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재물에 대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자

채천석 | 2017.11.04 10:15

성경 누가복음 16:1-9에서는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라고도 하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도 하는 말씀이 나온다. 이렇게 제목이 달라지는 것은 이 비유가 그만큼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와 관련한 주된 질문 중에 하나는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가지고 허락도 없이 맘대로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어째서 주인은 이 청지기를 지혜 있다고 칭찬하는가?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한 가지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시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어차피 모든 재물은 불의하다. 재물의 획득이란 본래 매겨진 상품이나 돈의 원가에 이윤을 붙여 남김으로써 발생한다. 돈을 이자 없이 돌려받고, 물건을 남는 것 없이 그대로 팔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얻은 돈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의하고, 또 본래 이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합당하게 써야 한다.

 

재물에 대한 청지기 의식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내가 번 돈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아직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 물질을 간수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지혜로운 청지기는 자신이 해고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빚을 일정 부분 탕감해줌으로써 미래를 준비하였다.

 

여기서 청지기가 함부로 빚을 탕감시켜 준 것은 불의할 수 있지만, 청지기가 이자 부분이나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수수료를 공제해 주었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원금에 해당하는 빚을 발생시킬 수 있었는데, 이런 고리대금업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빚진 자들에게 일정한 양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은 어쩌면 청지기의 주관 하에 할 수 있는 역량의 일종이었을 수 있다. 아울러 주인은 이 청지기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빚진 자들의 빚을 갚아준 것을 칭찬하고 있다. 청지기가 장래에 있게 될 그의 운명을 잘 준비하고 있다고 주인은 판단한 것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청지기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빚진 자들은 우리의 이웃들이다. 지혜로운 청지기의 비유에는 종말론적인 사상이 담겨 있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한다. 돈으로 친구를 사귀어야하고, 가난한 이웃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기부문화가 풍성하다. 베푸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나라가 부요해진다. 주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므로, 우리는 불의한 재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돈은 매력이 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인기와 인정을 받게 하고, 편하게 살게 해주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돈과 인격은 별개의 문제다. 돈과 지식도 별개의 문제다. 돈으로 인격과 지식을 살 수 없고, 돈으로 구원을 살 수도 없다. 오히려 돈이 구원과 멀어지는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돈으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쓰고, 주변에 추위에 떨고 있는 분들이 안 계신지 돌아보라. 어느 덧 연말이다. 한해를 정산하며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자.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020개(6/51페이지)
편집자 칼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920 [신성욱 칼럼] 영적인 판단으로 투표하자! 신성욱 2022.03.08 20:11
919 [신성욱 칼럼] 이어령 전 장관의 이사(House moving)~‘END’에서 ‘AND’ 신성욱 2022.02.28 06:49
918 [신성욱 칼럼] 작은 친절과 배려의 위력 신성욱 2022.02.26 15:23
917 [신성욱 칼럼] 헌혈 못해 아이비리그 명문대에 낙방? 신성욱 2022.02.24 12:59
916 [신성욱 칼럼] 설교자 100% vs 청중 100% 신성욱 2022.02.23 08:34
915 [신성욱 칼럼] 원수 사랑의 비결은? 신성욱 2022.02.19 12:17
914 [신성욱 칼럼] 어떤 신앙의 부모와 배우자가 될 것인가? 신성욱 2022.02.18 17:18
913 [신성욱 칼럼] 우리에게도 이런 대통령이 있다면 신성욱 2022.02.16 08:59
912 [신성욱 칼럼] 긍휼의 은사를 주옵소서! 신성욱 2022.02.16 08:56
911 [신성욱 칼럼] 바른 선택이 가져다 준 선물 신성욱 2022.02.11 16:32
910 [배영진 칼럼] 코로나시대와 취약계층 배영진 2022.02.07 10:29
909 [강도헌 칼럼]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강도헌 2022.02.04 10:34
908 [강도헌 칼럼] 과연, 어느 한쪽만 옳을까? 강도헌 2022.01.29 07:24
907 [강도헌 칼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강도헌 2022.01.21 10:17
906 [신성욱 칼럼] 신뢰회복이 급선무 신성욱 2022.01.21 06:23
905 [신성욱 칼럼] 열린 자세로 성경 속 보물 상자를 오픈하라! 신성욱 2022.01.17 08:42
904 모바일 [김성욱 칼럼] 영혼의 의사 김성욱 2022.01.16 10:10
903 [강도헌 칼럼] 페리코레시스 강도헌 2022.01.14 04:35
902 [강도헌 칼럼] 애국(愛國) / 애민(愛民) 강도헌 2022.01.08 09:59
901 모바일 [김성욱 칼럼]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 김성욱 2022.01.05 22:2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