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묵상] 갈보리로 가는 길의 즐거움

이종수 | 2004.03.23 12:02
갈보리로 가는 길의 즐거움
The Joy of the Way to Calvary

우리 주님은 이 일에서 조차도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W. M. 클로우

사람들은 빌라도의 심판석에서 갈보리로 가는 길을 일컬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즉 고통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이 이름이 뜻하는 바, 그 길이 걸음걸음마다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며 그 길에 대한 단순한 성경 말씀이 우리의 슬픔을 매번 회복하고 심화시킨다면, 이 이름은 적당한 이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것이라거나, 또는 눈으로 보이는 그분의 비애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러한 통찰은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끼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름은, 우리의 사고를 오염시키고 우리의 눈을 다만 십자가에서 당하신 육체적 고통에만 묶어두어서 복음서의 침묵과 서신서의 승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 곧 육신에 대한 영의 빛나는 승리를 보지 못하도록 한 로마 카톨릭의 해독에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으로 불렸습니다(신약성경 외의 자료에서). 그 이름에 대한 복음서의 가장 근접한 접근(우리도 상당한 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잘못 판단할 수 있는)은, 무지와 오해 가운데 예수님을 선지자 예레미야로 생각했던 경우이고,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즉시 일축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습에서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바로 예수님께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기쁨의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주의한 독자라도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배어나는 평안함과 고요함, 그리고 그분의 생애에 깃들어있는 완전한 평안을 놓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족함”이란 단어는 사도 바울이 이룬 숭고한 성취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또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생애에 훨씬 더 적합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실로 넘치는 기쁨 가운데 사셨습니다. 외로운 언덕 사이의 고요한 침묵이, 갈릴리 호수가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빈들에 만발한 백합화며 온갖 들풀의 영광이 세상 그 어느 시인들도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즐거움은 바로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성육신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겸손의 위력이 우리를 덮는 것과 아울러 우리 마음에 어두운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그분의 열정을 잊어버린 채 그 끊임없는 기쁨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마을에서의 청년시절은 터질듯 가슴이 벅차오르며 간절한 열망으로 불타던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 동양사회의 삶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여서 그 극심함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가난은 오히려 그분에게 매이지 않는 삶을 제공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했다면 우리는 저열한 수준에서 그저 안락한 삶을 몹시도 갈망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우리가 진정 이 기쁨의 원천을 이해할 때,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비밀을 알아낼 때, 우리는 우리 주님이 경험한 숭고한 경험 속에 깃든 그분의 외로움과 홀로됨에도 불구하고, 또한 인간의 죄와 슬픔이 가져다주는 그 무거운 짐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최후의 무시무시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온몸을 전율하던 그 기쁨이 인간 중 그 누구도 감히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가셨던 그 갈보리 길을 더 가까이서 따라가 보면, 우리는 저 깊은 곳으로부터 결코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후에야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저 번민과 고난의 겟세마네 문턱에서 십자가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시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1)

자, 이제 갈보리로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밤 -그 중차대한 시간 동안 깨어있는 사람을 찾으시고 교훈하셨던 밤- 은 지나갔습니다. 갈보리의 환희에 찬 기쁨과 분별력 있는 사랑은 마지막 만찬 후에 드려진 대제사장의 기도(요한복음 17장; 역자주) 속에서 고요히 자리를 잡았으나, 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시기심과 비겁한 두려움은 결국 대제사장의 바깥뜰과 빌라도의 심판 자리에서 무자비하고 냉혹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저 위대한 날을 알리는 아침이 밝았습니다. 시몬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고, 이제 주님은 이 모든 일 가운데 마지막 한 행위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계십니다. 오히려 의기양양함이 주님의 영을 채우고, 능히 고통을 정복하고 슬픔을 소멸시키기에 충분한, 엄몰하는 파도처럼 쇄도하며 밀어닥치는 기쁨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여인들의 울부짖음이 주님의 귓전에 들립니다. 주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몸을 돌이키시는데, 그들이 주님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시고, 또한 주님의 최고의 행위(His crowning act)에 대해 그릇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눈물을 책하셨습니다. 순간 주님께서는 기쁨을 잃으셨으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좌우되는 모든 인간적인 기쁨을 잃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신령한 것들 속에서 지극한(deep)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기쁨, 신령한 기쁨, 그리고 영원한 기쁨으로서, 우리 주님의 승리에 찬 영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었으며, 그 기쁨이야말로 갈보리로 향하는 길을 승리로 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갈보리로 가고 있는 길에서 예수님이 누리고 계신 이러한 기쁨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러한 지식이 우리의 소유가 되어, 우리도 그분의 기쁨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시다.
