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6.중세의 수도원 운동

안영혁 | 2003.06.29 01:09
6.중세의 수도원 운동

중세 전기 수도원 운동까지
사막의 교부들이 고행 수련을 하던 시절에 수도원은 이미 교회의 일반적인 수행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은 정치한 신학을 하는 가운데도 항상 영성 수련을 사모하였고, 어거스틴같은 이는 목회 활동 가운데도 영성 수련을 하는 생활 속의 영성수련의 전통을 세웠다. 그는 이미 주교좌 안에 수도원을 세웠고, 적어도 이 시대에 관한 한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은 그가 사막에 있든, 교회에 있든 하나님과 일치되는 영성 수련에 가 있었다. 바로 이런 전통 하에서 교회는 내내 수도원의 도움을 입고 있었다.

중세 전기의 시작은 서로마의 멸망과 어거스틴 신학의 정립으로 대략 규정할 수 있다. 이 시대는 가까스로 공인을 받은 교회가 다시 서로마의 멸망을 보며, 나름대로 서 갈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런 교회에 두 가지 행운은 하나는 현실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 어거스틴의 현실주의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세운 어거스틴의 신학이었고, 하나는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기독교는 이제 무너진 서로마의 옛 보호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 파트너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계획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야만족들이 점차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거나 토착 민족들이 기독교화 되는 시기였다. 클로비스의 개종에서 보듯이 야만족들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원했고, 이것은 기독교에로의 개종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개종은 종교적 상황이지만, 여기에 병행되는 것이 있었으니, 교회에 토지를 바치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교회와 수도원이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을 이끄는 지도자가 그 시대의 명망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에게서 땅을 희사받았고, 그것을 교회나 수도원의 재산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수도원은 청빈과 포기가 이상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나 수도원은 부가 몰리는 곳이 되었다. 당연히 교회와 수도원은 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5세기의 수도원은 맹아적이고, 6세기에는 차츰 수도원이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이 수도원들은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RM으로 알려진 「스승들의 규칙서」가 먼저 있었고, 이것에 의존한 것으로 보이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집인 RB가 있었다. 베네딕트는 6세기 이탈리아의 수사로서, 먼저 로마에 가까운 수비아코에 수도원들을 세웠고, 나중에는 카시노 산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전한 규칙으로 알려진 RB는 실질적이면서도 지혜가 넘치는 교리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 규칙은 엄하기 보다는 따뜻하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과 공동체에게 마음을 즐겁게 하는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라 확언한다. 또한 모든 조언들은 연약한 자들을 든든히 세워주고 용기있는 자들을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이 규칙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기도와 노동, 순복과 개인의 양심,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독거생활과 공동생활, 기쁨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것, 엄격함을 행하는 데 있어서의 관대함과 신중함, 대인관계에서의 침묵과 사랑, 수도원장의 권위와 수사들의 견해 표명의 권리 등 훌륭한 균형을 보여준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중세 기독교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 대 그레고리라 불리는 그레고리 1세이다. 그로 하여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의 중세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이상대로 수도사들은 관상에 힘을 기울여야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목회로 나와서 연약한 자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선교사로도 파송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는 이 일을 실행하였으며, 그로 하여 7세기의 수도적 르네상스가 가능했다.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 대제의 시대에는 제국 전역에 60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수도원의 종류도 왕립 수도원에서 시골 수도원까지 다양하였다. 이 때에도 규칙은 RB에 의존했다. 7세기에 르네상스를 맞고 8세기에 극성기에 도달했던 수도원은 9세기 말과 10세기에 이르면서 일종의 제도적 쇠태 상태에 빠졌다. 세속의 왕과 영주들은 계속 사원의 재산을 통제했고, 자격없는 성직자들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평신도를 그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다. 수사들은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아두는가 하면 수도원 밖에 아내와 자녀를 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클뤼니의 수도원이 그 중 중요한 것이었다. 윌리암이 이 수도원을 세웠는데, 내용인즉 수도원을 로마 교황의 교구 보호 하에 두고 다른 교회의 권력이나 세속 권력의 개입을 금하였다. 11세기에 이르면 여기에 그레고리 7세의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은 말하자면 그레고리 개혁의 전조였다. 그런만큼 클뤼니의 개혁도 철저한 데까지 미치는 것은 못되었고, 수도원은 세속 권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을 뿐이다.

