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안영혁서울대 철학과와 총신대학교(M.Div., Th.M., Ph.D.)에서 공부했다.
    현재 신림동의 작은교회, 예본교회를 목회하면서, 총신대학원 교수, 지역학교운영협의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작은교회가 더 교회답다」가 있으며, 「청년 라이놀드 니이버」 등을 번역하였다.

왜 영성 신학인가?

안영혁 | 2003.06.29 01:11
왜 영성신학인가?

글줄이라도 읽었다 하면, 아무리 보수적인 목사라 할지라도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깊은 생각을 한다 치면, 아무리 운동가라도 한 번쯤은 대체 인간의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런 분열적인 관심 때문에 갈길을 몰라서 뒤척거리다가 영성이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이 말이 나의 갈증을 채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모든 일의 결말이 어디로 갈는지 누가 알겠나? 이 영성이란 말이 정말 이 시대 이 정보화된 도시의 시대에 어떤 샘물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사람들은 이 오래되고도 신선한 샘물 맛을 보려고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나 소나 모두 영성 신학을 한다고 난리다.(까닭없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모두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상에 대해서 이보다 더 명쾌한 말이 없을 것 같아서, 사이버 세계의 전파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써봤습니다). 과거의 부흥회 조차도 이제는 영성 세미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타난다. 그러고보면 이 영성의 샘이 그래도 꽤 좋은 샘이라고 이미 소문이 난 모양이다. 그러니 이왕 알아볼 일인데, 우선 영성의 역사 정도는 알고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듬성 듬성이긴 하지만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영성의 대가들이 감당했던 역할들을 나열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사실 은성 출판사가 이 부분에서는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꾸준히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독교 영성 3권의 책은 총 2천 5백페이지 정도에 달하는 영성의 백과사전 같은 책인데, 이런 책이 있으니 영성사를 들먹여볼 엄두를 내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것 조차도 대로는 철학을 동원해야 하고 때로는 사회학을 동원해야 하고, 때로는 수도사들의 알쏭달쏭한 행적들을 쫓아가야 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일천하기는 하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이해와 사회의 문제에 대한 견해들과 30년이 되어가는 성도의 관점으로 이런 것을 종합해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정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분명히 영맥 같은 게 있다. 이것은 단지 대가와 대가의 연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시대마다 요청되는 영성이 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던져버려야 하는 쓰레기가 있다. 영성의 대가들은 때로는 끈질기게 때로는 용기있게 이 일을 해낸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내가 영성가라 하고 영성 수련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예수라는 분의 부름을 받고 그 부름이 새긴 인상 때문에 도망치려고 도망치려고 해도 끝내 도망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렇다면 내가 정말 당신 처럼 한 번 살아버리리라 작심하고는 끝장을 보려고 덤빈 사람들이 맺은 결실이 바로 영성신학이다.

이미 강의도 하고 몇 사람에게 글을 읽혀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나 그리 많지 않은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저,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또렷이 알아야 하겠고, 거기에 겁쳐지는 그리스도의 성품 즉 단성론은 잘못이고 양성론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항상 영성은 은둔주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둔주의가 현실주의를 만들어 낼 때 진정으로 그 시대를 위해 역할했다는 것을 또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중세 수도회 가운데 도미니크 수도회에서는 이미 도시화 문제가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되어 있었다. 12세기 13세기 정도라 보면 도시의 문제는 이제 이미 천년을 헤아리는 것 같다. 그러니 오늘도 영성 수련을 생각하면, 반드시 도시 문제를 들먹여야 할 것이다. 거기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물고 늘어진 루터의 용기는 참으로 소름이 끼친다. 독자들이 이런 개념들의 느낌에 익숙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좀더 진지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좀더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되지 않을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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