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다시 스바냐를 묵상하며

강도헌 | 2017.03.31 10:44

다시 스바냐를 묵상하며

 

지도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빚(특권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종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특권만을 누릴 뿐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구약에서도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과 선포를 통해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하여 거침없는 경고들을 쏟아 내었습니다. 여기에 예언자 스바냐도 예루살렘의 지도층들이 부패하였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그들에게 지워진 책임을 지는 모습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입으로는 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행위들은 야훼의 뜻을 저버리고 율법을 파기하고 사회적 안정을 훼손하며 약자들을 학대하고 탈취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잔인하였으며 무자비하였고,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포효하는 사자나 굶주린 이리처럼 약자를 탈취하였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자들은 권력을 임의대로 사용했던 사회적 지도층의 문제점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던 다윗 왕의 비도덕성을 지적하였습니다(사무엘하12장). 엘리야도 부정직한 방법으로 포도원을 가로챈 아합 왕의 비리를 고발하였습니다(열왕기상21장).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와 같은 후대의 예언자들은 지도층들의 고발 대상을 확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 그리고 책략을 제시하는 지혜자입니다(렘18:18). 이렇게 지도자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하는 구분법은 구약에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 예언자, 장로”(왕하23:1,2), “제사장, 예언자, 고관”(렘2:26, 32:32, 겔22:2628), 또는 “제사장, 예언자, 우두머리”(미3:1)입니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크게 종교 지도자와 세속 지도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스바냐서를 지금 택한 이유는 스바냐서에서는 종교지도자와 세속지도자 외에 추가적인 유형의 지도층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로 경제적 지도자들입니다. 스바냐서는 이들의 명칭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행하였던 경제적 부정의(不正義)를 지적하며 당시 무역과 상업 혹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 정치, 경제 지도자들의 핵심 그룹에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만약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분명히 모든 지도층에 대해 율법(미하엘 벨커는 신명기 4장7절을 해석 하면서 구약에서 ‘합당한 예배=하나님의 계시=하나님의 자비=공의=율법’의 공식을 설명한다.)을 파기하였다는 신랄한 경고가 재생되리라 예상됩니다(물론 과거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에게 비판을 받았던 지도자들이 지금 시대에 다시 살아난다면, 이러한 경고에 대해 지금은 신약(은혜)시대라고 일축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현재 필자는 한국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진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거나 희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치이기에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지도자(종교, 정치(사회시스템 모두), 경제)들이 유치원생들에게 가르치는 정직, 즉 도덕(윤리나 성화의 수준도 아니다)의 수준조차 지켜지지 않은 현실 앞에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 할지어다.’를 안일하게 외치고 그들을 그냥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성도들도 은혜를 외치며 가만히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지도층을 향한 스바냐의 예언에서 나타나는 정치, 종교, 경제의 부분들을 각각 살펴보면서, 과연 이러한 ‘부정의(不正義)에 대한 침묵이 하나님의 뜻인가?’ 진정으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진지하게 숙고하며, 조잡한 이해타산적 회개의 쇼나 퍼포먼스에 속지 않으며,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사랑을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자기합리적 오도에 넘어가지 않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박근혜 전대통령이 구치로소 이감되는 장면을 보면서 필자 또한 마음이 매우 아팠지만, 그럼에도 감상주의에 빠져서 이 중요한 시기를 그르쳐서는 안 되며, 이번 사태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종교, 정치, 경제 지도자들의 부정의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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