12세기에는 신의 존재론적 증명으로 유명한 안셀무스가 있다. 그의 깊은 학문은 단지 학문적인 깊이에로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앞선 많은 선조들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하였으나, 유독 안셀무스가 그렇게 말한 것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가 참으로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그의 그런 말이 단지 수사가 아니라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의 신의 존재론적 증명은 세월이 지나도 그 오묘함이 완벽하게 풀리지 않는 가운데 칸트와 같은 철학자도 들먹인 바가 있고, 오늘에는 칼 바르트도 언급을 하기에 이른다. 아무래도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구성적 원리에 따른 이해가 되지는 않겠으나, 역시 전적 타자이신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믿음을 보낸 그의 학문적 태도의 결말일 것이다. 12세기로 들어 서면서 차츰 학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학문적 깊이보다도 오히려 중세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애 사건으로 유명한 사람이 피터 아벨라르이다. 그는 연인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과 임신, 파문 등의 무수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성자로 이름을 남긴 동시대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아벨라르에 대해서 아주 생리적인 반감을 가졌던 듯하다. 나중에는 그도 아벨라르를 용서하였으나, 당대의 낭만주의자 아벨라르는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사랑과 미래를 다 빼앗긴 신선한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빅토르의 위그 같은 이도 있는데, 그는 보다 폭이 넓고 관대한 학문적 태도를 가졌던 것 같다. 이 동 시대의 세 학자 즉 아벨라르와 베르나르 그리고 빅토르의 위그는 비교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베르나르는 정통주의 성자였고, 아벨라르는 자유주의자에 가까웠고, 위그는 절충주의자였다. 베르나르는 정통에 너무 매달렸고, 아벨라르가 너무 자신의 재기와 낭만에 휘날렸다고 한다면 위그는 차분히 가장 학문적으로 활동했던 그 시대의 대가였다. 베르나르등은 시토회의 수도사였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13세기에는 혁신적인 형태의 수도원이 다시 나타나는데 바로 탁발 수도원들이다.

도미니크 수도회
탁발 수도원 하면 우리는 먼저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를 떠올린다. 도미니크 구즈만(1170-1221)은 1216년에 설교자들의 수도회로 도미니크 수도회를 세웠다. 13세기초부터 설교가 되살아나야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심지어 이노센트 3세는 주교들은 “짖지 않는 개”라고까지 하였다. 도미니크는 이런 불평보다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던 형태로 둘씩 짝을 지어 수사들을 온 세계로 파송할 생각을 하였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를 진정으로 중시 여겨서 설교는 기도와 성례 집행보다도 우선해야하는 일로 여겼다. 설교를 해야하는만큼 도미니크 수도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에서는 공부가 가장 필수적인 생활의 요소였다. 이리하여 모든 수도원에는 상주하는 신학 강사가 있었고 도미니크 수도원은 신학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과도한 헌신 때문에 어리석게 되는 것을 경멸하였으며, 13세기 중반경에 도미니크 수도회는 정교한 학문체계와 포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이런 관점으로 하여 도미니크 수도회는 대 알버트(1200-1280)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철저히 지성주의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그런 면에서 불세출의 대작이며, 그후 줄을 이은 모든 조직신학서들의 모범이다.

