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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 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독서지도사 과정> 책임교수
    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어쩌다보니

문양호 | 2018.09.11 12:07
『어쩌다보니』

왕국(엠마뉘엘 카레르, 열린 책들)을 읽고



젊어서부터 이미 머리속의 기억은 정확한 팩트보다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어떤 것에 의해 그 팩트가 변용되어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 보다는 뭔가 부정확성을 가지곤 해왔다. 이것도 그런 것 같다. 중학교 땐가 교회중등부에서 여러 교회가 다른 교회에 가서 연합집회를 했던 것 같고 목사님의 강력하고 열정적인 설교 후 결신할 사람 일어나라는 콜링의 요청이 있었다. 그때 여러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당시 결신이라는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일어나야 할 것같은 부담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섰다. 살아오면서 교회생활을 나름 어느정도 했던 이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기도나 결신초청의 시간에 일어나 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일어나야 믿음있는 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어난 것이지 그때 처음 주님을 만났다거나 주님을 영접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는가?’란 질문을 역시 중학교때 중등부 모임에 갑작스레 찾아온 다른 교회의 자매한테 들었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그 소녀가 왜 우리 교회에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모태신앙이었던 나였고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은 적이 없는 나였지만 그 믿음이 내게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게 할수 있다는 사실과 동일화하지는 당시에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고3때 남산 도서관에서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전교1등을 놓지 않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와는 친하지도 않았고 그 친구가 그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던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고 그와 개인적인 대화도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시 도서관복도 에서 머리를 식히고 있을때 그 친구는 중학교때 그 소녀와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두번의 경험에서 나는 구원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갖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에서 깨닫게 된 것이 대학교 1학년때 모 선교단체에서 였다. 이후 나는 신앙의 기복과 넘어짐, 침체는 있었을 지언정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그분과의 관계를 의심한 적은 없다.

이런 나의 신앙을 자랑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신앙이 꼭 일반적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음이다. 그보다는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것이 흔들리거나 뜨겁게 불타오르다가도 어느순간 믿음자체를 가진 적이 있는지 의심이 갈정도로 방황하거나 그 신앙을 놓아버리는 이들을 보곤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있지만 그 신앙을 아주 잃어버리고 오히려 적대적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이들도 종종 본다. 또는 오래된 돌비석의 비문마냥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어렴풋한 것처럼 그 신앙의 흔적의 유무를 고민하게 하는 이들도 있다. 가끔은 생각해본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런 모습으로 자리하게 됐는지를....

청년부때 대학부때, 청소년 시기에 뜨거운 신앙을 가졌지만 왜 그 신앙을 떠나 돌이킨 것이 어떤 연유였는지 말이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이란 작품을 택한 것도 그런 호기심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복각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과 열심과는 달리 그는 한때 뜨거운 신앙을 가졌었다가 이 책말미에는 그 신앙을 떠나 불가지론자로 돌아섰다는 책 소개를 읽으며 그의 신앙의 궤도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대교회와 복음서 기자들의 모습을 복원해가면서 혹시 어떤 문제를 겪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번역서가 거의 칠백쪽에 달하는 거대한 책을 읽어가며 저자는 어떤 신앙의 흔적을 남겼을 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면이 있었다. 사실 그의 작품은 그 주제를 떠나서라도 특이한 면이 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은 소설같지 않은 소설을 담아내는 듯하다. 소설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형식의 소설을 벗어난 듯하다는 것이며 작가는 글 속에서 그저 자기일상을 계속 주절거리고 있는 듯하다. 본 주제를 들어가기전까지 꽤나 다른 이야기를 담아내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의 투쟁’의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처럼- 왜 그다음 이야기는 출간하지 않는지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면서도 그는 모든 작품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처럼 좀더 저널리스트적인 측면이 강한 듯 싶다. 작가는 엘리어스 카네티의 ‘구제된 혀’처럼 자전적이면서 자기의식의 세계를 펼쳐보이기 보다는 마치 CCTV를 보여주듯 자신의 잡다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그가 주제로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잡다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보여줌으로 독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작가가 담아내고자 했던 초대교회에 대한 언급도 한참후에야 등장하기 시작하기에 읽는 이들을 기다리게 만든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러한 담아냄은 자신이 한때 열심히 믿어 나름의 신학적 탐구를 하며 적어나갔던 노트 열여덟권속에서의 그의 연구와 더불어 그의 신앙적 구도와 방황을 보여주는 각각의 퍼즐과 단서가 된다. 그는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하지만 그는 신에 대한 불가지론이기 보다는 그 자신이 주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어떤 형태로든 믿고 있는지를 본인 자신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듯하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서 마치게 될 이 책을 나는 진심을 다해 썼지만, 책이 다루려하는 것이 나보다 훨씬 큰 것이기 때문에, 이 진심이라는 것은 가소로운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쓴 이 책은 나의 어떠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똑똑한 자, 부유한 자, 높은 곳에 있는 자들 – 모두가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다-로 말이다. 그래도 나는 시도해보았다. 그리고 책과 작별하는 이 순간 자문해 본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히 남아있는 것일까?’



