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의 명암

신동수 | 2016.12.12 11:01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우 '미국적'인 칼빈주의자이며, 식민주의 미국과 독립국 미국 사이에서 소위 '미국적' 정체성을 세운 인물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소위 대륙의 개혁주의적 전통을 미국적인 상황과 당대의 철학으로 갈등하며 해석하여, 결국 에드워즈만의 독특한 칼빈주의로 재창조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것은 결국 세속적으로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함께 종교계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미국 건국의 정신적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1950년 이후로 미국 내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가 매우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과 삶의 정황의 차이를 인지하지 않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역사전기식 평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일방적 에드워즈 찬미식 접근은 한국교회의 미국식 복음주의의에 대한 또 다른 추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의 일장과 일단을 균형 있게 조망하며 한국교회의 상황에 조심스럽게 적용하는 작업이 바른 자세일 것이다.

이 글은 에드워즈에 대한 일련의 긍정적 서술에 대한 반동으로서 그의 삶과 신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시도이다. 균형 있는 학자적 연구 저작들에는 대개 비판적인 측면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빠지지 않는다. 최근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서로서 영국 학자 스티븐 홈즈의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God's Grace & God's Glory)이라는 책과 미국 여류학자 에이미 파오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최상의 조화](The Supreme Harmony of All)를 읽었다. 그들이 지적하는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의 문제점 혹은 약점에 주의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이 글의 바탕이 되었음을 밝힌다.

뜨거운 감자,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의 마지막 후예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은 청교도를 떠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신학적·교회적으로 '청교도'라는 말만큼 뜨거운 감자가 없을 듯 하다. 한국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적 삶과 신학'으로 무장하여 보수적이고 건전한 윤리와 성경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신앙적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는 긍정적이다. 어떤 면에서 '청교도적'이라는 말은 '정통'과 '비정통'을 구분하는 시금석이 되기까지 한다.

실제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청교도는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적 칼빈주의 정통주의(orthodoxy) 혹은 개혁주의적 스콜라주의(scholarticism)의 후예들이다. 17세기 영국 캠브리지대학 중심의 지성적 청교도주의와 교회개혁과 목회적 혁신을 꿈꾸던 경건주의적 청교도주의는 미국의 청교도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청교도의 모든 '목사'들은 '학자'들이기도 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방대한 저작들과 그의 목회적 부흥이라는 별개로 보이는 두 특징들은 미국 청교도주의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장점이자 최대의 약점은 신학과 삶의 엄격성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청교도 신학은 하루아침에 심심풀이로 보아 넘길 수 있는 손쉬운 복음주의적 서적들이 아니다. 이들의 지성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은 전(全)우주적이다.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청교도 목사, 리차드 박스터까지도 6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에드워즈의 책은 아직도 수 십 년간 정리하여 책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신학적 유산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풍성함과는 달리 신앙적 적용에 있어서 청교도는 늘 '경직성'의 멍에를 써왔다. 신학적 고상함이 삶의 경직성과 목회적 결의론 혹은 율법주의로 나타난다면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당대의 정황 속에서 동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청교도의 삶의 이해는 보통 사람의 것과는 한 단계 더 '천상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스티븐 홈즈의 지적대로 요약한다면 '청교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은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 신학의 명암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에드워즈의 신학과 목회의 약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결핍인 것이다.