물론 학문을 중시했지만, 그래도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른다는 이상은 버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랑하면서 탁발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긴 교회의 일반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탁발과 순회 설교를 시도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13세기에 새롭게 이루어진 수도원의 이상은 예수와 초대 교회의 생활 방식이 그 이론적 근거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수도원의 원래 관점을 잘 따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 수도회는 노동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일 자체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탁발은 하되, 그래도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설교를 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차츰 청빈의 실천도 퇴색하고 1475년에는 황제의 칙령에 따라 수도회 전반에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것은 심지어는 수도사 개인의 재산으로까지 확장되게 되었는데, 토마스는 “모두에게 속한 물건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상당히 자본주의적인 언급까지 한 바가 있다. 어쩌면 토마스의 이런 태도는 앞으로 나타날 교회의 개혁의 상황과 도시에서의 부르조아의 삶을 내다보게 하는 말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대로 도미니크 수도회는 순종을 하면서도 그리 엄격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어차피 도미니크 수도회는 은둔하여 수도하는 수도회가 아니라 설교하는 수도회였고, 그런만큼 떠돌아 다녔고, 수도회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다 관리할 수도 없었다. 수도사들은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미니크 수도회는 개인의 책임을 중시 했으며, 예방보다 아량을 강조하였다. 또 전통적인 수도회에 기대되는 공동체적 수련에 대한 강조도 적은 편이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수도회 자체에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종교적 규율이 어떤 면에서 신적인 율법의 권위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도미니크 수도회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들의 수도회의 법(이들은 어거스틴의 규율을 따랐다)이 인간의 법에 불과하며 전혀 초자연적인 성격이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에 설교를 하고 설교를 위한 지적인 활동을 해야한다고 생각되면 수도원의 시간표와 관계없이 나름의 리듬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훔버트는 매우 활동적인 생활을 하는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하게 수용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사들이 사람들 속에 머무는 것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하였다. “온갖 유혹이 들끓는 도시는 신앙을 위해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을 전하는 사도적 봉사에는 설교자들이 도시에 있어서 묻힐 수 있는 어떤 얼룩이라도 충분히 씻어내고 남을 선이 있다고 하였다. 아주 대담하고도 현실적인 자기 규정이자, 수도의 규정이며, 시대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만큼 도시는 변모하고 있는데, 수도원은 지나친 정적주의에 빠져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도미니크 수도원을 배우는 의미는 바로 이런 점을 배우는 것이리라.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지 아니한가? 그들은 이미 도시의 문제를 꿰뚫고 있었다. 우리가 탐욕 가운데 지내다가 지치고 다쳐서 겨우 깨닫게 되는 도시의 황망스러움을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이미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깨달음이었다면 우리가 새삼 신학대전을 분석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참으로 지성을 중시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적인 삶이 충분히 진지하게 이루어질 때 어떤 자비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진리를 전하고 싶은 동기가 일어나게 된다면, 그 자체가 경건의 참된 형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경건의 소원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지성적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지성적인 사람이 어떻게 경건의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밝혀주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독특한 기여의 한 단면이다.

토마스는 이와 함께 매우 상식적인 경건들을 변호한다. 그는 종종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긴 기도만 좋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필요에 따라 짤막하게 하는 기도가 유익하다고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는데, 노골적인 간구의 기도는 그것이 다소 욕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런 기도는 온 세계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은 결코 자연 세계의 작용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초자연성이란 자연성을 거스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데 있는 것이라고 그 관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프란시스 수도회
프란시스 수도회는 설립자 프란시스코가 누구보다 중요하다.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은 나 프란시스에게 이런 식으로 속죄를 시작하게 허락하셨다. 내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나는 문둥병자들을 보는 것이 매우 괴로웠다. 그런데 주님은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내가 그들과 헤어졌을 때 내게 쓰라리게 보였던 그것은 영혼과 몸의 달콤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얼마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회심의 동기였다. 그러나 그가 신앙적 체험을 한 것은 참으로 많다. 그는 특별히 신비적이자 소박한 신앙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결정적인 체험에 이르기 전에, 그는 꿈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가 하면, 기도 생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였다. 내용은 모두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었고,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세우라는 말을 듣고 그가 교회 건물의 허물어진 부분을 수리했던 것은 참으로 소박한 경험이다. 그는 그런 체험들 가운데 교회가 허물어진다는 것은 건물이 허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회가 허물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런 많은 신비 체험들과 함께 그가 얻었던 신앙적 감동은 자비의 경험이었다. 그는 나환자들에 대한 경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과 가난으로 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의 말을 따르면 그가 이 불쌍한 환자들을 수용하게 된 것은 스스로 혐오와 편견을 극복하는 영웅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서 그를 자극하고 감동시킨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프란시스코가 사모한 성령은 스스로를 굴욕 당하고 멸시받은 그리스도의 낮아진 육체와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수도회가 시작되었는데, 초기에 8명이 모였을 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파견하였다. 열두명이 되자 교황(당시는 이노센트3세)의 인준을 받았고, 이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불어났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관대하게 반응하였는데, 이것 또한 주께서 만 사람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뒤따른다는 관점이었다. 그리하여 “논쟁이나 말다툼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프란시스코는 시대적으로 참으로 특이하다. 도미니크만 해도 차츰 합리화되어 가는 세태를 반영하였다. 그들의 관대함과 자유스러움은 현실이기는 했지만, 보다 지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는 그런 면에서는 훨씬 더 예수의 행적에 가깝게 살았다. 그는 중세의 정치적 기독교와 합리화가 고작이었던 개혁의 흐름들에 새 힘을 불어넣는 가장 포괄적인 수련의 선구자였다.


