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성육신과 형상화

강도헌 | 2017.03.13 09:17

성육신과 형상화

출20:4,5

 

그리스도론(기독론)이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정통 기독교 교리입니다. 즉,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적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지만, 이성으로 이해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곤란한 질문이고, 어려운 교리입니다. 신앙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볼 때 온전한 인간이 어떻게 온전한 신이 될 수 있냐는 것은 기독교 교리들이 막 정립이 되던 5세기에 삼위일체 논쟁이 끝나자마자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 불 붙었던 것입니다.

 

기독론 논쟁의 발단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의 발단은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부임한 네스토리우스(381-451)가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은 자’라는 의미로 ‘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신을 낳은 자’라는 뜻을 가진 ‘테오토코스’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말하고자한 논리는 ‘신은 어머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상식적 수준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주장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라면, 마리아 또한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매우 심각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이 아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매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냥 신앙적으로 마리아는 신이 아니었고, 인간이었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녀의 몸을 빌어 인간으로 형상을 입으신 것을 믿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학과 교리적으로 설명하고 변증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325년에 삼위일체 논쟁을 매듭지을 때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고, 아들도 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연히 ‘신의(그리스도)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키릴로스(375-444)가 불같이 일어나 네스토리우스를 반박했던 것입니다.

 

키릴로스의 반박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한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양자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고 비난하며 이단으로 몰아갔습니다. 양자 그리스도론(Adoptionism)이란 사모사타의 바울 주장으로 ‘마치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신이 자기의 마음에 드는 예수라는 인간을 양자로 삼아 그 안에 거한다는 내용입니다.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의 ‘크리스토토코스’를 ‘양자 그리스도론’으로 몰고 갔습니다. 결국 431년 키릴로스가 주도한 에베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사가 이단으로 정죄 되었습니다. 이유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와 신을 두 개의 본체로 구분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성만을 강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키릴로스의 모함에 가까웠습니다.

 

숨겨진 갈등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판결한 에베소 공의회의 판결에는 숨겨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간의 정통성과 주도권 싸움이라는 교회의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안디옥 학파를 대표하던 네스토리우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더라도 그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해야 된다는 ‘정당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로마의 새 수도에 안디옥 학파가 집권하는 것을 꺼린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는 교리적인 면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면으로 네스토리우를 거세게 이단으로 몰아세움으로 알렉산드 학파가 콘스탄티노플의 주도권을 잡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을 옹호하고자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성이 그의 신성 안에 함몰되는 것을 우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성을 그의 신성과 공평하게 다루려는 시도였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에 대해 ‘테오토코스(신의 어머니)’ 칭호 사용 반대를 선언한 것은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충돌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영을 소유했으며, 성육신 이후 그의 신성과 인성이 변하거나 혼합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존재를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의 안디옥 학파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강조한 시실리우스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안디옥 학파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형식적으로 격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억울한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는 당연히 자신에 대한 공격이 무척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소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양자 그리스도론 자들을 오히려 비난을 해왔고, 예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단지 두 본성이 구분 없이 섞인 ‘혼합’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마리아는 신성의 ‘도구’ 내지 ‘성전’으로 사용된 ‘사람의 어머니’이지 ‘신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스토리우스에게 굳이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구분한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혼합되지 않고 연합’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키릴로스도 별다른 뾰족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키릴로스는 다만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말을 좋아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가 인성과 신성 두 본성에서 왔지만, 두 본성은 ‘통일 되어’있지, ‘두 본성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질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따져 말한다면,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구분’을 조금 더 강조하고 그 둘의 ‘혼합’을 조금 더 걱정했다면, 키릴로스는 ‘연합’을 조금 더 내세우고 ‘분리’를 조금 더 염려했다는 것만이 두 사람 간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

