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동수1999-2002년 서울 방배동 기독신학교에서 M.Div.를 수학하고, 2002-2004년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Th.M.으로 조직신학(칼빈연구)을 전공, 2004-2010년까지 미국 휘튼대학원 성경.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할 때까지 개혁신학과 칼빈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시카고 지역에서 한인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담임목회 및 도시선교 등을 섬겨왔으며, 학교와 목회, 그리고 이민생활 현장에서 고민하며 묵상한 에세이와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의미있는 개혁파 신학/신앙 관련 서평 등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의 영성

신동수 | 2016.10.28 08:39
들어가는 말: 개혁신학의 영성

우리가 신학(theology)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theo+logy)”이며, 근본적으로는 성경해석을 통해 집약된 가르침(dogma)을 종합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 신학의 원천과 주 자료는 성경이라 할 것입니다. 물론 현대 조직신학의 경향이 성경 이외의 것, 소위 철학적 사조나 시대적 담론과 씨름하며 진행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러한 신학 조차도 성경을 떠나서 이야기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 가운데서도 개혁신학은 스위스 개혁가 쯔빙글리와 불린저로 부터 시작하여 2세대 종교개혁가들 중 한 분인 존 칼빈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개신교 신학입니다. 다른 모든 신학도 그러할 것이지만, 특별히 칼빈주의 개혁신학은 “성경중심의 신학”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가르침을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바른 가르침 위에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개혁파 조직신학의 원조로 꼽히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559년판 서론에 보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칠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대표적인 책 “기독교강요”의 목적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는 것이 의미심장 합니다. 칼빈은 이런 관점에서 그의 신학을 철저히 성경 주석을 기초로 행했습니다. 그의 신학을 이어 받은 개혁파의 후예들은, 그래서, 늘 성경을 중심으로 성경말씀을 충실히 드러내고 그 뜻을 구현하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아왔습니다.

개혁파 칼빈주의의 목사로서 제가 이해하는 “개혁신학의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것을 배우고 익힌 후에 성경의 분별력과 균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 날까지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개혁신학의 영성”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성경 전체의 사상을 다 이야기 할 수 없기에, 이 특강에서는 몇 가지 “개혁신학에서 특별히 부각되는 영성의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빙산의 일각이지만 개혁파 영성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초월과 내재의 영성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들이 나옵니다 (엘로힘, 야훼, 아도나이, 엘 샤다이 등등). 그 이름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창조주, 권능의 주, 심판의 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구원주, 언약의 주, 용서하시는 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단들의 오류는, 하나님의 한쪽 면만을 보고 신의 속성의 일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2세기 말시온이라는 이단의 지도자는, 참 신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신” 인데 왜 구약에 나오는 무자비하고 죽이는 신을 하나님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구약은 성경에서 빼 버리고 심지어 신약에서도 율법을 옹호하며 엄격한 하나님을 제시하는 듯한 공관복음서와, 히브리서, 유다서 등을 다 빼버린 “말시온 판 성경” 을 만들어 베포했습니다. 균형을 잃은 것이죠. 균형을 잃으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개혁파 신학은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 속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여 균형잡힌 신앙과 영성을 추구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우리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롬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작정, 예정, 섭리) 앞에 사람이 감히 할 말이 없습니다. 롬9:20에서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 용어로 하나님의 초월성(God’s Transcendence)이라고 합니다. 16세기 루터는 이러한 초월적 하나님의 속성을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칼빈주의 개혁파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불가해성” 혹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본질을 알 수 없고 그 성품도 다 알 길이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속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마서의 서두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우리가 하나님을 능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으로도 알고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에 아무도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자기 백성이 물으면 답하시고,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고, 약속하심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매어 두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하나님의 내재성(God’s Immanence)이라고 합니다.

