤란하다. “주제의 성격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열정만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회 설교자들에 대한 반대론들 중 하나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천국으로 향하게” (fright persons to heaven)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지옥의 가장자리에 서서 당장이라도 거기에 떨어질 수 있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지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에게 겁을 주어 불타고 있는 집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것이었다.

        현대 설교의 강조점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현대 전도자들은 죄인들에게 접근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혹은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고 말하여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와 호의, 그리고 구원의 의지를 먼저 소개한다. 그러나 17, 8세기의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대조적인 강조점과 함께 죄인들에게 접근했다. “하나님은 회심치 않은 당신에 대해 진노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보다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접근일까? 왜 이러한 복음 전도의 방법상 차이가 발생했을까? 혹 그것은 신학적 차이의 결과인가? 즉 제한적 속죄론을 믿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진노를 먼저 말할 수 밖에 없었을까? 현대적 전도 방법은, 제임스 패커 같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얄팍한 것이며 거짓 회심을 낳는 경향이 있는 것인 반면 청교도적 방식이 참된 회심을 낳는 것인가? 아니면 진노든 사랑이든 양자를 모두 말해야 하며 그 순서는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배타적으로 전하고 나머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불건전하고 왜곡된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만 주로 말하고 죄에 대한 그의 진노를 말하기를 꺼리는 현대의 설교는 균형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 대한 참된 인식과 비범한 신체적 반응
        신적이고 영원한 일들, 그리고 인간의 속성을 고려할 때, 또한 영혼과 육체의 연합의 법칙을 생각할 때 올바른 영향, 즉 사물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인식이 육체에 그러한 영향--몸에 힘이 다 빠진다든지, 커다란 고뇌에 빠진다든지,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든지 하는 아주 비상한 종류까지--을 미친다는 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일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지옥의 존재와 그 무서움은 아주 실재적인 것이었다.

                지옥의 비참은 너무나 무섭고 영원이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비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의 연약한 육신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
                커다란 위험 속에 처해 있으며, 자기가 거기서 구원을 얻을 것인지
                전적으로 불확실하며, 단 하루나 한 시간이라도 그것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Ibid., 231.


에드워즈를 비롯한 청교도들의 신학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엄연한 실재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는 “성난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에서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이매저리를 다시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커다란 구덩이 위에 걸려 있는 자신을 본다고 상상해 보라.
                그 구덩이는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들로 가득하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주 가늘고 약한 한오라기 실에 불과해서 그의 체중을 오래 감당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앞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러한 형편에
                처해 있다가 대부분 떨어져 멸망했다는 것을 안다. 자기 손 닿는 곳에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붙잡을 어떤 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고뇌가
                어떠하겠는가?” Ibid.


이럴 때에 진노하신 하나님이 당장에라도 그를 떨어뜨리실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비참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울부짖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극히 일부라도 영혼에 현시될 때 인간의 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Ibid., 232.