우여곡절 끝에 451년 칼게돈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서 채택된 <칼케돈 신앙 정의>는 ‘혼합 없는 연합’이라는 말로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양극단의 사이로 난 ‘황금의 중간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신성에 있어서는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따라서 ‘신성에 있어서는 시간 이전부터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동일한 분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는 동정녀 마리아가 신의 어머니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론 논쟁을 일으킨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칼케돈 공의회의 공식적인 변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케돈 신앙정의>를 엄밀히 말하면, 키릴로스도 함께 정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네스토리우스가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구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에 치우쳤다면, 키릴로스는 두 본성의 통일성을 역시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꼭 그만큼 그리스도의 신성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네스토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게 했다면, 키릴로스는 예수의 인성을 의심하게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는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로 남고, 키릴로스는 성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그렇듯이 이론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는 교회정치의 힘이 그만큼 거셌기 때문입니다.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칼케톤의 판결은 후에 8세기 성상파괴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 VS 성육신 교리

8세기 성상숭배 옹호자 다마스쿠스 요하네스는 성화상파괴론자들이 예수와 마리아의 화상을 숭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치 이단자로 정죄 받은 네스토리우스처럼 예수와 마리아의 인성만을 인정하고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단적 행위라고 내 몰았던 것입니다. 이때 당시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크게 노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교권을 견제하려했던 자신의 성화상파괴정책이 골치 아픈 교리 논쟁으로까지 번졌기 때문입니다. 격노한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플 황궁의 청동 대문 위에 걸려 있던 예수의 십자가상을 떼어버리고, 모든 성화상 파괴를 명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726-787년까지 61년 동안 진행된 ‘1차 성화상파괴운동’의 발단이었습니다.

 

성화상파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게르마노스가 나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퇴위시켜버리고 자기 사람인 아나스타시오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 그레고리우스 2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계승자인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황제 레오 3세를 교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후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754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히에리아궁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도 해박했던 그는 예수가 성만찬 때, 앞으로는 빵과 포도주로 자신의 이미지를 대신하게 한 사실(마26:26-29)이, 곧 자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막으려는 예지적 배려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화상파괴론 자들과 함께 입을 맞춰 성화상 옹호론자들을 우상숭배자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대주교 게르마노스와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와 같은 성화상 옹호론자들에게 저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수도원에 가혹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숱한 아름다운 성화상들이 이때 불태워졌거나 하얀 석회로 덧칠해졌고, 바닥의 모자이크 조각들은 뜯겨졌습니다. 성 아욱센티우스 수도원의 원장 스테파누스는 이 때 거리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수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이 신체를 절단당하거나 처형되었으며 상당수의 수도원들이 폐쇄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콘스탄티누스 5세가 죽고 그의 뒤를 아들 레오 4세가 이었지만, 불행히도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일찍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레오 4세의 아내 이레네 황후가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테네 출신으로 본디부터 성화상을 옹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레네 황후는 섭정을 맡자마자, 당시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와 손잡고 787년 성화상 회복을 선언하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타라시오스의 주재로 열린 이 종교회의를 ‘제7차 공의회’라고도 하는데, 이 종교회의에서 성화상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마치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신에게 드리는 ‘참된 예배’와는 구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교회는 ‘황금의 중간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중간 길이 자주 그렇듯 논란이 완결되지 않은 탓에, 이후에도 성화상 파괴론자들과 옹호론자들 간의 대립은 계속되어 815-842년에 걸쳐 다시 한 번 성화상 파괴가 있었습니다. 소위 제2차 성화상 파괴운동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화상 옹호론자들이 승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당시 교회가 가진 막강한 정치력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흔들릴 수 없는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된 성육신의 종교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으로 시작된 종교(유대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교리를 내세워 모세의 율법에 맞선 성화상 옹호론자들이 승리하고, 십계명을 내세워 성육신 교리를 위협하는 듯한 인상을 준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결국 패배한 것입니다.

