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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료나눔

스펄젼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글

김재윤 | 2004.01.19 23:11
제2장
삼위 하나님

그리스도의 조화로운 성품

우리 주님의 성품을 가만히 묵상해 보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기질이 우세하거나 두드러지는 일이 없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 자신에게만 강하고 특유한 기질이 응집해 있어서 베드로의 한 특성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하나의 아름다운 성품이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그의 다른 장점들이나 품위 있는 특성들은 관찰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의 성품 중 어떤 덕이 가장 순수하게 두드러지며 빛나는가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뿐더러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주님의 인격은 마치 고전이 아니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각각의 특성 하나 하나가 나머지 전체와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일 당신이 고전미를 드러낸 작품을 본다면 아마도 전체적으로 빈틈없는 그 미적 감각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짝이는 눈이라 든다 혹은 세워진 코나 산호 같은 입술이니 등등으로 따로 분리시켜서 작품의 우수함을 말할 수 없게 된다. 각 부분을 서로 나누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미에서 얻는 감명이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이와 같은 완성된 성품은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 안에도 이루어야 될 성품이다. 가장 희귀한 향기를 발하기 위해 모든 좋은 향기들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찾고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허락하시는 성품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의 성품은 한 마디로 묘사되지 않는다. 요한 이나 베드로, 혹은 바울의 인격의 특징들은 우리가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특이한 양태를 지니지만, 주님의 인격은 우리의 묘사력으로는 그릴 수가 없는. 측량할 수조차 없는 성품을 지니고 계신다. 그에게는 뛰어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이 있으며,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며 각 부분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어져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도 사모하고 닮아가야 할 것이다. 영원한 우리의 훈련과 싸움의 목표도 주님의 이 성품을 우리의 인격 속에 이루는 것이다.

내 영혼의 기쁨 그리스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해 설교할 때 대학에서 배운 것이나 혹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재료로 하여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설교는 내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한다. 내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쁨의 원인과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또한 경험하였던 것들에 대해 설교한다. 몇 년 전에 나는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였으나 심한 죄의식 때문에 나의 마음은 늘 무거웠고 두려움 때문에 분열되곤 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할 때는 혼자 골방으로 달려가 울며 기도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을 가졌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께서는 어떤 죄일지라도 그에게 나아와 믿는 자에게 사해 주시는 은혜가 넘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복음을 듣자마자 구세주께 나를 의뢰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욱더 나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내 영혼의 온갖 짐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 사역 아래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깊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체험한 바로는 나의 영혼의 짐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빛보다 더 빨리 어둠과 절망에서 헤어 나왔으며 기쁨이나를 휘감았다. 그 시간 이후로 하나님은 상처 입고 절망에 빠진 영혼은 누구든지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기뻐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기쁨으로 살아갈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가장 나약했던 나의 인격이 강하여졌고 무분별하게 타오르던 정열도 차츰 사라져 갔다. 나의 기질들은 점점 안정되어졌고 대신 새로운 삶의 원리들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나는 변한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다 망가져서 다시 새롭게 갈아 끼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보증을 설 필요조차 없을 만큼 확실하다. 하나님은 날 위해서 실로 엄청난 일을 하셨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신다. 그를 찾는 모든 이를 위해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보여 주실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마음과 바른 영혼이 있다. 나는 체험하였고 또 알고 있다. 그것은 마치 죽음 속에 완전한 행복이 있고 이별 속에 그리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히 무엇인지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으며 또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증언을 의심할 것인가. 아마 나의 진실을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참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인격이 올바르다면, 그리고 당신이 내가 진실을 말하는 줄 안다면, 나의 증언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싶다. 이런 간증을 좀 더 사려깊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내 영혼의 모든 열망을 다해 진실하게만 말하고 싶다. 당신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 지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십자가에 달리 사 승천하신 주님의 피와 공적을 의지하는 것만큼 복된 일이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불가사의

어떤 사색가들은 예정론이나 자유의지 같은, 유익보다는 혼동을 일으키는 주제에 집착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그 어두운 불가사의한 문데,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 예정해 놓으셨으며 이성을 가진 인간은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 등의 물음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밀턴은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악마들과 천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그 수수께끼를 푸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불가사의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위로를 앎으로써 우리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위로 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과 그리고 그 분의 자비와 공의에 대항할 만한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사실이다.

