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우상인가? 성상인가?

강도헌 | 2017.02.28 13:25

출20:4,5

우상인가 성상인가

 

제가 소속한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 합동측에서는 교회에서 예전과 관계된 그 어떤 것에서도 성찬식 외에,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실 안에 십자가조차 걸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말씀을 강조하는 말씀 중심적 신앙을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수많은 장로교 합동측 교회의 강단 옆이나 강단 뒤쪽 위에는 아주 당당하게 영상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큰 교회의 경우에는 기둥에까지 스크린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설교자에게 더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시에 영상은 결코 성경본문이나 설교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건물 안에는 다양한 현수막이나 그림, 장식, 이미지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목회자들은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엄밀하게 말해 이미지 사용을 금하는 기본 취지를 완전히 뒤엎는 자기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현재 다수의 개신교회 목회자들은 성경에 관하여 이미지 사용을 거부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목회자들도 상당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작 자신은 이미 영상이나 장식물과 이미지들을 사용하면서 이미지 사용에 대해 강한 부정적 성향을 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가 시각 중심적 사회라는 것은 다르게 표현해 이미지 중심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제 이미지는 증강현실로까지 발전되어 가상과 실재의 벽까지 점점 좁혀가고 있습니다. 즉, 이미지는 이제 우리 삶의 일부를 넘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 사용은 그동안의 한국 개신교에 새로운 변화를 불가피하게 불러 오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말씀(청각) 중심의 개신교단의 신앙생활에서 이탈하여 이미지를 사용하는 영성훈련들이 여러 곳에서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 점점 더 확대 될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막을 방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분별하게 막아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개신교에 속한 자들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만을 두고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즉,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말씀의 권위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이미지 사용의 문제는 오늘날 갑자기 생겨난 문제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1-3세기 동안 이미지는 활발하게 사용되었고 4세기 기독교가 로마교로 공인되면서 기독교에서 이미지 사용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해졌습니다. 결국 8세기에 이르러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 3세에 와서 성상파괴운동을 거치면서 아이콘 사용이 기독교신학의 주요 쟁점이 되었고, 16세기 종교개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아이콘과 이미지 사용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 사용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자들 간에서도 서로 이견이 있었지만, 각각의 입장 그대로의 미제의 상태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영성이라는 단어가 주요 이슈로 등장하는 것은 결국 다시 아이콘, 이미지 사용의 불가피성을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콘과 이미지에 대해 면밀히 살피며, 아이콘과 우상숭배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에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8세기에 일어난 성상파괴운동을 통해 성화상이 우상인지 아니면 성상인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앞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상파괴 운동을 살피는 목적

주후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창건한 이래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무려 1,123년이나 존속한 비잔티움 제국을 상상할 때 황금과 공작석으로 장식한 궁궐, 루비와 에메랄드가 수놓인 의상을 입은 아름다운 왕녀들, 화려한 성상과 성화들, 그리고 모자이크로 장식한 교회, 뿌연 연기 속에 거행되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예배 등이 떠오릅니다. 그 중에서도 강렬한 원색들과 황금으로 치장된 성화상은 지금 우리 개신교의 신앙 모습과는 전혀 다른 비잔틴제국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들의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동방정교회 각각의 교회와 수도원에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신비한 이야기와 전설들을 품고 있는 성상에 대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는 두 번째 계명 이야기는 8세기 기독교와 관련해 일어난 ‘성화상 파괴운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성화상이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서, 당시에 종교적인 문제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문제는 하나님이 엄중히 경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지금도 여전히 위험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우상숭배는 그것들이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처럼 인식하고 섬긴다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맞서야 할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신중하게 분별치 않고 무분별한 배타적 정서적으로만 대적해서도 안 됩니다. 우상숭배의 문제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임으로 바른 분별을 필요로 하고, 바른 분별을 위한 한 예로서 먼저 중세에 약 120년에 걸쳐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안내자로서 충분히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먼저 우리가 이것을 살펴보는 이유는 무엇이 우상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우상숭배인지를 가리는 기준의 첫 단추를 채우고, 보다 정확한 우상숭배의 의미를 분별하고자 함입니다.

