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영성신학에로의 이끌림

안영혁 | 2003.06.29 01:12
소위 영성사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을 죽 올려놓고 독자들의 동태를 좀 살펴 보았습니다. 역시 개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군요. 개론에 관심이 많은 것은 우리가 초보이기 때문에 그런 까닭도 있지만, 마음이 조급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영성사를 실어놓은 필자로서는 독자들이 적게 읽고 있는 그 내용이 꼭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제발 좀 읽어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는 것이 독자들의 신상에도 좋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권고의 글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이미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한 바가 있는데, 영성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미묘한 것을 오묘하게 밝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오해가 큽니다. 영성신학이야말로 그 시대 기독교 지성사를 대변할 수 있는 흐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반드시 그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과 힐데브란트 비판이란 장을 하나 두었습니다. 미묘하고 오묘한 것을 찾기로 한다면 이런 장은 참 쓸 데가 없는 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들어가보니 그들도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글을 쓴 저로서도 이 글이 꼭 읽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신중히 읽고 나면 틀림없이 뿌듯함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읽고 나서 별로 기쁨이 없으면 다음부터는 제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해 주십시오.

제 이 글의 요지는 영성을 바라보는 시야를 좀 바꾸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은 사람이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하고도 인생이 뭔가 시원스레 나서지 않아서 마지막 자리에서 다시 시도해보는 전인적 접근입니다. 그런난큼 사람의 가장 깊은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단지 휴식의 글 하나 정도 접해 볼 양으로 영성이라는 말에 접근하면, 이미 도달할 자리가 딱 정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의 자리를 만들기가 쉽지는 않아도, 애쓰고 노력해서 휴식의 자리를 잘 가다듬고 나면,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락하고 더 분명한 휴식처가 될 수 있습니다.

참 요상한 필자 다 보겠다! 그런 소리가 벌써 제 귀에 들려옵니다. 글만 올려 놓으면 독자가 읽는 거지 필자가 이 글 읽어라, 저 글 읽어라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는 것이 벌써 들려옵니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자꾸 남들한테 잔소리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 안쓸 거라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당신도 책 읽고 서평이나 잘 실어봐라 그럴 독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미 말씀한 바가 있는데, 이 글들은 은성 출판사의 기독교 영성 3권을 읽으시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글들입니다. 저는 그런 것이죠. 제가 쓴 이 글들에 뭔가 부족을 느껴서 은성 출판사의 기독교 영성 세 권에로 눈을 돌린다면 서평 사이트의 편집인 면목이 좀 설 것 같다는 것이죠. 그러나 제 글이 그 책들을 베끼거나 그냥 요약한 것은 아닙니다. 더 확연하게 하나의 관점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잡소리가 많아졌습니다만, 힐데브란트 비판 같은 글도 좀 읽어달라는 거죠. 그래야 기독교 문화도 폭을 얻고 깊이도 얻지 않겠나 이거죠. 그러면 영성 신학에 대한 이끌림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저는 영성 신학 강의를 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한 경구가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저는 그런 면에서 원래 개혁가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 참모습으로 드러난 것은 정통 종교개혁에서보다는 오히려 경건주의에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루터와 칼뱅의 영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대로 경건주의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롱조로 불렸던 그 경건주의는 오늘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알기보다는 교회사 속에는 속내가 많은 것이죠. 그런 속내 가운데 제 나름대로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몇 가지 밝혀 놓았는데,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학교 수업 시간에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속내에는 나름대로 심층도 있다는 뜻이죠. 우리가 영성신학에 정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사실 그런 것입니다. 그 속내도 좀 들여다 보고, 또 그 속내의 심층도 들여다 보고, 그래서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도대체 뭔가를 세우고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그 무엇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영성신학에로의 이끌림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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