        죄와 진노 및 심판에 대한 인식이 육체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라고 에드워즈는 판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함, 죽기까지 하신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참된 감각”이 육체의 힘을 소진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Ibid.
어떤 사람들은 신약 성경에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이유로 그 비상한 현상에 반대한다는 것을 에드워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신약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 울거나 신음하거나 탄식했다는 기록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의 죄의식(conviction)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은 자가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인간의 본성과 영원한 일들의 속성,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죄의식의 속성을 볼 때 성경이 그러한 외적이고 주변적인 것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의 움직임의 모든 외적이고 부수적인 표현들에 대해 성경이 일일이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처럼 주변적인 상황들이 거룩한 역사 속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가진 일반적 기록에 비추어, 그러한 일들이 그 시절에 있었다고 생각할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판단이었다. 또한 그 당시 그 위대한 성령의 부으심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신체에 비상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혼란과 무질서?
        어떤 이들은 이상과 같은 일들을 커다란 혼란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고전14:33)는 것이었다. 종교에 대해 많은 잡음(소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말도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한다. 관심이 많고 강한 감정을 느끼며 정신이 몰두해 있는 일에 대해 현저하고 가시적이며 공개적인 소동을 사람들이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적이고 영원한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무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사람이 그로 인해 단지 미지근하게 감동되고 감격되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오히려 반문한다. “창세 이후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크게 감동을 받아 마음이 움직였을 때 소란이나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도대체 혼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목적 달성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conviction)과 죄인들의 회심은 종교적 수단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물론 비상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그러한 외적 표현들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에드워즈는 인정했다. 엄숙한 예배 시간에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하는 단서를 붙이면서 에드워즈는 정통적 개혁주의자로서는 놀라운 개방성을 보여 주는 발언을 이어 간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치기를 기뻐하신 결과로 그들이 커다란 외적
                표현(great outward manifestations)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이 참석하고
                있던 공적 수단들(public means: 예배 등의 회집을 말함, 필자주)을 다소 침범하고
                (interfere) 깨뜨리는(break off)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혼란이나
                불행한 침범이라 생각지 않는다. Ibid., 267. 물론 어떤 이들은 예배가 단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사고라고 반발할 것이다. 예배의 보다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비유컨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느라 들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세찬 소나기가 쏟아져 그들이 더 이상 기도회를 갖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을 혼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만일 그것이 혼란이라면 “당장 다음 주일에라도 이 땅의 모든 회집들이 그러한 혼란으로 인해 공적 모임을 중단하게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그는 장담했다. 보물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사람은 여행 중에 그 보물을 찾았기 때문에 여행이 중단된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Ibid.,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이 너무 구원론에 치우쳤다는 주장을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저술들에는 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예배 의무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 의무        
        에드워즈는 도덕적 의무가 종교의 외적 형식적 의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점은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주 가치 있는 지적으로 보인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배와 집회 참석, 기도, 설교, 찬양 등의 외적 종교적 의무 수행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거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쳐 온 반면 대사회적, 혹은 대인 관계의 윤리적인 의무에 대해서는 별 인식도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외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의무들"이다. 구체적으로, “의, 진리, 온유, 용서 그리고 사랑과 같은 행위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에드워즈는 예수께서 이러한 취지로 동일한 구약 본문을 두 번씩이나 인용했다고 지적한다.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9:13; 마11:7).” ST, 522
에드워즈에 의하면, “기독교의 모든 의무들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내적 행위들과 원리들” 혹은 “마음의 예배”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 등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적 신앙의 두 가지 외적 표현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것은 첫째 외적 예배 행위들이요 둘째는 도덕적 계명들에 대한 순종이다. 외적 예배 행위들 가운데에는 종교 집회에의 참석, 성례나 다른 외적 제도들에 참여하는 것, 절이나 그 앞에 무릎을 꿇는 행동, 혹은 그 분을 찬양하거나 높이는 말을 하는 것 등이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되 인간들 사이의 우리 처신에서 자기 부인, 의, 온유, 기독교적 사랑 같은 그의 도덕적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두 번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에 비하면 하나님은 전자에 대해서는 거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반면 후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넘치도록 더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 두 종류의 의무들이 함께 언급될 때면 후자가 어김없이 크게 선호 된다(사1:12-18; 58:5-7; 암5:21; 믹6:7-8; 슥7:1-10; 렘2:1-7; 마19:3). 성경이 우리더러 행함에 의해 믿음을 증명하라고 요청할 때 그것은 주로 후자를 의미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또 마지막 심판 날 우리는 후자의 행위에 의해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ST 522-3.
  
        에드워즈는 성경의 대가답게 이 점과 관련된 주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사회가 아주 부패했을 때 사람들은 종교의 외적 의무 이행에는 아주 열심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 이행에 있어서는 항상 아주 부족했다(사58:1-4; 렘6:13, 20).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위선자들과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들”은 대개 후자보다는 전자 쪽의 의무 이행에 훨씬 더 열심이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이를테면 바리세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마23:14, 25, 34). 말과 제스쳐와 외적 형식에 있어 예배의 행위들은 그것들이 다른 어떤 것의 표시, 즉 “내적 예배의 고백”(a profession of inward worship)으로서가 아니면 거의 소용이 없다고 에드워즈는 믿었다. 비록 말뿐 아니라 행위도 위선적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그 자체로서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과 이웃들에게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께 유익한” 어떤 일을 함으로써 일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유익한 일들을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확대된다는 것이다. ST, 523-524.