 

비잔틴성상숭배

313년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에 건축된 교회 건물들은 그리스도 예수, 성처녀 마리아, 사도들, 천사들과 성인들의 그림이나 조각 혹은 모자이크로 장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그림과 조각들은 글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그들의 예배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도와주는 교육적인 효과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성화들은 종종 장식이나 교육의 효과를 넘어 그것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콘들은 그것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등 제작과정부터 신비한 전설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아이콘들이 개인의 기도를 들어주고 질병을 고쳐주며, 도시를 외적으로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져 각종 성물, 성인들의 유골등과 함께 그것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성상파괴운동

이러한 신앙의 변질적 행태에 반대하여 일어난 비잔틴제국의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제 1기 성상파괴운동은 주후 726년 레오 3세(717-741)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그의 손자 레오 4세(775-780)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레오 3세의 정치를 계승한 콘스탄틴5세(741-775)의 강력한 성상파괴정책은 754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성상사용을 반대하는 결정문을 채택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들의 성상파괴령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에서 성상숭배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황실과 교회에서도 곧 성상숭배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레오 4세는 성상파괴운동에 공감하였으나 성상을 숭배한 그의 황후 이레네의 영향으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레오 4세 사후 어린 왕의 섭정이 된 레오 4세의 황후 이레네는 곧 성상숭배로 복귀하여 787년 니케아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성상숭배의 교리를 공식화 시켰습니다.

 

제2기 성상파괴운동은 815년부터 853년까지 약 30년 동안 세력을 가졌는데, 이때에는 보다 온건하게 성상들(images)을 우상들(idols)과 구분하고 형상들을 파괴하는 대신 그것들을 신자들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치우라는 정도였습니다. 레오 5세(813-820)뿐 아니라 아모리의 황제 미카엘 2세(820-829)와 그의 아들 데오필루스(829-842)가 성상파괴운동을 지지하였으나 이시기의 성상파괴논쟁에 있어서는 성상숭배자들(icondules, 성상노예)의 변론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다마스쿠스 요하네스입니다. 이렇게 비잔틴 제국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성상파괴 논쟁은 결국 성상숭배자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비잔틴교회를 계승한 동방정교회에 성상사용의 교리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고, 여전히 성상사용에 대해 일부 부정적이었던 서방교회의 양 갈래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레오 3세의 성상파괴운동

717년 여름, 이슬람은 8만의 병사와 18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공격했습니다.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과 불가리아의 침공, 그리고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한때는 제국의 영토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으로 위축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국의 방어군도 새로 개발한 강력한 신무기인 화약과 튼튼하게 보강된 성벽을 이용해 이슬람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 승리에는 그해 3월 25일에 대관식을 치른 황제 레오 3세의 공이 컸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제국에 활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는 법률을 개편하고 대학을 세워 학문을 증진하는 등, 제국의 국력을 회복하고 위상을 높이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 회복사업 가운데 하나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예수의 화상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마리아, 그 밖의 성인들을 그린 화상들, 소위 성화상들을 공경하는 일들이 일상화 되어 있었습니다. 6세기 말부터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된 이러한 일들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무척 성행했는데, 그것은 이 제국이 성지 팔레스타인과 가깝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예루살렘 성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성지순례자들은 그곳에서 각종 기념품과 유물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것을 신성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그들 스스로 제작한 성화상들까지도 성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사람들과 여러 곳에서 성화상의 조각을 먹고 병이 치유되었고, 성상의 가루나 성인들의 유골 가루를 먹고 치유나 고통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넘쳐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상, 성화상, 성인의 유골, 여러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집기나 상징물 등이 개인, 가정, 도시의 수호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사도들 그리고 마리아 등에 대한 외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성화상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신성시하기에 좋은 형태로 상상하여 그들을 묘사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이미지대로 묘사하기를 좋아 했습니다. 예컨대 예수는 대부분 경우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눈처럼 하얀 얼굴 뒤에는 빛나는 후광을 두르고, 흰색 또는 금색 옷을 걸쳤으며, 한 손에는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 곧 최대한 영적 능력이 발산되는 외양으로 그렸습니다. 또 베드로는 중키에 약간 머리가 벗어졌지만, 역시 피부가 하얗고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졌으며, 코가 크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신실한 모습의 중년 사내로 묘사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 정서상 자연스러운 활동이고 표현으로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림과 이미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직‧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전하기 위해 다양한 작품들이 생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시지보다는 물건, 장식, 작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같은 화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도가 지나쳐 마침내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7세기경부터는 사람들이 교회에 사용되는 성스러운 장식물들을 가정집 문설주나 식탁 위에, 그리고 심지어는 외양간에까지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휴대용으로 제작해 여행을 할 때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악령을 쫓고 병을 치유하며 예언 능력과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즉, 복잡한 교리보다 단순한 상징이 일반 대중들에게 훨씬 선호되는 신앙의 방식인 것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맹목적 믿음, 즉 무지한 믿음은 결국 참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투사시키는 자기식의 믿음인 자기에게 필요한 신을 만드는 우상의 등장을 막을 수 없습니다.

