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니고데모를 묵상함

서중한 | 2019.12.18 16:40

요한복음3,1-21 “How can this be 어떻게 이런 일이!” 

 

니고데모는 2절에서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세메이아)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행하는 표적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 정도의 표적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이었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을 지라도 드러난 현상을 양심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고 말씀하신다. 표면에 천착하여 논리의 고리를 물고 영의 깊은 곳을 성찰하지 못한 채 선생의 대열에 합류해 있는 내가 니고데모인 셈이다.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아는 더 좋은 선생일 수 없을까. 나는 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제대로 포스 나는 선생일 수 없을까.

 

몇 해 전 함께 나눈 민영진 교수가 쓴 설교에 관한 글을 기억한다. 그는 마가복음15,3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meq++-ermhneuvw)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삶이 번역하면에 머물러 있었다고 고백했다. 학자로서, 설교자로서 자신의 삶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에, 그 붉은 피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는 회한(悔恨)이었다. 마치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자신의 학문과 설교가 십자가와 고난을 관념화시켰다는 고백이다. 예수는 몰약을 탄 포도주, 신포도주를 거절하며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셨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신의 아들이 죽을 만큼의 아픔이었지만 그에게 십자가가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보는 것이 능력이다. 살펴보니 본문에서 duvnamai(be able)‘란 말이 다섯 번 쓰여 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없음이니이다

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없느니라

4“...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있사옵나이까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2절의 표적도 능력이라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도, 다시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능력이요 권세이다. 하기사 볼 수 있는 것이 어찌 힘이 아니랴. 마종하는 딸을 위한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사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 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박경리는 산다는 것에서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픔을 볼 수 있고, 삶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능력이다. 시인의 눈이 세상을 통찰하는 것처럼 목회자의 눈이 하나님 나라를 통찰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시()를 산문(散文)처럼 속독(速讀)하지 않는다. 시인의 눈을 가슴으로 전달받을 때까지 느리게 읽고, 또 읽는다. 그렇게 시인의 눈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다시(a[nw-qen)’ 태어난다. 사람과 사물이 보이고,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헬라말 a[nwqen은 공간으로는 를 나타내는 것이고, 시간으로는 앞서 있는 것, 처음을 말한다. 우리의 삶을 위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의 역사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다시란 말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말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시를 단순히 두 번째라는 숫자로 치부해 버린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deuvtero")’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제대로 된 공부도 아니었지만 젊은 날 왜 그렇게 공부에 대한 압박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과 사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듭난 삶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니고데모처럼 선생인체 목사인체 살았다.

 

애초부터 거듭남’(3)은 우리의 한계 너머의 일이니 물과 성령’(5)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니고데모가 유대사회의 금 수저신분일지라도 육은 육이므로’(6) 거듭나지 않고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는 말이다. 볼 수 없으면 들어갈 수 없으니 보는 것능력일 수밖에.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가치를 보지 못한 채 영생을 꿈꾸는 허황됨을 지적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삶의 방향과 근간이 되지 못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다. 어릴 적 고향의 들녘에 마지막 여름비가 그치고 선들선들 바람이 불 때면 둑길을 걷는 것이 참 즐거웠다. 바람에 뭍은 진한 풀냄새는 검정고무신 만큼 나를 가볍게 만들었다. 바람 따라 고개 숙이는 들풀에 맞춰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얼싸좋네 아 좋네 군밤이여어디에선가 불어와 동심(童心)을 풀잎처럼 흔들던 바람, 난 그 바람이 너무 좋았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날도, 바로 위의 형과 혈투를 벌인 날도, 나를 혼자 두고 형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날도, 나는 그 바람 따라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오늘도 그 둑에 서서 바람이 그 날처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주기를 기다린다. 바람 같은 성령이여

 

아픔을 헤아리는 기쁨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13) 떠나지 않고서 갈수 없듯이, 내려오지(katabaivnw) 않고서는 올라갈(ajnabaivnw) 수 없다. 그런데 올라가다는 말을 14절과 연결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들리다는 말은 예수님의 승귀에 주로 사용하는 uJyovw란 단어다. 성경은 예수님이 통치자로서의 지위와 신분이 승귀되는 것을 광야의 뱀처럼 십자가 위로 들려지는 것과 동일시한다. 곧 예수의 높아지심은 십자가 위에 들리심이다. 골로새서2,13-15이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십자가가 통치자들과 세상 권세를 무력화하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았다. 결국 십자가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니 십자가가 예수의 높아지심이지 않는가. 십자가가 승리요, 부활은 승리의 선포가 되는 셈이다. 결국 다른 이들을 위한 고통과 아픔이 모든 것을 이긴다. 나는 무엇으로 세상을 이기려하는가. 나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세상과 맞짱뜨려는 객기(客氣)를 얼마나 부렸던가. 아플 정도로 사랑하면 아픔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다는데, 예수는 오롯이 사랑 밖에 남아 있지 않았겠다. 숨죽어가는 잎이 나무를 붉게 물들이듯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은(1,14)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고통을 전제하지 않고서(3,16)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요한복음3,16절을 비극적인 말씀(tragica verba)’이라고 했다. 기쁨의 성탄 소리 바닥으로 하나님의 슬픔과 상처가 새벽 강처럼 흐르는 것을 루터는 본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그의 상처가 우리의 기쁨인 것을, 그저 그 아픔을 헤아리며 기뻐할 수밖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도마는 주의 다시 사심을 진정으로 확인하고 싶었다(요한복음20,24-28). 예수님께서 그런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확인 시켜 주신 증표(證票)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손과 발이었다. 주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린 '흉터'였다. 사실 예수가 지닌 흉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최대의 굴욕과 고통을 상징하는 자국이 아니던가. 흉터는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것이어서 감추고 싶은 것인데 고통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 분을 확인하는 증표가 된다. 천상의 고통이 스며있는 기쁨이다.

 

정호승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를 보면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고 말한다. 복효근은 젊은 날 화상 당한 누이의 상처가 꽃잎을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땅에서 가장 상처 난 꽃잎 예수. 그래서 예수는 향기eujwdiva 인가.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에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예수를 변호하고 예수님이 처형되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로 그 시신을 쌌다고 한다(7,50; 19,38-40). 그는 예수의 시신을 닦고 바르고, 싸면서 그 흉터를 만졌겠지. 내려오지(katabaivnw) 않고서는 올라갈(ajnabaivnw) 수 없음을(13) 보았겠지.

 

당신의 시선이 나의 심판입니다.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시작과 끝을 살피시고 지키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 때부터 하나님의 바라보심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바라보심이 심판이고,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함이 심판이다. 얼마나 당신의 눈을 의식하고, 당신을 신뢰해야 당신의 눈빛을 심판으로 느낄 수 있을까. 빛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 그래서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 이미 심판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까. 이게 위로부터 다시 난 사람이 아니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다시 둑에 서서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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