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목민심서-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절반이요 반은 목민인 것이다

안영혁 | 2003.06.29 01:15
수년 전에 목민심서를 사서 집에 두고는 읽지를 못하였다. 그마저 외국에 간 친구가 급히 원하는 바람에 그만 우송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 기른다는 목자에 이끌려서 목민심서라는 책 이름을 내내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 우연히 서점을 들렀다가 민족문화추진회가 편집하고 솔 출판사가 출판한 목민심서의 첫 부분을 읽고는 서둘러 나누고 싶은 생각에 먼저 황급히 서평을 쓰게 되었다.

호지명의 평전 하나 제대로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그가 백성을 살피는 눈길과 손길이 따뜻했다 하여 비록 공산주의자기는 하나 많은 사람이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경로로 그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이 목민심서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보배처럼 여겼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그 소문 때문이라도 목민심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역시 다산의 정갈함과 한편 중후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 간결하고 분명한 필치에는 참으로 황홀하였다. 우리의 설교도 이렇게 명백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의 학문과 분명한 판단이 이런 놀라운 저서로 귀결되지 않았나 한다.

제목에 이미 말한 대로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절반이요 반은 목민이라 하였다. 오늘날 더러 목사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 독서가 어디로 향하여야 할 것인가? 다산은 절반이 수신이라 하였는 바, 기독교인 된 우리는 절반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다름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수신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개혁가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의 수덕 수련을 비판하였다. 대체 사람에게서 무선 선한 것이 나온다는 말인가? 이 근본적인 물음이 오늘 개혁교회를 낳은 것 아닌가? 그러니 다산의 글에서 형태를 따와서 목회자 혹은 기독교인의 학문과 독서의 절반은 은혜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반은 목민이라 하였다. 이것은 필자가 이미 영성신학에서 깊이 관심을 가져온 도시화의 문제와 겹치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도시화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목회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체 목회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기독교적 본질을 살피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니, 이는 결국은 사람을 살피는 것이 될 것이고, 특히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산이 말하는 목양과 같은 뜻이 될 것이다. 목민심서 한 권으로 하여 필자로서는 다시 독서가 나가야 할 방향을 헤아리게 된다. 무엇보다 도시 선교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상담의 기본을 갖출 독서를 하여야 한다. 또한 오늘 기층 민중의 아픔이 그대로 남았어도 그 중요성이 제고되는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모든 부분에 어떤 지침도 얻어야 할 것이고, 조언도 받아야 할 것이다. 도시의 문제는 이른바 도시공학의 문제도 제기한다. 우리에게는 김진애라는 여성 도시공학가의 이름이 이미 들려온 바가 있다. 이런 이들의 책을 읽어 오늘 기독교가 도시에 대하여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지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목민심서가 오늘의 목회를 향하여 하는 말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하나를 이야기하면 이런 것이 있다. 여러 관직이 있지만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그 의미는 왕이 된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런 중요성을 다산만 중시했던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 내내 이야기가 되어 왔다. 그래서 고려 우왕과 창왕의 시기를 거칠 때에는 수령이 힘써야 할 것 다섯가지를 5사라 일컬어서 중시하였다. 그 5사는 오늘 목회자들에게도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 같다. 1.그 하나는 밭과 임야가 늘어나는 것이고  2.둘째는 집이 늘어나는 것이고, 3.셋째는 부역을 고르게 하는 것이고, 4.넷째는 송사가 수월해야 하고  5.다섯째는 도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오늘 우리의 목회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은혜로 축복을 입고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축복입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로 사업이 흔들리지 않고 집안이 빈궁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의 목민관들처럼 목회자들이 현실적 위치를 갖지는 않았으나, 여러 가지로 권면하여 생업과 가산이 적절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부역을 고르게 하라는 말은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의 위치가 편중됨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겠고, 송사가 수월해야한다는 말은 언로가 막히지 않게 해야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가 건전하여서 악한 도모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받을 수 있으니 교회로서도 참으로 요긴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설픈 목회 신학의 책보다도 해석하여 적용함에 보다 구체성이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의아스럽게 여기기는 할 것 같다. 과연 이 책이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는 일반은총이 있는 것인데, 특별히 백성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명성이 높은 다산에게서 일어나 일반은총이라면 적잖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아주 깊은 신앙고백은 아니었더라도 그가 또한 천주교를 받아들인 바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면에서 외적 연결성은 깊지 않더라도 일단 실마리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고, 내용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설픈 목회신학이나 실천 서신보다 차라리 이 목민심서를 한 번 숙독하는 것이 목회자들에게는 필수적이라 사료된다. 목민심서의 첫 장은 부임해갈 때의 처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부임해 갈 때에는 말하자면 파리 떼가 많다. 여기 저기에서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기를 원하고 아전들은 수령을 떠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파리 떼를 물리치는 방법에서 제일은 바로 청렴이다. 다산은 청렴에서 위엄이 나온다 하였다. 오늘 목회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청렴한 부자라는 개념을 일도양단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개념을 자꾸 세련되게 토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산의 청렴을 목사의 한 덕목으로 삼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절반을 수신으로 보고 우리는 절반을 은혜로 보는 사람인데, 은혜가 수신보다 못하다면 수덕을 거부하며 종교개혁을 한 루터의 그 열정은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다산은 부임 첫 날에 대접받는 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하였다. 위엄은 지키되 거기서도 청렴을 지키려 하였다. 목사들은 심방을 하게 되는데, 심방 때의 음식상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검소하게 하도록 권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로 하여 성도들의 삶 또한 검소해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방 때의 촌지도 과감히 폐지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워낙 뜻이 좋은 촌지도 있지만 참으로 마음만 받는 것이 앞으로 있게 될 알지 못하는 복병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의 위엄도 상당부분 청렴에서 오는 것 같다. 즉 청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호사도 물리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산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목민 방안은 없어지고 교묘한 술수나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목사나 혹은 반대로 성도들이 모여서도 서로를 향하여 사곡된 이야기나 서로를 제압하는 방법이나 논한다면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오직 수신과 목민이라는 관점에서도 이 정도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의 목회와 교회의 문화를 일신하여야 할 것이다. 온갖 기독교 서적이 친근하면서도 목민심서 정도의 책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런 독서 문화도 일신시켜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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