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뻐꾸기 소리

이진규 | 2025.05.06 18:20


노인 일자리 일하다가 잠깐 쉬고 있는데, 저 만치 둘러쌓인 산중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리네요(23,6,8,) ..금년들어 기대하지 못했던 처음듣는 소리라서 반가웠습니다...하기야 이제 계절적으로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도 된 거 같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교회 안에 밑둘레가 지름 50cm정도 되는 여러 그루의 큰 은행나무들과,교회 잎구 쪽 우람한 느티나무가 연록색을 지나 초록으로 바꿀 때 쯤,요즘 같은 때 쯤되면,꼭 어디서 나타나는지 안보이던 뻐꾸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해마다 거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부임후 몇 년차 친구목사 한 분이 교회에 놀러왔다가,때마침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요, 다른 여러 종류의 이름 다 모를 새들 소리들까지 어우러져 들리자, 그가 나를 향해 하는 감탄의 말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지금도 뻐꾸기는 그렇게 예전처럼 교회에 찾아와서 그만이 독특한 목소리로 인사하겠지요. 지금 제가 차안에 있는 이곳도 시골 길 가인데, 사방이 산이고 푸르름입니다. 물론 다른 새소리도 있었겠지만 귀담아 듣지않다가 오늘 뻐꾸기 소리가 크게 들리니 귀가 번쩍 뜨이네요. 반가움입니다. 지금 저만치 자리를 옮겨서 소리를 다시 내고 있습니다. 좀 거리가 멀어진 작아진 목소리로 제게 들리는 군요.

1,뻐꾸기 소리 해석

왜 저 뻐꾸기는 저리도 자기만의 목소리로 목청을 돋울까요? 대화 소리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혼자서 소리를 내는 모양으로 판단되니까요.

.찬양소리일까

하나님 제가 이곳에 와봤는데요. 가지 앙상하게 메마르고 춥고 삭막한 겨울 한참 멀리지나보내고 찾아온 봄과 함께 사방이 나무와 숲의 프르름이고 제가 살고 놀기에 넘 좋아요.하나님 이렇게 좋은 곳을 찾고 누리게 해주시니 감사찬양 들립니다. 뻐꾹 뻐뻐꾹 그럴까요?!

짝을 찾 구애의 소리일까

하나님 제가요 작년 이른 봄에 둥지에서 엄마뻐꾸기 새끼를 치고 길렀거든요. 제가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제 성인뻐꾸기가 되었어요. 독립해 살아가야 한다 해서요. 그런데 아직 제 짝을 못만나서요. 전 수컷 뻐꾸기거든요. 지금 제게 가정을 함께 꾸릴 암컷 뻐꾸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실 내 짝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지금 혹 이 근방에 있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찾아서 불러 본답니다. 제 구애의 목소리를 듣고 제 곁으로 와 달라고요. 뻐꾹 뻐어꾹 그럴까요?!

슬퍼 우는 소리일까

뻐꾸기도 생각이 있고 감정도 있겠지요...지금 저 소리에도 분명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의미의 목소리 일겁니다. 여지껏 짝도 못구하고 독립해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이 두려워요. 마땅한 내 살 곳도 없어보이구요. 좀 괜찮은데 있어보여 자리잡으려하면 이미 먼저 구역을 차지하고 사는 뻐꾸기가 여간 텃새를 부리네요. 하나님 제 삶이 왜 이리 힘들어요. 슬퍼요. 그래서 뻐꾹 뻐꾹 자기 애환과 슬픔을 저렇게 크게 표현해낼까요?!

2,오해

뻐꾸기가 지금 자기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푸른 숲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저렇게 내는데, 또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즐거워서 좋은 숲을 만나게 해주셔서 신이나서 즐거워서 소리내는데, 아님 사랑할만한 님을 찾는 목소리를 저리도 간절하게 내는 중인데,아님 삶이 너무나 힘들어서 슬퍼서 엉엉 우는 소리를 지금 내고 있는 것일수도 있는데, 그 뻐꾸기 소리를 듣는 우리는 각자 어떻게 소리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들려요?! 사림마다 심상이 다를텐데 그에 따라 똑같은 뻐꾸기 소라라도 그 해석도 각각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은 겁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 속에서 흘러내리는 국민들의 정서에는 슬픔이 내재돼 있어요. 특히나 일제시대를 지나온 기성세대 어른들에게는 더욱더요. 그래서 새가 목소리를 자렇게 내면 주로 새가 운다. 세가 우네?1 그렇게 말하고 했지요. 요즈음 젊은네들은 잘 모르겠어요. 풍요로운 시대를 타고 났으니까요. 우리 기성 세대들은 그랬어요. )울밑에 봉서화가 피었으면 그꽃을 바라보고 울밑에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왜 그리도 아름답게 핀 봉선화가 처랑하다 표현할까요?! 그때 자기들 삶의 모습이 그랬으니까요. 우리 기성세대 그때 어른들의 삶이 슬프고 괴로운 것을 담밑에 핀 봉숭아를 통해서 자기를 투영시킨 것이죠. 그래서 네 모습이 내 모습 같다 노래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삶 치하에서 힘들고 무능하며 그래서 슬픈 마음정서를 그렇게 봉선화를 빗대어 자기마음을 투영한 해석과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선진국 외국에서는 결코 새간 운다고 말하지 않해요. 세가 노래한다고 말하지요.