 

마침내 843년 3월 11일 성화상 공경이 동방정교회 안에서 공인되었습니다. 이것을 정통주의의 승리로 파악한 동방정교는 지금까지도 이날을 기념하여 사순절의 첫째 주일을 ‘정통주의의 축제’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누가 옳은가

반면,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가 영향을 미치던 서방의 로마 가톨릭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는 787년 니케아에서 개최된 제7차 공의회에 두 명의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작성된 결의문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샤를마뉴 대제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 있어 왔던 번역의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제7차 공의회의 결의문에 들어 있는 ‘공경’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프로스키네시스’를 ‘흠숭(흠모하고 숭배한다)’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아도라티오’로 번역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아도라티오’라는 말은 오직 신에게 바치는 배타적 공경, 곧 예배에만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공의회의 결의문은 동방정교회가 성화상을 신처럼 숭배하겠다는 뜻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는 곧바로 성화상 숭배를 금하는 《샤를마뉴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화상 숭배에도 성화상 파괴에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성화상은 단지 교회 내부장식이나 교육에 사용되어야할 형상적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7세기 말경 성화상을 ‘문맹자들을 위한 서적’으로 규정했던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입장과 같았습니다. 샤를마뉴 대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754년 성화상 파괴를 결정한 히에리아 공의회와 787년 성화상 공경을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 모두를 정죄하고 다시 한 번 황금의 중간길을 찾았습니다. 요지인즉 ‘성화상의 장식적 사용은 허용하지만, 성화상의 신적 숭배는 금한다’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성화상에 대한 기본적 입장입니다.

 

종교개혁자들

마사치오(1401-1428)의 <성삼위일체>나 미켈란젤로(1475-1564)의 <천지창조>에서 보듯이, 종교개혁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가톨릭교회의 승인 아래 성자인 예수뿐 아니라 성부인 신마저도 아무런 제제 없이 꾸준히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극단적인 반감을 가진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성화상들을 철저하게 배격하였습니다. 예컨대 칼뱅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어떤 유형적인 형상으로 나타내고자 했을 때, 하나님의 존엄성은 이미 인간의 임의로 조작한 모조품으로 화해버렸다는 것이다.”고 형상화에 극단적으로 경계했습니다.

 

루터도 초창기에는 극단적으로 반대를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징과 이미지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해하면서 후에는 적절한 안전장치만 마련되면 성화상을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루터주의자들은 가톨릭과 거의 유사하게 성화상을 그대로 유지하되, 그에 대한 숭배만을 금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렇지만 츠빙글리 및 칼뱅과 연계된 개신교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중세의 성화상 파괴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인들의 동상을 산산조각 냈고, 성물들을 파괴하였으며, 제단을 뒤엎고, 그림을 찢거나 그 위에 회칠을 했습니다.

 

개혁파 개신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성화상 혐오증이라 할 정도로 성화상 배격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모든 형상을 금지하는 유대교적 전통으로 성큼 다가갑니다.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에는 성화상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는 신은 원래부터 영인 데다 신이 인간으로 세상에 온다는 성육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세가 제2계명으로 ‘새긴 우상’을 금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화상을 그리거나 만들어 숭배할 근거와 이유가 처음부터 아예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교에 종교적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 매우 드물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두라유로포스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숭배의 대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고, 유대교 사원 그 어느 곳에서도 숭배를 위해 그린 그림이나 조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생태적으로 시각적이라기보다 청각적인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소개되는 메시야는 ‘지혜’, ‘말씀’ 등과 같은 무형상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을 개혁파 개신교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가고 있지만, 사실 구약에서 소개되고 있는 성막이나 성전의 내용 속에는 ‘그룹’, ‘촛대’, 광야의 ‘놋뱀’ 등 형상화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벨기에 출신 구약학자 앙드레 라콕은 “계시 중의 계시”라고 높이 평가하는 신의 자기 이름 계시에 이미 성화상금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신이 처음에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후 밝혔을 때에도 어떤 형상을 가진 하나의 ‘존재물’로서가 아니라 어떤 형상도 가지지 않은 ‘존재’로서 밝힘으로써, 자신의 형상화를 금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정적 주장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성경 자체에서 반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으로 성육신 하셔서 오심으로 무형상의 문제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 가운데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각 종파가 내세우는 교리마다 나름의 정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성화상이 우상이냐 아니냐하는 것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화상마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역사적 논란들을 감안해보면 무엇이 우상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화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숭배할 것인가? 활용할 것인가?’에 따라 그것이 우상이 되기도 하고,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형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숭배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형상이나 형체뿐만 아니라 돈, 권력, 쾌락, 행복, 자식, 자기 자신 등을 숭배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보다 더 높아진 그 무엇이 우상숭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진지하게 자신에게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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