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김정완건국대에서 경영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시사 칼럼과 서민경제, 도서 리뷰를 주로 쓰는 블로거이다.
    2012년 네이버 파워블로거 및 코리아 블로그 어워드 Top 100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현재 평신도 사역자로서 만나교회를 섬기고 있다.

어떤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

김정완 | 2016.08.05 09:32




이전까지 선포의 유익과 믿음과의 관계, 소망과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구하고 그 구한 것을 받는 선포의 근거가 성경말씀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선포의 유익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며 선포가 자신 뿐 아니라 남을 세우는 데도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음에도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그 도구를 적절히 또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선포가 비과학적이라는 사탄의 말에 동조하기 때문임을 밝혔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선포를 통해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와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사탄이 훼방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근원적인 이유든 표피적인 이유든 선포가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전에 스스로 우리가 정말 모든 세계를 다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의심부터 가져야 옳습니다. 고대 건축 양식에 엔타시스가 있습니다. 엔타시스는 건축물 기둥의 중간 부분을 불룩하게 하는 공법입니다. 원주의 위아래 굵기를 같게 하면 착시현상으로 중간 부분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 부러 중간 부분을 나오게 한 것입니다  

 

이성과 과학은 원주의 위아래를 같게 해야 원하는 값, 곧 건물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엔타시스가 건축물에 구조적 결함을 강제하는 왜곡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정상적인 원주가 사람의 시각에 미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부러 원주의 너비를 달리한 것이 엔타시스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린 구조적 결함을 지닌 원주를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엔타시스는 우리가 보는 사물이 현실을 올곧게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 구체적인 사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현실왜곡의 사례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태양계가 여러 개라는 과학적 견해가 발표되었지만 우린 여전히 달 착륙 이상의 경험(지식)을 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라기 보다 현재 시점에서 누구나 명백하다고 인정한 합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과학적 성취는 다른 과학적 증거에 의해 언제든지 용도폐기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은 인용하기 쉬운 한가지 예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는 고정관념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우린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영영 놓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엄연히 도래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린도전서 4:20)"고 했습니다. 여기서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능력을 일컫습니다.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분의 이름을 통해 받습니다. 

 

 

    

착시를 보완하는 엔타시스(배흘림양식)’ 구조는 5.4반경 어디에서 바라다 봐도

건물의 왜곡 현상이 없었다고 한다비과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세계일보).  

 

왜 그분의 이름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9-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이 높이신 이름이며 어떤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어떤 것이든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절부터 10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기원과 권세를 정확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름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한복음 14:13-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키워드는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당연히 능력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두번째 키워드는 "구하면"이라는 동사에 있습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요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위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요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지난 시간에 잠시 인용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저 불쌍한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시옵소서. 전 그가 일어나 걷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요구)했습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우리가 당연히 아는 기도를 통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있게 했던 걸까요? 요한복음 1413절부터 1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말씀에서 크리스천의 권리와 특권이 무엇이든지 이해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으로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기도와 선포는 양날의 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수 마귀를 무찌르는 강력한 무기로 주신 것이 바로 기도와 선포입니다. 양날의 칼의 한쪽인 기도의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1623절부터 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선포의 성경적 기초는 위에 언급한 요한복음 1413절부터 14절입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우린 자주 또는 애써 후자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외면의 근거로 기초가 과히 튼튼하지 않은 비과학적, 비성경적이라는 말과 태도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칼의 한쪽 면만 사용하는 것보다 다른 한쪽 면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지금은 베드로가 한 일과 같은 일을 행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뒤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인 반응에 베드로가 한 다음 말을 상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으니(사도행전 3:16)" 크리스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져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한 약속입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양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각자가 소유한 믿음이 약하거나 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오늘 내게 이뤄지리라는 확신에서 옵니다. 아는 것은 그런데, 실제로는 말씀을 취사선택하듯이 적용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나 있었던 일이지, 지금 시대에 무슨...", "시대상황이 엄연히 다른데, 이 말씀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어!" 아마도 그런 생각이 대표적으로 자리잡은 예가 오순절 다락방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종 교계와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일회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사건을 일회적으로 받아들이는 한 안타깝게도 당신에게 성령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에베레스트산(부산닷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한복음 16:7)" 오순절 다락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사람의 몸안에 직접 거하시게 된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령을 통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새로워진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권리와 특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가 그 이름에 믿음을 섞어야 발현됩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선포하지 못하는 것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포를 하고 이내 낙심하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타내는 능력에 대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포를 한 후에 이미 믿음대로 성취되었음을 붙잡지 못하고 세상의 방법을 쫓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확신이 옅기 때문입니다  

 

선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도의 이름의 비밀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의 능력을 믿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무언가를 알았다면 다음 차례는 실행입니다. 실행은 안 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들음으로써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참여하십시오. 믿음의 형제를 사귀시고 그들과 말씀으로 교제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교제는 웃고 떠드는 교제가 아닙니다. 염려를 나누며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는 그런 교제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교제는 죄를 고백하고 서로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선포하는 교제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교제야말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교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비밀을 당신이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능력이 당신에게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 이름으로 당당하게 요구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회복하신 당신의 권리이자 특권입니다.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사용하는 한 당신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믿음대로 되라" 하신 그분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추신 : 끝없이 의심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야 할 것은 언제든 보다 나은 이성에 의해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은 이성적 판단과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시장 좌판의 생선 고르듯 말씀을 선별적으로 취하는 믿음없는 태도라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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