왜 그리 표현할까 그들의 마음이 긍정적이기에 당연히 그들은 새들은 노래한다고 표현하기가 넘 당연한 것이에요...물론 새들도 그때 그때 현편에 따라서 색깔이 다른 목소리을 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희노애락의 삶이 있기 때문이죠. 그때 그때 새목소리를 전문가가 아니어서 분별못하던 우리네는 우리네 역사적 정서에 따라서 운다고 말했고 서양인들은 노래한다고 표현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봅니다. 누가 들어봐도 똑같은 소리를 내는데, 그에 따른 반응과 해석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일 수 있어요.그것은 굉장한 오해와 편견이 될 수도 있음입니다...

6.선택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은 각자가 다릅니다. 목회적 환경도 그렇습니다. 지긋 지긋하게 고생스러운 가시밭길을 믾이 겪어온 자도 있어요. 상대적으로 그렇지않는 삶의 길을 걸어나온 자도 계실거구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어느 누가 고생없는 삶이 따로 있을까요?! 그래서 오직하면 인생은 고해(苦海)다 라는 말이 있을까요?! ...그런데 게 중에 누군가는 유독 부정적인 표현기제가 발달된 자가 있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특히 교회 안에서 똑똑하고 유능한데 똑같은 사건과 상황에서도 말을 부정적 기제가 워낙 발달해서 머리가 그쪽으로 빠르게 회전해 돌아가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독설을 내뱉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자들의 말은 꼭 바울에게 후매내오와 알렉산더처럼, 목회자를 부정하고 까내리는 말을 많이해서 그가 해내는 봉사 유익 양보다 해악을 더 끼치는 경우입니다..자신은 항상 팩트를 기반해서 틀리지않고 옳은 말만 한다 하지만, 매사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따지고 말을 퍼트립니다. 비울도 그런 그런 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고백합니다.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특히 해를 많이 끼쳤다고 하며 디모데에게도 그들을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모세도 항상 꼬투리 잡아서 비방하고 선동해서 대적하는 지도층 무리들도 있었지요. 예컨대) 고라 다담과 아비람과 온 등입니다.


한데, 그런 부정적인 모습 기제가 우리 안에는 없을까요?! 저도 신학대학 입학전에 한 때 외사촌형 목사님과 함께 교회개척을 한 적이 있는데, 난 형을 의지해 위로받으려고 내 사정형편을 말하면 그 말을 듣던 형님 목사님은 너 왜 그리 부정적으로 말하냐 듣기싫다 긍정적으로 좀 말해!”하고 핀잔을 받는다 치면 난 좀 억울감점울 느낀적 있습니다. “형이 돼가지고 더구나 목사님이면서 그렇게도 내 사정과 형편의 아픔을 공감 못해주고 핀잔만 줘 ?1”히고 속상해 했었지요. 왜냐하면 난 팩트를 말해서 내 속마음 좀 알아달라고 내 딱한 사정을 사실대로 말하는건데 왜 안 알아주냐고 항변하는 섭섭한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 내가 이해가 되고 잘한게 아니란게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져요. 그때보다 성숙해 졌으니까요...

)광야 이스라엘 보세요. 원망불평 해 댈 떼 ...현실적으로 보면 팩트입니다. 힘들다 이거죠. 그런 자기들을 좀 알아달라고 그리 표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역행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뜻을 모른채 말씀을 부정하며 환경만 바리보고 매여서 터져나온 불신앙이지요. 그래서 모세는 그런 그들의 말을 싫어했습니다

마치 제 부정적인 말을 외삼촌 목회자가 듣고 싫어했듯이 ...그러나 게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현실이 똑같이 어럽고 힘들지만, 위로 하나님과 그 약속하신 신실한 말씀을 믿고 환경에 매이지 않는 긍정하는 소망의 믿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오늘 동기목사님들이고, 여호수아와갈렙은 장로님들이고, 백성들은 교우들로 보시면 됩니다. 어떤가요?! 교회를 이끌고 약속의 가나안땅을 향해 신자들을 인도내 나가는게 목회인데, 교회내에 부정과 원망의 목소리가 많은가요?! 아님 믿음과 감사와 비젼과 소망의 목소리가 큰가요?!. 어느 쪽 목소리가 교회 분위기를 좌우 하냐에 따라서 교회 분위기와 목회의 환경과 성취 역사도 달라 지리라 봅니다.