개혁신학은 이 상충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균형을 추구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내재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신의 성품이 초월성에만 머문다면 저 높은 하늘에만 머무는 알 수 없는 신이 되어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무자비한 공포만을 유발하는 신이 될 것입니다 (절대적 초월신). 또한, 만약 신의 성품이 내재성에만 천착한다면, 인간처럼 일희일비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못 미더운 신이 될 것입니다 (올림푸스의 신들, 혹은 무당의 만신). 다시 말씀 드리지만, 개혁신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균형잡힌 속성을 밝히고, 우리의 신앙을 균형있게– 초월하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외심과 내재하신 하나님의 친근함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 함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이런 성경적, 신학적 균형을 잃을 때, 분명 문제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 엄위하심, 엄격함을 강조하며, 그러한 영성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율법적이 되기 쉽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과거, 경건주의와 청교도에서 그러한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청교도의 마지막 후예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 에 매우 천착하였기 때문에 성도들이 너무 힘들어 했던 측면이 있거든요. 물론, 그들이 다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초월성에 대한 편견은 그런 결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섬겨야 할 분이시지만 우리와 언약을 맺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동행하시며, 무한히 선대하는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도 오류가 생기기 쉽습니다. 특별히, 어떤 크리스챤들은 성령 하나님을 강조하여, 늘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나에게만 - 방언과 능력을 주시고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 되게 하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내재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만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약해지면서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개인적 독선과 비도덕적 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할 때,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내재성만을 강조하면 그런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늘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 사이의 균형을 늘 의식하며 잊지 말아야 참된 영성을 갖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하심이 내 삶에 임하여 올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은 또한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감당해 주시는 하나님” 으로 기억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잘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달콤한 사탕처럼 달달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천지의 주재시며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하시며 악을 미워하시고 징벌하시는 하나님” 이신가를 즉각적으로 기억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학의 영성입니다.

2. 은혜와 진리의 영성

“초월과 내재” 의 문제는 실제적인 우리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은혜와 진리”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은혜를 시행하려 하면 진리가 서지 않고 진리를 시행하려 하면 은혜가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한 부류는 은혜로 덮고 가자고 하면서 사랑을 외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부류는 교회에는 엄연한 법이 있고 진리가 있으니 법대로 하자고 하면서 정의를 외칩니다. 누가 틀리고 누가 맞습니까? 은혜로 용서하고 덮자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법과 정의를 세워 진리를 수호하자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균형있는 개혁 신학의 영성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판단해 보면 둘 다 뭔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는 경우를 살펴 볼 때 그렇습니다.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라, 성경의 예를 먼저 들면, 사무엘하 13장에서 다윗은 자신의 장자 암논이 이복동생 다말을 강간했다는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일을 듣고 심히 불쾌히 여기기는 했으나(삼하 13:21), 암논을 불러다 율법대로 경책하고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일견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게 덮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공정함이 함께 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고전 13:6). 결국, 진리를 세우지 못한 다윗의 왜곡된 사랑은 다말의 친오라비 압살롬의 계획된 살해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후에는 그의 왕국이 전무후무한 부자상잔의 비극을 겪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법과 진리를 세우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은혜롭게 덮고자만 하면 치명적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역시 치명적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초막절이 지난 다음 날 아침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일견 진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간음과 같은 죄를 멸하여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하시는 의로운 뜻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분명 진리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었지만 그 진리를 사랑으로 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진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길 때,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며 법과 정의를 외치는 분들에게서 사람을 살리는 정의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치명적 정의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진리는 갖추었지만 은혜는 상실한 바리새인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가 없는 은혜는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은혜가 없는 진리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은혜와 진리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영성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결국은 그 여자의 죄는 돌로 쳐서 도말해야 하는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의와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신 의와 진리는 사랑 가운데 시행되는 진리였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못하도록 깨우쳐 주시면서 죄 없으신 당신조차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진리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자를 죽이려고 정의와 진리를 세웠지만, 예수님은 죄인된 여인을 살리기 위해 진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다, 저것은 하나님 앞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법과 진리를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으로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범한 당사자가 듣는 자리에서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종국에는 모든 사람의 죄인됨을 기억케 하시고, 그녀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고 하시며 은혜로 그녀를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은혜가 충만한 진리였고, 은혜는 진리가 충만한 은혜였던 것입니다. 개혁신학적으로 환언하자면, 은혜가 없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없는 은혜는 참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최근 시카고의 교계 분쟁을 살펴보면서 간혹 당혹스러운 부분은, “은혜롭게 하자”는 말로 무작정 덮고 가려다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야기되거나, 혹은 “법과 진리대로 하자”며 외치다가 결국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고 정죄하기 위한 법이 되는 경우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감춰진 채 은혜를 빙자하여 쉬쉬하면서 곪은 곳이 터지기까지 썩어가는 교회가 생기고, 은혜와 사랑은 식을 대로 식은 채 스스로 세운 정의와 법으로 정죄하고 면직과 출교를 시키고 결국은 갈라지는 교회가 생겨나는 문제가 바로 우리의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개혁신학적으로 균형 잡힌 영성은 우리 자신의 편협한 은혜관과 진리관을 반성하게 하고 교회를 다시 바른 가르침과 바른 실천 가운데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성

