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셀러
목회의 본질과 그 진지함을 나누는 책
신간을 서평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난 책을 살피는 일도 소중한 일이라 생각해서 번역된 지 10년이 넘은 묵은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다시 읽어야할 책을 책장에 따로 구분해 놓는다. 그 책들은 틈이 날 때마다 몇 번이고 뒤적여 본다. 영화에 미친 사람은 많은 영화를 본 사람이 아니라 영화 하나에 며칠이고 빠져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의 눈은 화면에 비친 영상이 아니라 카메라 앵글을 따라가며 감독의 마음을 읽는다. 책도 마찬가지이리라. 어느 날 성경 책 한 권만을 들고 작은 섬으로 떠나버린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처럼 서탐(書貪)에서 벗어나 오직 한 권의 책을 들고 떠날 수 있다면 그 책 중의 하나가 이 책이 아닐까 싶다.
내가 유진 피터슨(이하 유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교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해서가 아니다. 목회자들의 심성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우리 안에 있는 개인의 야망과 목회적 소명을 구별해 내서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진의 힘은 성경을 읽어내는 통찰과 그것에 바탕을 둔 목회적 진지함에 있다. 내 책읽기의 편협이나 부족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만큼 목회 본질에 다가선 내용을 찾아보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불투명하고 어둡다는 진단은 이제 흔해 빠진 이야기가 되었다. 교회와 관련된 각종 조사와 수치를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위기감마저 둔해진 지금 절실한 것은 또 하나의 비판이나 분석이 아니라 목회의 본질과 그 진지함에 눈을 돌리는 일이다.
이 책은 요나서에 대한 유진의 해석이다. 그는 사명자였던 요나를 통해 목회자들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목회적 야망을 모조리 긁어낸다. 그 목회적 야망은 이상적 항구도시 ‘다시스’로 번역된다. 욥바로부터 3500km나 떨어져 있는 스페인의 항구도시 다시스는 세상의 금은보화가 가득해서 내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왕상10:22). 유진에게 다시스는 단순히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하려 한 곳이 아니라 사명자들의 가슴에 꿈틀대는 야망의 공간이다. ‘더 좋은 목회를 위해’,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 돌리기 위해’ 등등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우리가 꿈꾸는 도시이다. 오래 전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정주서원(定住誓願)’을 하였다. 5-6세기 당시 많은 구도자들이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 더 좋은 스승과 더 완전한 수도원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정해진 장소에 우직하게 머무는 것을 통해, 그 곳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어떠한 상황과 환경의 동요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이 바로 정주하는 삶이고, 그런 삶을 서약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4)고 하시지 않았던가. 한 곳에서 영혼을 살피는 안정된 시선을 잃어버리고 다시스로 떠나는 순간 교인들은 목회의 단순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유진은 ‘그들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주어진 목회자였다’고 고백한다.
“모든 교인들은 거룩하게 만들어진 영혼들이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한 거처로 정하셨다. 내가 그 현장에 도착하기 오래 전에, 이미 성령님이 거기에서 활동하고 계셨다. 나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역에 나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유진은 교인을 살피고 심방하는 일을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만큼 정성을 기울인다. 가정을 심방하든, 병원을 심방하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먼저 갈릴리로 가셨듯이 앞서 그곳에 계심을 믿으며 그 분께서 무엇을 행하시며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에 귀를 기울인다. 유진의 목회는 내 사역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심방의 중심을 나에게서 주님께로, 성령께로 옮기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고, 우선 심방기도를 심방을 받는 당사자가 하도록 권했다. 익숙지 않은 일이어서 교인들이 의아해 했지만 자신과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종종 그들의 마음과 입술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 심방에서 느낄 수 없는 은혜였다. 내가 도착하기 전 이미 저 분의 심령 속에서, 그리고 이 가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유진은 목회자가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물러서는 목회’를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비켜설 줄 아는 목회’ 말이다. 나는 이 대목이 책의 백미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야망을 향해 달리는 이들에게 기도와 묵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머물던 3일의 시간이다. 유진은 이것을 ‘아스케시스(경건훈련)’란 말로 표현한다.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공간이다. 기도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영혼의 호흡이다. 다니엘은 그 숨결 같은 기도를 중단할 수 없어서 차라리 사자 굴에 던져지는 쪽을 택하지 않았던가. 기도와 묵상은 ‘니느웨’라는 특정한 사역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한다. 유진도 사역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자신의 사역을 유지하기 위한 쓰레기 같은 일로 여겼다. 우리로 말하면 이런 일들이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음 지으며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물으며, 연세 드신 어르신들을 부축하고, 예배 순서자를 미리 확인하고,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편집하고, 예배 후 불편하신 분들을 댁에 모셔드리고 하는 일들 말이다. 그런데 유진은 사역을 위해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 같은 항목들이 거룩함의 재료임를 깨닫는다.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소그룹을 인도하는 일들에 비해 하찮게 여겼던 일들이다. 그 일들은 니느웨에 있고, 좌우 분변을 하지 못하는 십 이만명이 모여 사는 니느웨 사역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도 다시 니느웨로 걸음을 돌이켜야겠다. 설교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새벽마다 휜 허리로 폐지를 모으시는 권사님께 따뜻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