죄인의 무감각

만일 당신이 어떤 장소에서든 죽은 사람을 건드리거나 찔러 보면 시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죽었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와 같다. 그들은 시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할지라도 그들이 보이는 반응이란 피상적이고 금방 사라질 뿐, 다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제 길로 돌아갈 뿐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생명을 버린 피 흘린 사랑이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얘깃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교자가 아무리 천둥소리와 같은 어조로 명령과 경고를 할지라도, 심지어 하나님께서 몸소 크고 두려운 음성을 들려주신다 할지라도, 숲과 바위들은 떨리는 반면 완고한 인간의 심령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 신앙 가운데는 반항적인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곧 도래한다고 경고를 해도 소용이 없다. 설교 가들의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될 만한 용어로 경각시키는 메시지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지혜롭고 아름답게 전한다 하더라도 귀머거리는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로 나아가 탄식하는 것이다. "주여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으오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나나이까." 너무도 끔찍한 무감각 속에 자연인의 마음은 푹 빠져있다. 그러나 죄라는 독성에 철저히 중독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치유하기 위해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날마다 성도들의 마음 문 밖에서 "내게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 다오!"라고 외치시고 계신다.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려는가.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며, 이제는 또 우리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마음의 문을 열 것을 간곡히 원하시고 계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혼 속에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라. 그래서 그대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마음을 비워 드리며 주권을 내어 드려라. 주의 약속의 말씀들은, 우리가 대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노크 소리와도 같다. 주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서 이 약속들을 나와 함께 누리자. 이 모든 것은 다 너희를 위한 약속이 아니냐. 또한 이 약속은 이미 내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더냐." 성경 말씀 속에 있는 많은 경고들과 권고의 말씀도 알고 보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노크소리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외적인 환경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임하는 가장 큰 은혜도 바로 이 노크 소리가 아니겠는가. 강압적으로 물건을 다루듯이 우리를 대하시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진심 어린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시기 위해 지금도 주님은 오해 참고 계시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이 은혜를 받아 누려라. 그리고 너의 진심을 내게 다오! 이 모든 축복은 널 위해 내가 주는 것이니 네 마음을 나를 햔해 열어 놓아라" 우리가 당하고 부딪히는 온갖 괴로움도 어떻게 보면, 우리의 속마음을 여시려는 주님의 간절하신 열심히 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모든 재산과 육신을 소모해 버리는 질병, 부러진 뼈, 폐결핵에 걸린 어린 딸,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녀들, 집의 화재, 파산한 배 그리고 부도가 난 수표 등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음성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기쁨이 될 수가 없다. 이 썩어질 것들에서 너희를 위로할 만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너희의 생을 보증할 만한 것이라곤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다. 오직 나만이 너희의 삶의 근거이며 원동력이다. 왜냐하면 나로 인해 너희가 살았고 너를 먹고살도록 새롭게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너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를 중심에 모셔들여라. 나 이외에 신이 된 이 모든 우상들을 내가 깨뜨려 버렸다. 그것들로부터 오는 일시적인 즐거움도 내가 끊어 버렸으니 나에게 너희의 진심을 바쳐라. 그리고 내가 주는 위로와 평안을 받아 누려라." 이런 주님의 노크 소리가 당신에게는 하찮게 보일른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너무 굳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시며 영원토록 우리의 신랑 되시는 분에 관하여 우린 너무 인색하고 무관심하다. 그래서 주님은 늘 우리의 문 밖에서 선 채로 밤을 지새우며 문을 두드리시고 또 두드리신다. 때로는 고난으로, 혹은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음성을 발하시나 여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능력에는 썰물과 밀물과 같은 변화가 없다. 일단 간섭하시면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는 그 손 안에 그 전능성이 있다. 오, 만일 우리가 그 전능함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역지에 대장이신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자기 교회를 위해 싸우시고, 자기의 종들 곁에서 사역하도록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놀랄 만한 기적들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는 결코 궁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궁핍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난이 주는 자유함