현대 교회를 살펴볼 때 우리는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교회들이 모두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는 심각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꼭 있어야 하나?” 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좀 괜찮은 교회만 있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라면 없어도 되는 “an optional support group” 정도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은, 교회가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는 문제집단인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스스로 폭군이 되어서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성도들을 제명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심지어는 법정에 고소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장로들은, 도대체, 목사가 교회에서 3년을 못 버티게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들 – 권사, 집사, 권찰이든 – 은 왜 이렇게 말들이 많고 고집스러운 것입니까?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교회쇼핑을 합니다. 마음에 맞는 교회 건물, 마음에 맞는 설교, 마음에 맞는 신앙 스타일을 찾아 이리 저리 기웃거립니다. 정말로 우리가 교회를 볼 때 답답합니다. 이게 교회인가? 어떻게 이런 모습이 교회일 수 있는가? 결국 많은 고민하는 크리스챤들에게 남은 길은 “그냥 모르는 채 하고 교회에 남아 있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 혼자 성경읽고 살던지” 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가견 교회 (visible church)” 요,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견 교회 (invisible church)” 입니다. 칼빈은, 보이지 않은 교회 즉 불가견 교회가 바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기독교강요], IV.1.7).

칼빈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 “선택 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눈에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교회, 즉 “가견 교회” 는 택자와 불택자가 함께 섞여 있는 교회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심지어,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교회 밖에도 양이 많고 교회 안에도 이리가 많다” 고 말합니다. 뒤틀리고 상하고 찢겨 냄새 나는 것은 “교회” 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개혁신앙의 영성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교회의 허물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교회는 원래 “이리가 넘쳐나는 곳” 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리의 굴이 아닌 이유는 또한 이 교회에 하나님의 완전한 교회, 즉 “보이지 않는 교회” 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이 보이는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이 교회와 “교통 해야”하고 “교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보이는 교회 안에 반드시 택자들이 분명히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뒤틀리고, 상하고, 찢겨 냄새나는 지경이지만, “교회” 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 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 이며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교회” 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예수님이 직접 세우셨으며, 성령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교회” 가 없으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신학의 영성을 가진 이들은 “교회” 를 사랑하고 “교회” 를 믿으며 “교회” 와 함께 살아갑니다. 교회에 과도히 실망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교회는 허물많고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붙드시는 “보이지 않는 참 교회” 가 있음을 믿고 우리는 교회를 지키고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영성으로 이 땅에 참으로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그 참된 보이지 않는 교회를 보이는 교회화 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

개혁신학의 영성은 성경적 영성, 종합과 균형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칫 우리의 신앙이 한 쪽으로 경도되고 매몰되기 쉬운 이 시대에, 개혁주의 영성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고 균형 있는 길로 돌아오게 한다고 믿습니다.

중부개혁신학교 조직신학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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