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5.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과 힐데브란트 비판

안영혁 | 2003.06.29 01:09
5.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과 힐데브란트 비판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을 살피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행17:34에서 보이는 아레오바고의 디오누시오(디오니시우스)로 추정되는 사람의 책들이 발견된 것이다. 디오니시우스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견해는 그가 후일 아테네의 감독이 되었다는 정도의 전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의 저서로 생각되는 몇 권의 책이 발견되면서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논쟁이 일대 혼란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이 책의 진정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직 이 몇 권의 책들이 제기하고 있는 일들만 문제로 남게 된 것이다. 10편의 디오니시우스의 편지와 네 편의 논문이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성품과 관련시켜 말하자면 일종의 단성론적 견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네편의 논문은 각각 「신명론」 「신비신학」 「천상위계론」 「교회 위계론」이다. 신명론은 선, 존재, 생명, 지혜 등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컬어지는 모든 이름들에 대한 신학적 철학적 해석을 하는 논문이다. 신비신학은 영적 지식과 관련하여 자신이 가진 방법론을 말하는데, 주로 부정신학적 관점을 말한다. 천상 위계론은 천상적 존재들의 계급 제도에 관해서 말하고, 교회 위계론은 교회의 의식과 직무들의 배열등에 관하여 말한다. 이 논문들의 개략에서 느낄 수 있는 대로, 이 문서들은 시리아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의 합성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라는 것은 한편 영지주의적 관점을 보이기도 한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을 탐사하는 것이 흥미 있다는 것은 그 문서들이 발견되고 평가되고 영향을 미친 상황 때문이다. 폴 로렘이 평가하듯이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서는 만약에 이 책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디오니시우스의 것이 아니라고 애초에 알려졌다면 하나도 중요한 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위-디오니시우스의 책들은 그 책이 가진 기독교적 진정성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디오니시우스의 이름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며, 오히려 사람들은 그 잘못 알려진 저서가 가지고 있는 단성론적 견해를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근본성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단성론적으로 취하려는 태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실로 인류 전 역사의 한 과제이다. 실상은 말할 수 없이 타락하여 있으면서도 종교에 관한 한 차라리 이 땅과 인생은 엎어버리고 하늘에로 모든 것을 환원하려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모호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단성론적 견해 조차도 조금만 방향을 돌려서 이야기하면 오히려 양성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디오니시우스의 문서들 경우에도 그것은 오히려 단성론이 아니라 양성론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되기도 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구원론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정화와 같은 것인데, 오직 정화에만 실체성을 두면 독단적인 단성론이 되는 것이고, 반면에 정화에로 나아가는 과정에 실체성을 인정하면 그것은 양성론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정화로 나아간다는 것은 즉 천상적인 신적인 빛에로 나아감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무의미로 느끼게 하는 영지주의적 경향이 된다. 반면에 이 땅에 존재하는 현상들에 대하여 실체성을 부여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긍정될 뿐 아니라 인간이 정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단계가 의미있게 드러나게 되어 양성론을 긍정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포괄적으로 평가할 때 위-디우니시우스의 견해는 단성론이 분명하지만, 위-디오니시우스의 견해에 힘입어 한편으로는 이단이라는 규정을 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단성론적 신비주의에 머물려고 했던 사람들의 내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혼돈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과연 누가 더 현실적일까? 그리스도께서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고, 바울이 이 땅에서의 성령의 열매를 명백히 가르친 것에서 양성론이 성경적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의 관점은 항상 신비와 현실 가운데 떠돌면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채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이끌려 갔던 것이다. 우리가 영성을 이야기하고 영성 신학의 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리라. 