갈멜 수도회의 영성
갈멜 수도회는 여타의 수도회와는 달리 카리스마적인 설립자나 영웅적인 초기 인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약점은 아니었고 오히려 갈멜 수도회의 영광은 그 놀라운 무명성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영웅이 없는 이점에 착안하여 이 수도회는 오히려 선지자 엘리야를 자신들의 설립자로 인식하였다. 그와 함께 그들은 마리아를 수도의 귀감으로 삼았다. 엘리야가 교회에서의 묵상의 사명을 불러 일으켰고, 마리아는 그들을 예수와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갈멜 수도회의 설립은 그들의 생활신조로 예루살렘 대주교 알버트가 승인한 “삶의 형식(vitae formula)"이 나온 1206-14연간으로 추정된다.

갈멜 수도회라는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은 산상에 은둔하여 묵상하는 것을 수도의 이상으로 삼았다. 특히 갈멜 수도회 초기를 조금 지난 즈음에 총장이었던 니콜라스는 갈멜 수도회가 점차 탁발수도회로 변화하여 가는 데에 큰 반감을 품고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갈멜 수도회를 탁발 수도회와 다른 수도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갈멜 수도회의 여성 카리스마였던 예수의 테레사도 공적인 사역에서 떠나 있는 갈멜 수도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갈멜 수도회는 한편 은둔 수도를 이상으로 가지면서 한편 사회 봉사적인 일에 참여하는 형태의 수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수도회를 이끌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런 형태였으나, 오히려 이 모순이 그들을 건강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 수도회의 은둔적 이상을 마음에 품고, 그러나 한편 그 이상을 세상의 그 누구와도 나눌 마음을 가지고 탁발을 수행하였다. 오늘로 말하자면 탁발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며 상담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들에게 초기 카리스마가 없었던 것은 독특한 특성을 남겼다. 수도회들이 자신들의 규율로 받은 규칙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카리스마의 생애나 가르침에서 수도의 영향을 더 받은 것에 비하면 갈멜 수도회는 그런 면이 적고 오히려 규율에 아주 충실하였다. 알버트의 규율로 불리는 그들의 규율에 충실했는데, 그들의 규율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했던 것은 오히려 그들이 그 규율을 문자 그대로 지켰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그들은 14세기 후반 갈멜 수도회의 한 지부장이었던 필립 리봇의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 수도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여기에 그들이 생각하는 수도의 이상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카리스마가 없어서 두드러지지 않았고, 그들의 무명성이 오히려 그들의 영광이며, 은둔과 사역이라는 양면의 모순을 보였지만 그 모순이 오히려 그들을 지킨 수도회 갈멜 수도회는 현대적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볼 만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들이 가졌던 「알버트의 규칙」 또한 수도자들이 어느 정도의 규칙을 현실적으로 지키며 살았는지를 알아본다는 면에서 연구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영성
성 어거스틴의 광야 수도회는 12,3세기 이탈리아 은둔 공동체들이 「성 어거스틴 규율(RA)을 토대로 서로 연합한 데서 생겨났다. 1256년 교황 알렉산더가 이 수도회를 인준하던 때에 이 수도회는 이미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 그 관구를 가지고 있었고 13세기 말 경에 80개의 수도원을 헤아렸는데, 이 수도원들은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도시에서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이런 면은 어거스틴이 주교로 있으면서 영성 수련을 하고자 하였던 그 원래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어거스틴 수도회는 학문에 힘써서 수도회 소속의 많은 대학들에서 종교적 신학적 훈련을 실시하였고, 또 수도원 소속의 수도사들은 파리대학,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신학 공부는 말하자면 그 수도회의 한 토대였다.