첫째, 에드워즈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에 과도히 사로잡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자체에는 놀랍도록 언급이 부족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신앙과 정서]를 살펴보면 '참된 정서'와 '거짓 정서'를 구별하여, 참된 정서의 열 두 가지 표적을 이야기한다. 그의 온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신자들의 삶을 통해 진정으로 드러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그 영광이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못하다. 그의 또 다른 대표적 설교집 [사랑과 그 열매]에서도 참 신앙의 표지인 실천을 어떻게 나타내는가에 열중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그 영광을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내신다는 것이다(self-glorification).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고(emanation), 그 영광을 받으시는(remanation) 과정이 구속사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언급,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 보여주신 '은혜'에 대한 언급은 놀랍도록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결핍은 충분히 에드워즈의 신학의 약점으로 이야기되어질 수 있다. 스티븐 홈즈는 이것이 결국 청교도주의의 약점이며 나아가 칼빈주의(개혁주의)의 약점이라고 호도하지만, 이것은 에드워즈 한 사람 신학의 약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과도한 비전이 에드워즈의 신학의 약점을 더욱 부각시킨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둘째, 영광의 교회만 있지 은혜의 교회는 없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결국 하나님의 '미' '조화', 그리고 '탁월함'의 드러남이다. 에드워즈는 교회도 하나님의 이러한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성도는 참된 성도가 아니고,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신앙의 고백을 한 후에 그에 상응하는 '거룩함'이 행실로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성찬의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한 것이다. 성찬의 배제는 매우 엄격하고도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전통에서 성찬은 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왔다. 하나는 성자들의 교제의 떡이요 하나는 죄인들을 감싸는 주님의 희생의 떡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자에게 거룩의 열매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음으로 성찬에서 배제시키겠다는 결정은 논란의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문제는 에드워즈 자신은 성찬의 '은혜' 측면보다 '영광' 측면에 더 집착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교회의 거룩함과 성찬의 영광을 강조한 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놓치고 있는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집착은 목회적인 실패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셋째, '은혜'가 없는 '영광'의 목회는 실패하였다. 성찬 참여 불허는 당대의 교인들에게 하나의 '출교'와 같은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결정의 '진의'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데, 그 중 하나는 에드워즈와 교회 지도자간의 갈등이었다. 우리는 대부흥의 시발점인 에드워즈가 모든 면에서 완벽했으리라 기대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에드워즈의 목회에도 갈등이 존재했고, 결국 쫓겨나듯 사퇴하고 만 전력이 있었다는 것은 사뭇 충격적이다. 그런데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결말은 그의 신학적·목회적 경직성에 그 일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은 숭고하였지만, 죄인들에 대한 은혜와 오욕칠정의 허물투성이인 '죄인이며 성도 된' 교인들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였던 것이 아닐까? 미국의 여류 학자인 에이미 파오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에드워즈의 목회가 진정한 '사랑' -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고 역설해 왔던 삼위일체간의 조화로운 모습의 최고의 가치 - 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에이미 파오의 의견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본인은 에드워즈의 신학과 삶이 괴리가 있었다고 보고 싶지 않다. 그의 신학은 충분히 사랑을 강조하며 은혜가 있었는데, 그의 삶과 목회는 그렇지 못했다는 구분은 에드워즈에게는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 듯 하다. 물론 소위 '신학'과 '삶'의 구분은 오래된 구분이고, 많은 경우 신학과 삶이 괴리되는 것을 보게 되지만, 에드워즈의 경우는 오히려 신학과 삶이 너무나 경직되게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그가 집착한 하나님의 영광에 하나님의 은혜가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에드워즈 개인의 영적 생활이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와 부인과의 아름다운 연합과 사랑 이야기는 그의 전기와 함께 이미 베스트셀러일 정도였다. 에드워즈가 젊을 때 쓴 [결심문]과 부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등은 에드워즈 자신의 삶이 얼마나 반듯한지 알 수 있다. 본인은 이것이 그의 목회적 실패의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우 의아한 추론일 수 있겠지만, 어느 학자는 에드워즈의 개인적인 신앙과 그의 가정생활의 '완벽함'이 그의 신학의 주제인 '미' '조화' '탁월함' 그리고 '영광'과 무관치 않다고 말한다.

에드워즈 자신이 어려서부터 엄격하고 절제된 청교도 목회자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자라왔던 것이다. 결혼까지도 - 동시대의 존 웨슬리와는 달리 - 가장 마음에 맞고 영적이고 아름다운 사라 피어폰트와 맺어져 죽을 때까지 스스로 고백하듯 삼위일체의 일체감을 그녀와 누렸다고 한다면, 그의 목회적 그림자를 여기에서 찾는 것은 시기에 찬 비판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약점을 통해서도 배우라

결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에드워즈에 대한 비판의 글을 재고해 보려 하였는데, 그의 신학적 일관성과 삶의 완전함을 도리어 드러낸 꼴이 된 듯 싶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내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면이다. 에드워즈를 한국교회에 혹은 현대교회에 정황적인 고려 없이 바로 적용하는 것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의 삶과 신학의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가 쓴 대표작 한 권의 몇 줄을 가지고 섣불리 우리의 신학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별히 복음주의적 부흥의 기수로 얄팍하게 포장하여 그의 밝음과 어두움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하는 시류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위대함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위대한 유산을 진정 바르게 우리의 것으로 삼으려면 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아래에서 조망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의 장점 뿐 아니라 그의 약점을 통해서도 배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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