그는 바울과 누가, 요한 등 성경의 여러 인물의 삶을 탐구하고 재구성하며 초대교회 모습과 당신 성경기자들을 그려내지만 그러한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왕국에 들어가는 방해하기도 하며 또 그러한 그이 진심이 그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자인하는 듯 하다. 그는 Q문서등과 당시의 문화적 상황과 토대 등을 통해 독자들이 그 시대를 이해하게 하고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 했는지, 성경은 어떤 과정을 통해 쓰여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 Q문서에 대해 작가뿐만 아니라 신학자들도 원본은 커녕 사본도 본적은 없기에 그 문서가 당연히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논하는 것은 무리수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는 이 소설의 마지막을 ‘나는 모르겠다’라고 갈음한다. 그는 자신이 불가지론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그 과정을 담아내기보다는 마치 상수도관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이물질로 가득차 물이 흐르지 않거나 약간의 물기만 남아 버리는 것마냥 어느순간 그렇게 신앙의 불길이 꺼져 자신의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어버린 듯한 모습을 그의 작품속에서 담아내는 것 같다.



작가는 그의 또다른 소설 ‘적’의 주인공을 이 책에서 언급하는데 사기적 행테와 온가족을 몰살함으로서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흉악범이었던 장 클로드 로망이 감옥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것을 사람들이 그 귀의에 분노하거나 의심했던 것을-마치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전도연의 분노처럼-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세상의 지혜와 정직한 사람들이 잘 클로드 로망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장 클로드 로망 자신도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끔찍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또다시 그의 속 깊은 곳에서 거짓말하고 있는 그것, 항상 거짓말을 해왔던 그것, 내가 <적>이라 불렀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것의 노리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 나로 하여금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그의 심연과도 같은 의혹 앞에서 <혹시 누가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알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확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 클로드로망이 그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그 거짓말쟁이 말고 다른 무엇과 관계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가능성이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며, 내가 로망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혹은 믿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외교적인 방편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것이라면, 심지어 나는 아직도 그를 믿고 있다고까지 말할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살인마였던 장클로드 로망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다른 이들을 속이기 위한 의도적인 거짓인지 아니면 그의 죄값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이들에게 로망의 귀의에 대해 나름의 변론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것을 언급함은 결국 그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한다고 보여진다. 로망의 신앙의 진위를 알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속에 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을 신앙을 가진 이에서 불가지론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있지만 그자신이 가진 믿음이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회의 속에서도 결국 그것도 나름의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 싶다.

그럴수 있다.

과거에 같은 신앙 공동체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던 이들 중에는 그의 신앙의 일관성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보이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그들의 삶의 충격적인 사건등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전혀 상반된 길을 가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는 없지만 습기 찬방에 조금씩 곰팡이가 슬어 처음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세월이 점점 지난 후에는 도저히 그 방에서 살수 없는 지경이 된 것처럼 그렇게 신앙에 때가 타고 먼지가 쌓여 그 신앙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본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어쩌면 ‘그냥’ 아니면 ‘어쩌다보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마치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에서 트래비스가 마냥 걸었던 것마냥 어떻게 보면 목적성있는 걸음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한 행보 였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한 사람이 어떻게 교회공동체에 상처나 의심을 통해 불가지론자가 되었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 책의 저자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에게 아무 대답도 주지 않는 듯 싶다. 하지만 그런 걸음 자체가 저자는 의미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방식의 걸음과 사유과정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어쩌면 그가 ‘모르겠다’하는 것의 답을 얻게 될지 모른다. 비록 그의 걸음이 한참을 돌아가는 구도의 길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p.s. 비록 목적하는 바와 다를지 모르지만 이 책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전문적인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자가 초대교회를 추적하여 기사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복음서의 형성과정과 사도나 그 제자들, 성도들의 서로의 관계나 감정을 상상케 하는 데에 재미를 준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는 재미가 있다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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