        에드워즈는 도덕적 의무들의 수행이 하나님에게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그 속에 더 큰 자기 부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 제스쳐, 말과 소리들로 이루어지는 외적 예배 행위들은 “기독교의 가장 값싼” 부분이며 “우리의 정욕에 가장 덜 반대되는” 것이다. 사악한 자들은 모든 형식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서도 얼마든지 “탐욕, 교만, 악의, 시기, 복수, 관능성, 육욕”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의 교회에 영광스러운 부흥이 도래하는 기미가 보일 때 하나님은 특별히 신앙고백하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 도덕적 의무들을 행하게 하신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예를 들면 “공의를 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라”(사56:1)와 같은 말씀들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때에 특별히 “자선” 혹은 “구제” 행위에 힘을 써야 한다. ST 524.
  

나가면서
        에드워즈의 가장 큰 탁월성은 신앙에 있어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점에 있다. 깊은 경건과 예리한 지성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경우라는 것이다. 대체로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는 가슴마저 싸늘하기 쉽고 감성이 발달된 신자는 지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양면 모두에 있어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 점에서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흠모할만한 모범을 제공한다. 그는 천부적 지성으로써 신학적 영적 진리들을 해부했다. 참으로 그는 면도날 같은 분석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신학적 작업을 단지 이성의 능력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 그의 저술과 설교의 대다수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직접 맛보고 깨닫고 감동받은 체험의 뒷받침 속에서 그는 성경의 계시와 진리들을 가르치고 제시했다. 그는 어떤 사역자들처럼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나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나고 느끼고 누린 그리스도를 가장 명석한 사고와 정확한 언어로 표현했다. 바로 그 점이 에드워즈의 독보적인 탁월성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의 사역은 당대에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후대 교회에 영속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전집 수십 권이 예일 대학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대학들에서 출판되고, 그의 생애와 저술들이 저명한 대학들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뿐 아니라 정상급 학자들의 연구 주제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영성과 지성 양자 모두에 있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한 에드워즈의 독특성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평생은 일관성이 있다. 그는 20세 무렵에 자기 뉴잉글랜드 조상들과 같은 “단계와 방식”을 따른 회심을 체험하는 데 평생의 주안점을 두기로 결심했다. 즉 단순히 교리를 수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다른 말로는 구원을 얻고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자기 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우선 순위를 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호한 결심과 진지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의 비범한 종교적 깨달음 혹은 은혜의 체험은 그가 쓴 「개인적 진술」에 담겨 있다. 회심을 체험하고 구원을 확신한 후 그는 이제 목사로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체험적 신앙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체험적 회심을 설교했다. 이 점에서 기독교 교리적 지식과 그것에 대한 동의, 특별한 흠 없는 생활, 성례의 참여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면 구원받은 것으로 보던 칼빈이나 자기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러나 어떤 때는 칼빈도 단순히 외적 교리적 동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믿음을 논하는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내적 확신”이며 “성령의 증거”를 요하는 것이란 점을 강조함으로써 단순한 교리 체계에 대한 수락과 동의, 즉 지적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굳이 그것을 조화시키려면 외적 요소들은 단지 지상 교회의 멤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했고 내적 확신 내지 성령의 증거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요소들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시적 교회의 회원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칼빈의 주장에는 아무 상충이 없다.
그는 많은 설교를 통해 “구도의 교리”를 가르쳤다. 일면 “준비론”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견해는 인간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전에 죄를 확실히 깨닫고(conviction of sin)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humiliation) 한다는 것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단지 복음에 대한 이론적 지식만으로 참된 믿음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는 그 지식, 혹은 교리 위에 성령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그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복음을 믿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조건은 자신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죄인이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정말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정죄하시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정의로운 행동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제를 덤덤하게 수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참으로 믿을 수 있으려면 “신적 초자연적 빛”이 그의 영혼에 비치어 그가 구주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야 한다. “영적 눈”이 열려 복음의 진리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영적 이해”이며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영적 지식”으로 일종의 “체험”이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영적 감각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감지되는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도 회심이 지적 동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19세기 이후 복음주의의 보편적 추세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의지적 수용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에 덧붙여 그것을 의지적으로 수락한 것조차도 구원 얻는 믿음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봉자로서 인간이 구원의 은혜를 자기 결단에 의해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영적 “개안”의 체험 없이 단지 “결단”만으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 교리를 에드워즈는 부정했다. “그냥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게 해 주시는” 은혜, 즉 신적 빛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초청이나 영접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이 참으로 믿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신적 초자연적 빛이 비취어야 사람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고 그 빛은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단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요소 외에 감정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즉 복음에 대한 전인격적인 이해와 수용이 회심의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감정적 이해는 바로 영적 “체험”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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