 

레오3세는 이런 모든 성화상을 우상으로 단정하고 배척하는 종교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이 일에 그가 내세운 명분은 바로 십계명 중 제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이것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당시 정치의 영력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게르마노스와 이러한 성상숭배를 통해 막대한 수입과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교회와 수도원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었습니다. 당시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는 나라의 공적인 의무인 징병, 납세, 노역 등을 면제해주는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수도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심지어는 농사, 노동, 병역에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수도원은 성화상이나 성상, 그리고 성물로 불려지는 것들을 수집하여 병들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무지하고 게으른 신앙태도, 즉 수고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신비적 요행을 바라는 믿음의 소유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로부터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당시 맹목적인 신앙심을 가진 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말들을 맹신하며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교회와 수도원까지 서서히 영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고 타락의 온상이 되게 함으로 그것은 또한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와 수도원은 광활한 토지와 면세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황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 1,000년 동안 교회와 권위와 황제의 권위가 자주 충돌하였고, 나중에는 그것이 제국이 쇠락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오 3세가 다만 정치적 목적만으로 성화상들을 우상으로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오 3세가 성상파괴 명령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들 마다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출생지설, 단성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 심지어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 등으로 아직 정확하게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성상을 우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상이 우상이냐 우상이 아니냐의 문제는 ‘성상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심각한 신학적, 사회적 논란이 얽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상이 우상이라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성상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표적 신학자가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675-749)였습니다. 그는 세 편으로 된 자신의 《성스러운 성화상을 옹호하는 논문》을 통해 구약성서의 우상숭배 금지는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세상에 나타남으로 폐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대담한 발상이었는데,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육체나 형태를 갖지 않으신 신을 결코 묘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이 육체를 갖고 오셨고 인간들 안에서 교류했던 이상, 나는 눈에 보이는 신을 묘사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본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 즉 초월적 존재였지만, 예수를 통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 내재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가시적인 방법으로 그(예수, 하나님)를 표현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요하네스는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그는 성화상에 반대하는 자들은 물질 그 자체를 악하게 보는 마니교적 이원론에 빠진 것이며, 성화상에 대한 혐오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혐오와 같은 것이라고 상대를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마다스쿠스 요하네스의 이러한 주장은 5세기 초에 불붙었다가 칼케톤 공의회(451) 이후 한동안 잠잠해진 성화상 논쟁을 그리스도론 논쟁과 연결시켜 성화상 파괴론자들을 이단으로 몰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성화상 논쟁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교리 논쟁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아이콘, 이미지, 우상

현재 개신교회 또한 이미 수많은 아이콘들과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이러한 아이콘이나 이미지들에 대해 근본적으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현재 다수의 개신교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서서히 기독교 예술적 가치와 그 필요성들이 증대되면서 이미지나 아이콘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중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미심쩍은 태도로 거부하려는 성향이 강한 혼합 된 양가감정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사용할 것인가? 예수의 얼굴 사진이나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가? 성경의 성화들을 활용할 것인가? 이렇게 질문하면, 대부분 사용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화를 통해, 나무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얼굴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성화나 조각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망설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콘 혹은 아이콘이란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아이콘은 고대 그리스도교 때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져 왔던 신앙의 성장이나 복음 전파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바 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적 종교가 되면서 아이콘은 미신적 도구로 점점 확대되어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콘의 종교적 기능과 의미를 놓고 논란을 벌인 8~9세기의 우상타파 논쟁 이후, 동방교회는 오히려 성상숭배의 교리상의 근거를 공식화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실재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림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게 아니므로, 성화 공경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화를 제작하는 기독교 종파로는 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성공회 등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고, 앞으로 우리 개신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종교개혁자들과 중세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살펴보면서 성경과 복음을 언어적 표현뿐만이 아니라 예술적 방법을 통해 표현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숭배되거나, 그것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는 태도는 반신앙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즉, 앞으로 개신교는 아이콘이 오용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식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 사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을 만큼 이미지 사용은 개신교회 내에서도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만약 성상이나 성화상을 신적존재로서 섬기고 숭배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이나 성화상을 통해 성경의 하나님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만날 수 있다면, 성화나 성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그 어떤 언어나, 예술의 작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신학적 서술이든, 예술적 작품이든 그것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즉, 하나의 작품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아 낼 수 없듯이, 하나의 신학 혹은 교리가 하나님의 모두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즉, 우상 숭배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금지한 것은 인간의 이미지가 아닌 우상과 물화였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따서 만들어진 야훼의 상이 없다면 그 이유는 야훼의 진정한 모습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계신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우리는 삶의 모든 방법들, 즉 다양한 방법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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