그리스도의 기쁨의 첫 번째 원천은 그분의 무죄함(His SINLESSNESS)에 놓여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위대한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들은 우리 마음과 생각에 큰 경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위대한 주제는 예수님의 무죄함입니다. 여러 수세기 동안 인간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을 전개해왔으나 그분의 무죄함의 심연에 감히 이르는 데에는 턱없이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모든 말과 행위를 조사하고 비교하였지만, 도리어 그 모든 일들이 그분의 흠 없는 도덕적 아름다움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는 물음은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도전입니다. 오늘날 주님은 독보적인 위치에 계십니다. 그분만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사람들 가운데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았던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는 마치 하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청명함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무죄함의 기쁨에 대해서 여러분과 저는 사실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해당되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은 우리 모두 범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결핍(lack)이 무엇을 초래하는지에 대해 희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짐과 부끄러움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는데서 해방되어 마음의 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후회와 양심의 가책의 어둔 밤을 지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부정과 불법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속에 반역적인 욕망이 항상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어김없이 우리의 기쁨은 사그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악이 우리 속에서 정결케 되는 것을 경험했을 때, 우리에게 잠복해있는 몇몇 죄를 내어버렸을 때, 우리를 시험하는 유혹들을 이기고 우리 발아래 밟았을 때, 그때에 우리는 천사들의 사역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기쁨의 가장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조차도 아무런 흠도 없는 의로움 속에 있는 그분의 기쁨을 알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고소하는 소리가 전혀 없는 양심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인격적인 흠이라는 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심령을 생각해보십시오! 결코 부끄러운 일에 이끌린 적이 없는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구름 한점 없이 광채 나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셨던 영혼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죄로 인한 수치의 눈물로 그 볼을 적신 일이 없었고,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자, 이제 이와 같은 무죄성에서 나오는 깊은 기쁨을 이해하고자 노력해봅시다. 명랑한 아이들의 행복하고 꾸밈없는 웃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비한다면 그저 빛에 의해 여기저기 일그러진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중에도, 무죄한 삶의 광채가 그분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갈보리로 올라가실 때에도,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과거에 대한 의식과, 현재 성취하고 계시던 그 어려운 순종에 대한 의식이 어우러져 그분 속에서 고동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여인들의 눈물로 인해 그분의 심령 속에 있는 큰 기쁨이 오해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그리스도의 기쁨의 또 다른 원천은 그분의 섬김과 희생(His SERVICE AND SACRIFICE)에 있었습니다. 섬김의 기쁨, 나아가 희생에까지 이르게 하는 섬김의 기쁨은 어느 정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 사실을 마음 깊이 믿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요! 인간 행동의 전반적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그러한 자리에 앉을 때, 또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찬사를 받아서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할 때 가장 잘 나타납니다. 경험으로 이러한 어리석음을 다 깨우치지는 못합니다. 명백한 증거조차도 이에 대한 세속적인 믿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합니다. 곧 거룩한 섬김으로 성별되는 시간 속에서, 대담한 자기 부인의 날들 속에서, 그리고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하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들이 퍼뜨린 것과 다른 류(類)의 기쁨, 곧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참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완전군장을 하고 죽음을 무릅쓴 군인들은 순종에 대한 깊은 기쁨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편안한 야영천막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희생이라고 하는 외롭고도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상의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이해할 수 있듯이, 우리 인생 가운데 최고의 섬김과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곧 모성애입니다. 밤과 낮으로 기다려주고 지켜주었던 값과, 또 어머니가 치러야 했던 그 희생의 세월을 능히 계산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속에 있는 어머니의 기쁨을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장차 제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섬김과 희생이 슬픔 속에서도 어떻게 그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는지 말씀을 나누실 텐데, 그 기쁨이야말로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누리는 어머니들의 기쁨과 비교될 것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당신은 이러한 경험을 해본 일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가정에서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때, 당신이 궁핍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의 필요에까지 내려갔을 때, 당신 삶에 그러한 희생의 흔적이 역력할 때, 그때 당신은 기쁨의 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샘이야말로 모든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섬김과 큰 희생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늘의 기쁨을 뒤로 하고 떠나오셨던 그 때의 기쁨만큼 기쁨이 그 마음에 온전히 가득했던 때는 또 없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는 단지 그분의 심령의 기쁨에 대한 하나의 표시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헌신된 모든 시간 가운데, 자녀들로 기뻐하게 하시거나 애통해하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또 주님께 나아온 병자들을 치료해 주신 모든 행동 속에서, 그분의 목적지를 향해 옮기신 모든 발자국 가운데, 주님은 신령한 것들 속에 있는 그분의 깊은 기쁨 속으로 더욱 들어가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섬김과 희생 속에 있었던 이러한 기쁨이 갈보리로 향하는 길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웠고, 가장 슬펐으며, 또한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최고의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주님이 눈물의 길을 올라가실 때,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기진하고 버림받으며 곧 죽음에 처해질 그분을 위해 애곡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돌이켜 그들을 보셨을 때 그분의 입술에서는 승리의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생애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일을 향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의 목표를 성취하고 계시며, 그분의 최고의 섬김과 희생의 문턱을 밟고 계시며, 마침내 그분의 기쁨이 완전히 충만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아, 형제들이여! 