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정현욱책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책벌레이며, 일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글로 표현하기 좋아하는 글쟁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집필자이며, 서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삼위일체와 종말론적 삶

정현욱 | 2017.10.02 14:27

삼위일체와 종말론적 삶





수개월 전에 백충현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훑어 읽기 했다. 제목이 너무 근사해 읽기 시작했지만 불필요하게 사변적이라 다시 읽기 싫어졌다. 그런데 오늘 기타모리 가조의 책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읽으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글이 나와 궁금해졌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면 이렇다.

  

"정작 그리스-로마적 교회의 신학은 이른바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형태로 결정화되어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에서의 세 페르소나'라는 모습으로 파악되고 우러러보았다. 물론 창조, 화해, 성화라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행위도 신조에 나타나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원시 교회로부터 계승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교회의 고유한 발언이 아니다."(260쪽)

  

필자의 언어로 바꾸면, 내재적은 교리적 또는 관념적 삼위일체이고, 경륜적은 역사적인 의미다. 백충현은 그의 책에서 '내재적'을 로고스와 연관시키고, 섭리와 경륜을 연관 시킨다.(71쪽) 좀 더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내재적은 고백적 신앙에 가깝고, 경륜적은 삶으로서의 신앙고백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타인처럼 멀게 보인다. 그러나 백충현은 이 부분에서 이정용의 논문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가져와 하나님의 '아가페'를 하나님의 본성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감정이입을 통해 표현되며, 하나님의 감정이입은 아가페의 방법'(215쪽)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감정이입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신다. 자신의 본질적 본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는 하나님의 참여 속에 참여한다. 참여는 곧 하나님과 세계의 ‘인격적 관계’가 된다. 이 부분에서 이정용은 ‘세계의 죄로 인하여 아가페로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감정이입 속에서 고통을 느끼신다’(215쪽)고 말한다. 

  

기타모리 가조는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공의로 죄인들에게 진노하지만, 용서하심으로 사랑하셔야 하기에 모순에 봉착한다고 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아픔’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연적으로 세계에 오게 했고, 신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한다. 기타모리는 가조는 아쉽게도 일본의 비극이 하나님의 아픔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억지를 부리고 말았다. 그가 무시했던 칼 라너는 이러한 존재론적 긴장을 ‘하나님의 신비’로 재조명한다. 그는 마지막에서 초월과 내재의 존재론적 긴장을 푸는 열쇠가 ‘삼위일체’(244쪽)에 있다고 혜안(慧眼)을 발휘한다. 

  

만약 칼 라너의 주장이 맞는다면 내재와 경륜의 삼위일체는 불가피하게 신자들의 ‘종말론적 삶’으로 귀결된다. 백충현은 칼 라너의 존재론적 긴장을 푸는 열쇠를 삼위일체로 제시한 다음 곧바로 몰트만, 판넨베르크, 젠슨의 ‘종말론적 일치’로 끌고 간다. 종말은 끝이 아닌 여정이다. 범인의 언어로 풀자면 신자는 천국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존재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닌, 천국을 살아감으로 육신의 종말 이후 얻어지는 생명의 영속적 특징이다. 이것을 내재와 경륜에서 빌려오면 내재의 삼위일체는 본질과 개념에 속하며, 경륜은 참여와 결합, 동참과 도래할 미래의 종말을 체화 시켜 살아가는 것이다. 신자는 현재 여기서 내재(종말)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한다. 체험된 신앙은 거주하시는 삼위일체의 내재함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헌신이라고 말한다. 내재와 경륜은 명징하게 구분되어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고 불가분의 관계로서 신자의 삶을 규정하고, 규명하며, 이끈다. 

  

실제로 백충현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난해하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도 접근하기 쉽지 않다. 이러한 난해함은 철학적 사변과 신학적 규명들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도 보프와 피터저, 브라켄과 수코키와 라쿠라는 학자들의 이름은 처음 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비로만 남아있는 삼위일체의 탁월성을 명징하게 풀어준 책이다. 인내심을 갖고 읽어 나간다면 신학의 깊이는 한 층 더해질 것이라 믿는다. 

  

추석이 코앞이다. 삶은 언제나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멈춤 없이 진행된다. 묵직한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기쁨은 배가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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