이들의 영성은 그들이 카리스마로 여긴 어거스틴의 정신과 그의 「규율」로 분명히 특징지워지는데, 그 가장 근원적인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향하여 자비를 베푸는 예수의 정신에 있었다. 예수에게로 향하는 그 지향은 한편 사도행전적 공동체를 통한 의 사랑의 지향성을 겸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 무엇보다 사랑이 수도원의 핵심 원리였는데, 그 사랑은 일상 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고려와 인내, 논쟁 후의 즉각적인 화해, 공동체를 위한 매일의 비이기적인 노력등으로 실현되었다. 한편 이러한 사랑과 함께 율법 아래 있는 종이 아니라 은혜 안에 굳게 선 자유인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사도적 활동과 관상생활의 연결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리하여 어거스틴 수도회는 수많은 학자와 학문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은 지성이 아니라 사랑이었으며 그래서 의지가 중심적인 영성적 가르침이었다. 그들은 신학을 사색도 실천도 아닌 정적인 지식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 수도회의 특성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기본적으로 사랑에 있다.
2.영적인 삶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 협동을 선결 조건으로 가진다.(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 같은 혼합적 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활동하시기를 기다림을 의미한다)
3.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알고 행하려는 인간의 힘이 타락 때문에 손상되었음을 믿었다는 의미이다.
4.따라서 이 수도회는 자주 선행의 결핍을 강조하였고, 반면 업적이나 공적을 칭찬하는 독선에 대하여도 경고한다. 그러니까 어거스틴 수도회는 사랑을 가지고 선행을 하는 것을 원리로 삼고 권장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개인들의 독선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사랑의 균형을 유지했던 것이다.
5.모든 선한 공적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사랑이 소중하며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온다는 것이 어거스틴 수도회의 요점이라 하겠다.

어거스틴 수도회의 이러한 내용들은 매우 잔잔한 중요성을 갖는다 하겠다. 중세는 이미 그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한 때에 가장 치명적인 공격은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의 主意주의였다. 그것은 바로 스콜라 철학의 황혼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어거스틴 수도회가 여전히 학문에 전념하면서 이것을 사랑의 의지론으로 끌고간 것은 중세에서 조용히 새 시대에로 나아가는 힘이었다. 예를 들어 루터에게 정신적 영향을 끼치고 그를 이끌었던 것으로 알려진 요하네스 폰 스타우피츠도 어거스틴 수도회의 수도사였다. 어쩌면 어거스틴 수도회의 한켠에는 이미 조용히 중세와 스콜라 철학의 황혼을 인식하는 정신이 심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루터는 말하자면 어거스틴 수도회의 영성적 배경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대표적인 저술가인 페트라르카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거스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루터도 페트라르카도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지극히 의존하였고, 그 열성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새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어거스틴 수도회는 종교개혁과 새 시대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가 믿음의 선조로 그 누구보다 어거스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에도 기인한다고 하겠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021개(25/52페이지)
편집자 칼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41 모바일 [김성욱 칼럼] <논쟁의 태도는 사랑이다> 김성욱 2019.02.19 07:05
540 모바일 [김성욱 칼럼] <양심의 민감 단계> 김성욱 2019.02.19 07:04
539 [조정의 칼럼] 질의응답(2):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불순종하는 남편 조정의 2019.02.18 21:35
538 [서상진 칼럼] 교회는 한 믿음의 공동체 서상진 2019.02.18 06:57
537 [서상진 칼럼]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 서상진 2019.02.16 05:13
536 모바일 [김성욱 칼럼] <좁은길> 김성욱 2019.02.14 15:15
535 [서상진 칼럼] 목회자와 식사 대접 서상진 2019.02.14 09:40
534 [서상진 칼럼] 오래 전 불렀던 찬송의 기억 서상진 2019.02.10 10:06
533 모바일 [김성욱 칼럼] <목회자를 경시하는 풍조에 관하여> 김성욱 2019.02.10 09:46
532 모바일 [김성욱 칼럼] <주님, 그리고 베드로> 김성욱 2019.02.10 09:44
531 [송광택 칼럼] 성육신 송광택 2019.02.08 23:56
530 [송광택 칼럼] 세상을 놀라게 하라 송광택 2019.02.08 23:52
529 모바일 [김성욱 칼럼] <비판, 비난 그리고 형제우애> 김성욱 2019.02.07 10:49
528 [서상진 칼럼] 명절에 생각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서상진 2019.02.06 11:05
527 [조정의 칼럼] 질의응답(1):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갖게 하라"는 말 조정의 2019.02.04 10:30
526 [서상진 칼럼] 목회와 헌금 서상진 2019.02.03 08:57
525 [서상진 칼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서상진 2019.02.02 11:58
524 [서상진 칼럼]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상진 2019.02.01 04:57
523 [서상진 칼럼] 나는 무엇에 미쳐있는가? 서상진 2019.01.29 15:48
522 [서상진 칼럼] 예수 잘 믿어도 암에 걸립니다. 서상진 2019.01.29 04:54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