만일 당신이 어떤 가련한 사람으로 다시금 마음을 즐겁게 하는 기쁨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만일 당신이 어떤 낭비된 인생이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나 그 영이 기쁨에 겨워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면, 만일 당신이 몇몇 아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의 그 짜릿함을 느껴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드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신 그 날에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신령한 기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쁨의 원천은 제가 생각하건대, 영적으로 성취한 사람들 안에 있는 깊은 즐거움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이러한 기쁨을 최고한 사람의 거룩함과 성화의 체험 속에 있는 기쁨(joy in the holiness and sanctification of men)이라고 부르겠는데, 이 기쁨이야말로 가장 신령하며 또한 가장 영속적인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죄인을 지켜보는 천사들의 임재 속에 있는 기쁨입니다. 모든 위대하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행복해하는 모습 가운데에서 이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내어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하는 모세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구약의 가장 매혹적인 성도 요나단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 안에서 다윗의 손이 강해지는 것을 보면서 가장 숭고한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 바울 -참으로 위대한 바울- 이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 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신령한 성취 속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실로 예수님의 비밀을 통찰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분의 섬김 속에 있었던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을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있었던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우리 주님이 십자가로 오르실 때 그분의 심령 속에 있었던 의기양양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 있었던 다음의 한 사건은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여러 가지 기쁨들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전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와서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순종한 이야기를 떠벌렸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인 일의 감정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아셨던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0-21). 이처럼 영적인 사역의 승리 속에는 기쁨이 있으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신하는 일에도 기쁨이 있고, 사람의 영적인 성취를 아는 지식 속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이 기쁨이야말로 모든 기쁨 가운데 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생애를 밝은 날로 만들어주는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쓸쓸하고 황량한 날들을 수없이 많이 보내셨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입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사람들을 축복해주셨지만, 사람들은 그 복을 거절했습니다. 젊은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섰을 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더욱 더 슬픈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그 밤, 유다는 스스로 자비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유다를 그토록 원하시고 원하시던 주님의 그 마음에 유다는 슬픈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밤새도록 그분의 발아래 앉아있었을 때, 마태가 세금 통을 내어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을 때, 삭개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하던 마음이 터져 나왔을 때, 주님은 그분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명의 물을 들이켰을 때, 주님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었습니다. 전에 죄인이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분의 발에 입 맞추고 자기 머리털로 씻을 때, 시몬의 떡은 그저 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향유가 그분께 부어졌을 때, 그분의 기쁨은 충만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한 여인의 영혼 속에서 그분 자신의 은혜의 영광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분께서 이제 자신이 달리게 될 나무를 보실 때,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던 그 순간, 그리고 몇 시간 후면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아버지 집으로 떠나가실 그 시간 동안에 그분이 누렸던 기쁨은 인간 마음이 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때 자신을 동정하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향해 하셨던 주님의 말씀보다 더 합당한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 중 그 길에서 너무도 많은 슬픔 가운데 있는 누군가에게 이 보다 더 합당한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라)!” 신령한 사람 속에 있는 기쁨은 여전히 인간의 마음 가운데 고동치며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를 요동케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시며 만족히 여기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충동적인 마음을 보시고 굳건한 마음으로 연단시키실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의 불같은 마음을 보시고 사랑의 마음으로 자라도록 해주셨으며, 도마의 의심하는 마음을 보시고 온전한 믿음으로 변화시켜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주님께로 향하는 것을 보실 때, 우리가 모든 악독과 모든 간계와 모든 외식과 시기심을 버리고 악평을 그치는 것을 보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을 보실 때, 주님은 진정 그 영혼이 수고한 것으로 만족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이유인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며, “모든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날”에 맛보게 될 기쁨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순수한 기쁨들을 고상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영혼에 최고의 기쁨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기쁨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최고의 기쁨, 곧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있기를 바라시는 그 기쁨은 갈보리로 향하는 길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 차고 넘쳤던 신령한 것들에 대한 지극한 즐거움(deep delight)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러한 기쁨 속으로 우리도 들어갑시다. 물론 우리는 무죄함의 기쁨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였으며 죄로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에 부합된 사죄의 기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기쁨,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섬김과 희생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고침을 받고자 그 마른 손을 내밀며, 채움 받고자 하는 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활한 이기심을 가지고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신령한 인격 속에만 있는 가장 순결하며 가장 거룩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갈보리로 가는 길을 기쁨의 길로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쁨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 기쁨이 속되고 퇴폐적인 쾌락에 대한 모든 욕망을 소멸시키며,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의 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능히 견디도록 해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다른 모든 즐거움들이 시시해지는 세월동안 우리의 심령을 만족시켜주며, 그분을 계신 그대로 친히 만나뵐 순간을 예비하도록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기쁨이야말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축복(잠 10:22 참조)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시 16:11 참조)의 보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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