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강도헌장로교 합동측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합동측 목사가 되었다. 목회자가 되기까지 약간의 방황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기도로 목회자가 되었다. 중형교회와 대형교회의 부교역자 사역을 해 오던 중에 성령의 강권적인 끌림에 제자삼는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성(신학)과 체험의 전인적 영성에 관심을 두고 영성과 치유, 성장에 관해 연구 중이다. 저서로는 ‘성도들이 알아야 할 영전전투’ 1권, 2권이 있고, 현재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존 오웬을 떠올리며!

강도헌 | 2016.09.19 13:18

4 존 오웬을 떠올리며!

(천로역정 함께 읽기 4)



헬프의 도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유순함의 뒷모습을 뒤로 한 채 홀로 남은 순례자는 어떻게 해서든 멸망의 도시 반대편, 좁은 문 가까운 쪽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드디어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등에 멘 짐보따리가 너무 무거워 맨 땅위로 올라 올수가 없었다. 그 때 어디선가 헬프라는 자가 나타나서 순례자를 잡고 끌어내어 준다.



왜 이 늪이 이 자리에 그대로?


순례자는 맨 땅으로 올라온 뒤 헬프에게 묻는다. ‘이 늪은 멸망의 도시와 좁은 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나서서 이 구렁텅이를 메워버리면 나그네들이 안전하게 오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냥 버려두는 거죠?’ 헬프는 ‘임금님이 지난 1600년 동안 수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이 늪에 쏟아 부은 가르침만 해도 2만 수레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최고급 자재를 한 없이 쏟아 부었는데도 여전히 낙담 그대로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는 한 그대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는 한 그대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나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킨다면 그대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받으시기 원하시고, 당신의 사랑 그것을 바라신다.”

- 키에르케고어, ‘순간’ 중에서



자기를 직면하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 내적치유에서 자주 사용되는 ‘조해리의 창’은 ‘자신만 알고 있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은 모르고 다른 사람만 알고 있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 모르고 있는 자기’, 넷으로 나누어서 본다. 더 나아가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의식이 알고 있는 자기는 10%, 의식이 모르고 있는 무의식을 90%로 보았고, 모든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자신의 알고 있는 자기보다, 자신이 모르는 자기가 더 크고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면서도 변화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변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쓴 뿌리’, 또 어떤 사람은 ‘옛 자아’, 또 다른 사람은 ‘상처’, ‘원죄’, ‘어둠의 영’, ‘악한 영’ 등으로 표현한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건강이 좋지 않아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과 약을 이것저것 다량 복용한다고 건강이 좋아지지 않는 것처럼, 기도의 양을 늘이고, 성경 지식을 많이 늘이고, 묵상이나 예배의 시간을 늘이는 방식으로는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종교적 행위나 방법을 늘이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하게 함으로 숨어 있는 자신의 본 모습을 왜곡시켜 더욱 혼란만을 가중시킨다.



동일시의 위험 : 욕망,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이 빠질 수 있는 왜곡된 믿음에는 크게 두 종류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믿음과 욕망이 동일시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위에 키에르케고어가 먼저 언급한 ‘원하는 것’과 자신의 믿음이 동일시되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믿게 되는 현상이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믿음이 동일시되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성경지식과 영적체험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비판과 정죄로 나타난다. 이 둘의 동일시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는 동일시의 현상을 우리는 경계해야 하며, 스스로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제거 되어야 할 낙담의 늪


헬프가 순례자에게 대답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메신저들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이 낙담의 늪을 메우기 위해 쉬지 않고 계신다. 하지만, 왜 여전히 우리 안에는 낙담의 늪이 그 자리에 흐르고 있고, 우리는 왜 여전히 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가?


이제는 낙담의 늪에서 이제 자유 할 때가 되었다. 그 첫 단추는 바로 우리 스스로의 본모습,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고, 드러내기 두려우며, 인정하기 싫은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직면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훌륭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다루어야 한다. ‘직면’이라는 심리학적 용어를 기독교적 용어로 번역하면 ‘회개’이다. 회개는 뉘우침이나 반성이 아니다. 회개는 ‘돌이킴’이다. 언제 돌이킬 수 있는가?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그 죄를 죽일 때 우리는 온전히 돌이킬 수 있다. 이것이 변화의 첫 걸음, 자유의 첫 걸림이다.


오늘 따라 자꾸 존 오웬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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