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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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즘(과 대통령)

강도헌 | 2016.11.30 10:34

나르시시즘(과 대통령)

 

그리스 신화 중 나르키소스에 대한 이야기에 나르시시즘의 어원이 있다.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사랑에 빠진 젊은 사냥꾼 나르키소스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 에테레시아스의 예언이 나오는데 그가 자신을 결코 알지 못할 수만 있다면, 그는 아 주노련하게 오래 살 것이라는 것이다(Thomas Moore, 2007). 이 예언은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잔잔한 호수에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기 전까지 그는 거만하고 자만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요정 에코를 옆에 두고 자신의 말을 반복하는 것을 즐긴다. 요정 에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나르키소스의 말을 듣고 되풀이한다. 에코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나르키소스의 말만 되풀이하는데 그러한 행동에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결국 에코는 두려움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비관하여 자신의 몸을 잃어버리고 목소리만 남게 된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비춰주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듣고 싶은 목소리만을 옆에 두고 자신의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잔잔한 호수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일로 그는 자신을 향하여 사랑에 빠졌고 죽음에 이르렀다.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비극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죽음의 의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모르는 팽창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팽창된 자아가 교만하여 유아독존의 자세로 살아가면서 에코 같은 추종자들만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한 팽창된 자아의 죽음은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토마스 무어(Thomas Moore, 2007)는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단단한 껍질을 쓰고 있는 소년이 그의 실존에 굴복하는 것, 자기애를 통과하는 유일한 길로 치명적 상처, 애쓰며 유지해온 자아투사의 끝장, 환상 속에 품고 있던 기대의 성취가 아닌 적나라한 실패라고 설명한다. 연금술이나 영지주의와 맥이 닿는 심층심리학의 개성화 과정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깊은 밤과 같은 과정인 것이다. 거짓과 페르조나, 환상으로 팽창된 자아는 진정한 자기와의 대면과 추락과도 같은 좌절을 통해 온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커질 대로 커져서 터질 것 같은 자아의 팽창은 자아의 주인에게는 물론이고 주변인들에게도 어려움을 선사한다. 풍선처럼 부풀려진 모습을 인정받고 싶어서 지속적으로 주변인에게 인정을 요구하고 칭찬을 원하며 심지어는 칭송까지 원한다. 자신만을 특별하게 존중하고 최고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이들 곁에 사는 주변인들은 에코로만 살아가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신화에서 에코가 결국 자신을 잃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자아의 팽창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주변인을 이용하고 결국 주변인은 자신을 잃게 되는 비극을 잘 드러낸다.

 

나르시시스트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아픔이지만 온전함과 생명으로의 길로 들어선 것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 이전에 팽창된 자아의 죽음, 즉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확신을 훨씬 능가하는 자기기만,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라는 자기착각의 늪에 빠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진정한 부활, 신과 동행하는 영원한 길로 진입하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죽음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고 드물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죄는 스캇 팩(Morgan Scott Peck, 1997)이 언급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게으름, 바로 거짓된 자아를 붙들고 그 안에 갇혀있는 악인 것이다. 그들의 악은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보편적인 악이다.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며 거짓의 옷과 거짓의 가면에 숨어 지내려는 인간 본성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신의 눈을 피해 잎사귀로 자신을 가리고 숨어있는 모습이다.

 

나르시시즘 특징과 종류

 

나르시시즘 성격장애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동일한 것으로 인지, 정동, 대인 기능, 충동 조절 등의 영역에서 전반적으로 과대 망상적 행동과 존경에 대한 요구, 공감의 결핍 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음 목록에서 5가지 이상이 나타난다(유영권, 2014).

 

1.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망상적 느낌을 갖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성취한 재능을 과장하고, 그에 합당한 성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월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기대한다.

2. 끝없는 성공, 권력, 훌륭함,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사랑에 집착한다.

3.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고 독특하며 단지 특별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기관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4. 지나친 존경을 요구한다.

5. 특별한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 아주 특별한 대우라든지 자신의 기대에 대한 자동적인 충족 등 불합리한 기대를 갖는다.

6. 대인 간 착취, 즉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타인들을 이용한다.

7. 공감의 결핍, 즉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인식하거나 알려 하지 않는다.

8. 타인을 질투하거나 타인들이 자신을 질투하고 있다고 믿는다.

9. 거만하고 도도한 행동이나 태도를 취한다.

 

유영권(2014)은 나르시시즘의 유형을 크게 외현적 나르시시즘과 내현적 나르시시즘으로 구분한다. DSM 5에서는 외현적 나르시시즘의 특성 위주로 표현되어 있다. 내현적 나르시시즘은 매우 겸손하고 예민하게 표현된다. 이들이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것은 외현적 나르시시즘과 동일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외현적 나르시시즘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지만 내현적 나르시시즘은 오히려 수줍어하고, 감정 억제를 지나치게 하여 자신의 감정은 물론이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반면 타인의 평가에 늘 예민하기 때문에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관해서는 잘 알아챈다. 이들은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마음 깊이 감추고 겉으로는 주목과 인정을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겸손한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자신의 수치심이 건드려지는 상황은 회피한다.

 

밀론(Theodore Millon, 2000)은 나르시시즘을 4가지로 구분한다. 엘리트형 나르시시즘, 보상형 나르시시즘, 무절제형 나르시시즘, 호색형 나르시시즘이다.

 

Theodore Millon의 나르시시즘 구분

 

엘리트형 나르시시즘: 타인의 찬사와 인정에 집착, 성공한 지위가 많음

보상형 나르시시즘: 부족하다는 열등감과 결핍감, 보상심리로 과장된 자기상 집착

무절제형 나르시시즘: 반사회적 성향, 자기중심적, 착취성이 강함

호색형 나르시시즘: 이성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정복하려는 성적 취향

 

유영권(2014)은 나르시시즘을 타인에 대한 반응 양상으로 나누어 무감각형과 과민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무감각형 나르시시즘은 타인의 반응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고 주목과 관심을 늘 원한다. 타인에게 상처주고 있다는 것에 무감각하고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에도 무감각하다. 반면 과민형 나르시시즘은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에 타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지나치게 휘둘린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주로 느끼고 집중 받는 것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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