바라기는 모든 교회 장로와 직분자와 성도들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믿음으로 긍정적이며 목회자 목회찰학과 지도방침과 인도따라 유기적으로 합심해 협력하는 여호수와와 갈렙같은 믿음의 목소리가 많아서 부정 목소리를 잠재우고 긍정적 믿음생활로 함께해 전진해나가는 주님 몸된 교회가 되고 그러한 협력과 봉사로 말마암아 목회가 편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도 연약한 인간들인 우리 안에는 여전히 횐경따라 흔들리고 어러울 때마다 사실대로 힘들다는 말을 선택해 불신앙과 부정적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오기도 할때가 있겠습니다..속으로 이맇게 말하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아직도 엣사랑에게 넘 익숙해있는 기질과 상향에 나도 놀랍니다.

언어는 내 의지로 판단해서 내리는 선택인데요...믿음의 말을 선택하고 어렵더라도 환경따라 말을 주님 말씀과 뜻에 역행하여 불신과 부정말을 쏟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 의지해서 소망 중에 긍정의 말을 선택해서 표현하는 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될 때가 있어서 말입니다..힘들어도 쉽게 감사와 찬양의 말을 선택해 고백하는 분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들은 참 좋겠다 싶습니다..그들처럼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되겠습니다만. ..

광야에서 언어를 못고치고 계속 사사건건 건수마다 불편과 원망만 하다가 하나님 진노대상으로 삶을 마감한 불행한 결과를 나도 밟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과 소망 약속 땅을 바라보고, 광야에서도 긍정의 노래를 선택하고 불러댔던 여호수아와 갈렵처럼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갈렙과 여호수아에게는 수월했는데,다른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어렵게만 보였으니까요...그리되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제 귓가에 뻐꾸기 노랫소리가 가라앉고 짓바뀌? 새소리가 들려 옵니다.이제 제 귀가 다른 작은 소리도 들을만큼 좀더 열려졌나봐요. 다른 새들의 소리도 들려지는 것을 보면요.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작은 목소리에도 들을 줄아는 귀가 더 열려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우리 각 자가 교회가 하나님의 보실 때 우리가 지금 처하는 삶의 환경이 광야든 종려샘 곁이든 간에, 믿음의 노래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으면 하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정 말이 점점 내 마음과 입에서 사라지고, 긍정의 태도를 가지고 횐경이 억압하는 아픔과 고통을 뛰어넘어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면 하고 작은 소망을 해봅니다.)바울과 실라가 복음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 속에서, 어찌보면 억울하게 매맞고 쇠고랑 채워진 차디찬 감옥 속에서,그래도 원망하기보다는 찬양과 감사를 선택해 불렀던 것처럼, 그 정도는 못돼도 닮은 꼴이라도 됐으면...그래서 삶이 불신앙과 세상쪽으로 자꾸 떠밀려나감이 아니라, 조금씩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삶과 언어 선택과 노래하는 삶의 색채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방 나무들이 겨울에 앙상하더니만 어느새 프르름으로 지금 이렇게 물들고 생명력이 뿜뿜 넘쳐나며 그 기운을 뽐내는 모습처럼, 그리 우리 믿음과 자존감이 새생명과 긍정의 생각과 마음으로 그런 영적인 생명력과 푸르름으로 변화됐으면..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는 왜 아직도 가시가 그리 많아요. 다른 새들이 놀러왔다가 쉬지못하고 찔려 떠나가는 상처의 가시가 아직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네요. 그러면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외롭다 하네요. 주님여 피뭍은 손 능력의 손으로 내 마음속의 가시를 빼내주셔서 그로부터 자유케하사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자유해짐 속에서, 노래와 춤이 되게 하소서.

저 푸른 나무들이 푸르름 속에서 산소를 풍풍 뿜어내 호흡을 편하게 해주고 온갖 짐승과 새들이 살아가도록 봉사하듯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과 목회와 사역 환경 속에서 하나님 은혜로 인해 삶의 호흡이 지유롭고 편하게 해주셔서, 그래서 노래와 감사가 쉬워지게 하소서. 그런 나로 이웃들에게 삶의 산소를 전해주는 넉넉한 통로가 돼 줘서, 그들도 우리 때문에 살아가기가 은혜롭고 쉬워지게 하서서, 그래서 모두가 감사와 긍정의 말을 선택해 살아감으로 해서, 세상이 지금보디 더 한층 밝아지고, 고난도 슬픔도 미움의 상처도 극복되고 치유돼 점점 나아져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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