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크리스천 연애의 필수 조건 Part 1/3

조정의 | 2022.07.08 01:10

‘조건’이란 말은 오늘날 환영받지 못한다.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상태나 요소”라는 의미를 갖는 ‘조건’이 ‘연애’ 뒤에 붙는 것은 더욱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유명한 대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연애와 사랑에 ‘조건’이 붙는 것을 혐오한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연애와 사랑엔 제약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만나고 사랑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랑을 나누는 당사자들만 진심이라면 사랑은 절대 죄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조건’은 태초부터 있었다. 죄가 있기도 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각종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유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제한을 두셨다(창 2:16-17).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조건과 자기 마음이 원하는 것 중 안타깝게도 후자를 택하는 죄를 범했고,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려는 반항심, 악한 본성인 죄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됐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준다.


크리스천은 바로 이런 상태로부터 구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그들의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는 일이었다(갈 5:24).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고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다른 말로 하면 크리스천은 이제 육체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과 능력을 따라서(빌 2:1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과 우리 행복을 위해 세우신 질서대로, 그 뜻대로 행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다(엡 2:10).


“무엇을 하든지”에 크리스천의 연애도 포함될까? 당연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그분의 영광과 결코 대립되지 않는 크리스천의 참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연애의 필수조건은 무엇일까?


필수 조건 1: 이성

연애의 대상은 반드시 이성이어야 한다(동성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에 근거한 기본 중의 기본 조건이지만, 오늘날엔 이 기초부터 매우 위태롭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을 맡았다(창 1:26-28). 이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사람을 생물학적인 남자와 생물학적인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2:24). 죄가 인류를 덮치기 전,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커플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자기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창조하실 때(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열두 지파 민족이 되기까지 그들을 기르시고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자기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레 26:12).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의 뜻에 따라 살면서 이방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길 원하셨다(렘 13:11). 그래서 주신 율법 중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연애의 필수조건을 제시하셨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그릇”된 일이며, 순리가 아니라 역리 곧 하나님이 세우신 조건을 무너뜨리고 그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롬 1:24-27). 크리스천 중에 구원받기 전 이런 일을 했던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편지하면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했다(고전 6:11). 그리고 그들에게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하리라”라고 강력히 경고했다(고전 6:9-10). 구원받은 자는 다시 과거의 잘못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였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에게 연애의 대상이 이성으로 제한된다는 건 굳이 얘기할 필요 없는 기본 조건이겠지만, 어떤 크리스천에게는 참으로 힘든 요구가 될 수 있다.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크리스천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욕구가 아무렇지 않은 것이나 일종의 정신병처럼 실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금지된 것을 강하게 원하는 다른 종류의 정욕이 실제인 것처럼 동성에 관한 욕구 또한 실제다.


하지만 하나님이 크리스천 연애에 필수적으로 요구하시는 조건과 경쟁하는 모든 문제의 본질은 같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것인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의 싸움이다(갈 5:17).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갈 5:16).


필수 조건 2: 미혼(다른 남자나 여자의 배우자가 아닌 사람)

두 번째 조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할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간음이 형법상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15년 2월 간통죄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그 이유를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연애의 대상으로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사람을 골라도 그것이 당사자들의 ‘결정’이라면 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륜을 미화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세상의 풍조를 보여 준다. 그러면 크리스천도 이런 세상의 풍조를 따라야 할까?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간음’을 무섭게 처벌하도록 하셨다. 간음에 가담한 두 사람 모두를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0:10)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이런 금지된 쾌락을 즐겼던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은 “간음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전 6:9-11; 히 13:4).


크리스천은 ‘간음’의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그렇지 않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니 간음하십시오’라는 노골적인 문구로 결혼한 남녀를 유혹하는 불륜 조장 사이트 애슐리 매디슨이 해킹되어 모든 회원 목록이 공개된 적이 있었다(2015).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공개된 회원 중에는 기독교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회원이었던 목사들 중 어떤 목사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크리스천도 간음의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 유혹에 이끌려 정욕대로 행하면 세상이 말하는 거짓을 믿게 된다. 성적 자기 결정권에 따라 두 성인 남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결혼한 자가 배우자에게 “매여 있다”고 말한다. 재혼하는 여성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필수조건은 “남편이 죽으면”이다(고전 7:39). 그 조건이 충족되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수 있다. 여기 하나의 조건이 또 따라붙는데, 바로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천 연애의 세 번째 필수 조건이 되는데,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의 삶의 목적이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바울을 비롯하여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소수의 충성된 크리스천에 관한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따라오는 구절을 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크리스천이여,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가? 당신을 위하여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는가?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자 그리고 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주를 위해 살고 죽는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욕구와 바람을 주님 앞에 굴복시켜야 한다(고후 10:5).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당신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천의 연애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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