쓴 키니네 한 모금으로 열이 사라지는 것처럼 쓰디쓴 고통의 잔은 우리의 솟구치는 자존심과 세속 성을 꾸짖는 역할을 한다. 만일 고난이 우리를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기준 이상으로 높일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투하시어 대적하도록 자극하게 될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살아온 길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이 타고난 죄악인지 더러운 부패 성향, 저주스러운 타락성과 우리가 길러온 증오스러운 정욕들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고난의 사나운 길을 따라 계속해서 던져짐으로써 이것들의 참된 실체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에 속한 죄악의 병폐들로부터 잘라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예리한 칼날인 것이다. 이 두 개의 날을 가진 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들과 우리 안에서 잠복해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성들을 깨끗이 도려내시는 것이다.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이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쉬우나 고난에 처하면서부터 죄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바로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시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죄악의 부자 유로부터 자유 함을 회복하게 된다.
성도의 모든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기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도 기적에 의해서였다. 또한 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어 구원하신 것도 기적이었다. 그의 배와 관련된 것 역시 기적이 대부분인데, 배에서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던져 수많은 고기가 잡혀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된 것도 기적에 의해서였다. 그의 성난 검이 제사장의 하인의 귀를 떨어뜨려서 주께서 다시 만지심으로 고쳐진 기적도 있었고 그의 장모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으로 열병에서 회복되기도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연결되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집을 바라볼 때 집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입을 옷을 생각할 때는 그것들이 사랑의 의복으로 보일 것이며 매일의 양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신물로서 감사의 제목이 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회고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불타오르고 가장 낮은 환경조차도 아름답게 빛나도록 만든 환한 부분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친척과의 관계 속에 두드러지도록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 중 각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그를 회복하셨어"라는 말이나, 혹은 "주께서 그에게 영생을 주시어 내 기도를 들으셨어"라는 고백이 있도록 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 아디들, 하인들 모두가 '사랑하시는 의사'로부터 치유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가족들이 '주께 거룩함'이 되게 하소서! 또한 모두가 주께서 위대한, 광대한 일을 행하셨기에 기뻐하며 찬양토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소서! 아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며 두 날 가진 어떤 칼보다 더 예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거듭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거나 묵상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불같은 뜨거움을 불러일으키신다. 처음엔 우리에게 단지 문자에 불과한 성경 말씀이었지만, 거룩한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로잡으시면 그것은 혀가 되어 우리의 심령 속에 말을 하기 시작한다. 성경 속에 사건은 호렙산의 메마른 떨기나무같이 초라하고 별로 대단한 관심을 일으키지 않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면, 보라! 그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처럼 천국의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신발을 벗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세의 심정이 되어 감동과 경외하는 마음을 지닌다.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평범한 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진실인 것은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 마치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주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이 성경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느끼게 된다. 가끔씩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정으로 보여진다. 성전 문의 기둥들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진동되고 주의 사자들이 성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천사들과 함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도다"라고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에 권두 삽화처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기에 계신다. 이 성경이야말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의 문이다." 정말 그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진실로 성경은 영혼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보배롭고 아름다운 돌로 장식하여 안팎을 순수한 금으로 싼 곳으로 하나님의 실존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가장 거룩한 거처이다. 이 때문에 제사장들은 자주 성전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서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로 문자들을 살아 있게 하시며 또한 실제로 우리에게 산 말씀이 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아주 이상하면서도 또한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이 말을 마음에 깊이 묵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을 참으실 수가 없으시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이 무자비한 질투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태양은 지정된 시각이면 낮이라는 문으로 나타나 땅을 밝히기 시작한다. 정확히 그대로, 셋째날 아침 일찍이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는 잠에서 깨어나셨고 거기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무덤 앞에 있는 바위를 굴러뜨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의의 태양이 일어나신 것이다. 위대한 신랑께서 그의 방에서 나와 그 즐거운 행진을 시작하였다. 부활하신 구세주를 바라보는 것은 황홀한 광경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발 앞에서 자세히 보고 그를 경배했을 것이다. 생각건대, 만일 천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부활의 첫 아침, 거룩하신 승리자 예수님께서 죽음의 억압에서 일어나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본 그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더 이상 숨기지 않으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여태껏 밝히지 않았던 그 불가사의한 사건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조차 되어지지 않았던 그 일들이 모두 주님에 의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주께서 방에서 나오는 주님의 시간(때)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비록 명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미리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과 아버지에 관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나그네처럼 여행할 때 자신을 숨기시던 일을 포기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명령하시며 친구로서 가까이 하신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 성전의 지성소 베일이 찢어졌고 그가 부활하시자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이 영광과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 나아 오셨다. 얼마 동안 그는 사라지셨지만 곧 비밀스러운 상아궁의 방에서 돌아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보이셨다. 그날에 주를 보는 모든 눈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버려진 자의 구세주,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척된 자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가족들 가운데서도 잊어버린 바 된 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 어머니의 가슴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 되고 아버지의 뺨엔 노기를 띠게 하는 것이 돼 버렸다. 그들은 어떤 훌륭한 사회 속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다. 그들은 낙인찍힌 남자와 내놓은 여자가 돼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 땅의 법 앞에서조차 소외된 자들이 있다. 정의의 손이 그들 위에 내려지고 법의 구속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실로 중죄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사회적으로 배척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찾아오신다. 사회의 문이 그들을 향해 닫혀질 때 하나님의 은혜의 문은 오히려 열린다. 사람들이 전혀 희망이 없는 경우라고 입을 모으고 병균이 옮지 않기 위해 문둥병 환자들을 격리하며 외면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시며 환부를 만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문 밖에서 내 쫓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불러들이신다. 그들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방탕의 끝이 다하여 그들 스스로가 다 소모되어서 마침내 병들어 쓰러질 때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들어가시고 우리의 말씀으로 속삭여 주신다. 고통과 괴로움에 의해 더 큰 관심을 표현하시며 불속에서 그들을 끄집어내어 은혜의 영광의 자리로 그들을 옮기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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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펄젼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글 김재윤 2004.01.1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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