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신동수1999-2002년 서울 방배동 기독신학교에서 M.Div.를 수학하고, 2002-2004년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Th.M.으로 조직신학(칼빈연구)을 전공, 2004-2010년까지 미국 휘튼대학원 성경.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할 때까지 개혁신학과 칼빈신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시카고 지역에서 한인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담임목회 및 도시선교 등을 섬겨왔으며, 학교와 목회, 그리고 이민생활 현장에서 고민하며 묵상한 에세이와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의미있는 개혁파 신학/신앙 관련 서평 등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찰나(刹那)의 사역

신동수 | 2021.06.04 04:41
원목의 사역은 교회 사역과는 많이 다릅니다.
교회의 목회 사역은 여러 면에서 사람을 길게 보고 상대하는 인내의 사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목 사역은 일반적으로 병원에 입원한 동안만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원포인트 사역일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들어오는 수 많은 환자들을 돌보려면 장기 입원자가 아닌 이상 한 번의 방문조차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목 사역을 "찰나(刹那)의 사역"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스쳐 지나가듯 만나 안색을 살피고 대화를 나누는 그 순간, 그 찰나에, 환자의 깊은 정서적/영적 필요를 캐치하고 필요한 돌봄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목회적 돌봄 (pastoral care) 회진을 돌던 중, 얼굴이 낯익은 흑인 여성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50대 중반의 그녀는 거의 두 세달에 한 번씩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폐, 호흡기 질환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불과 2개월 전 간호사와 보조사들이 그녀의 몸과 병실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것 때문에 "끔찍하다" (?) 며 그녀 방에 들어가기를 꺼렸던 바로 그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방문하면 늘 손을 붙들고 기도해 드리고, 이 분이 좋아하는 성경책도 드리고, 무엇보다, 단어 퍼즐과 수도쿠가 있는 비매용 잡지도 하나씩 드렸거든요. 그래서 3-4 일 계시는 병원 생활이 즐겁다시며 입원을 하면 꼭 원목인 저를 불러다 기도를 받으시고는, 성경책과 퍼즐 잡지를 챙겨달라 하시던 분입니다.
그랬던 분이 또 2급 중환자실에 들어오셨더군요. 제가 이름을 확인하고 방문할 때 마침 CT 를 촬영하러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저를 알아보고 말을거니 이동을 돕던 조무사가 잠시 멈춰주었습니다. 그녀의 목에는 기관절개술 (Tracheotomy) 를 한 상태였고,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였고, 그녀가 숨을 쉬거나 말을 할 때마다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힘겹게 한 말은, "I love your visit with the puzzle book. Please, visit me later with it" 이었습니다.
몹시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과 피까지 흐르는 그녀의 목의 상태를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1년 전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마다 분명 훨씬 안 좋아졌고, 매 번 볼 때마다 조금씩 더 안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때가 마침 점심 시간을 앞둔 시간이었고, 그녀가 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오후에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 서재에서 퍼즐북을 꺼내어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오후에 그녀를 방문했어야 하는데... 항상 얘기치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마침, 기본적인 업무 외에 긴급상황을 처리하는 on-call 업무를 보고 있던 중이라 퇴근시간까지 쉼없이 울리는 페이지로 인해 짬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챙겨둔 퍼즐북을 가지고 준중환자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병실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환자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로 그녀의 챠트를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뿔사, 그녀는 금요일 새벽 12시30분에 심장마비로 code blue 상태에서 사투를 하다가 사망을 하였던 것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가져갔던 퍼즐북을 힘없이 책상 위에 떨어뜨리고 털썩 자리에 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허탈하였습니다. 나보다 다섯 살 밖에는 안 많은 누님인데... 아니, 뭐가 그리 급해서 뭐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나 버리시나... 누님, 하루만 더 기다려주지... 그렇게 좋아하던 퍼즐북을 이렇게 가지고 왔는데... 마지막 기도라도 해주고 보내야 했는데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스쳤던 그 "찰나" 의 순간에 그녀의 남은 삶이 이제 12시간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상상으로 허탄한 마음을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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