우리는 한편 양성론을 분명히 해야하고, 한편은 신비를 구하는 단성론적 입장들에서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아야 할 것이다. 진리는 양성론이어도 우리의 마음은 양성론과 단성론을 떠도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진 기독론적 의미를 다시 밝혀보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배타적으로 중시하면 그것은 기독론적으로는 단성론이 된다. 이 땅의 나라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몰고 올 것이다. 그래서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는 하나님 나라 이론은 기독론적으로 말해서 양성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이 문제로 항상 간지러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체 땅도 하늘도 같이 중요하다는 이 묘한 봉합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차라리 하늘을 던져버리고 땅을 취하든지, 아니면 땅을 무의미로 보고 하늘에 귀의하든지 해야하는데, 둘 다 중요하다고 하니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은 말하자면 이런 딜레마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단성론일 수도 있으나 양성론일 수도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이중성, 그러나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담아내는 신학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바로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이었던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은 말하자면 쉽게 풀이된 신플라톤주의였다. 위-디오니시우스는 發出과 復歸라는 신플라톤주의의 개념을 그대로 취한다. 위-디오니시우스와 대체로 같은 입장에 있었던 프로쿨루스는 “모든 결과는 그 원인 속에 남아 있고, 그것에서 발출하고, 그것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발출은 말하자면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존재의 수여이며, 복귀는 다시 천상적 존재에로 돌아가는 구원의 과정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이렇게 한편 하향적이고 한편 상향적인 운동에 있어서의 인식론을 강조한다. 그가 다룬 「천상 위계론」은 발출은 하나님의 포용적 계시이고, 복귀는 앎과 무지를 통한다고 말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인식론적 전개인 것이다. 기독론적으로 말해서 발출의 원인에만 실체성을 두면 단성론이 되고, 복귀의 현상에도 실체성을 두면 양성론이 된다. 발출과 복귀라는 이 두 운동은 통합적으로는 신적인 빛이 “고양시키면서 감추인다”는 의미이다. 이상적인 방향만을 생각한다면 고양만이 중요하겠으나, 감추임을 통하여 그것이 너무 차원높은 것이어서 알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있지 않고 알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는 의미에서 감추임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자면 고양시키면서 감추이는 신적인 빛에 접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우리 존재의 설명이자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이것을 예전의 상징을 통하여 잘 설명하였다. 성찬으로 말하자면, 성찬을 하는 떡과 잔은 물질계에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실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그만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상징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즉 한편 그리스도의 살에로 고양시키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실제 살과 피는 아닌 어떤 감추임을 가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의 방법이라는 방법론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저급한 상징은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징을 통하여 인간을 신적인 실체에로 이끈다. 즉 고양적 복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고양적 복귀는 단계를 거듭하는데, 다음 단계로 나갈 때마다 그 전단계는 부정된다. 그러나 저급한 상징은 반면에 초심자라 할지라도 상승의 길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저급하다 해서 완전히 버려질 이유도 없고, 완전에 가깝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진리의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디오니시우스는 그래서 발출과 복귀라는 기본적인 틀 안에서 ‘정화, 조명, 완전’이라는 단계의 인식론을 제시한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이것을 성례전이나 교회의 계급에 연결시켜 천상위계론이니 교회위계론이니 하는 틀까지 이루었으나, 그 자체가 영성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이런 3단계적 인식론을 보다 일반적인 인식 용어로도 말하는데, 즉 감각에서 개념으로, 다시 개념을 부정하는 것에로 나아가는 인식을 말한다. 여기서도 감각, 개념, 개념부정의 3단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실은 대부분 종교가 가지는 인식 방법론에 가깝다. 이리하여 위-디오니시우스는 탈아(엑스타시)의 관점을 그 결절점마다에서 보여준다. 크게 말해서 신적인 탈아는 발출 과정에서 생기고, 인간의 탈아는 복귀 과정에서 일어난다. 즉 발출 과정에서는 신적인 것이 소원해지고, 반면 복귀 과정에서는 물질적인 요소가 버려지는 탈아가 일어나는 것이다. 후기의 신비주의자들은 이 엑스타시 개념을 그들의 신비주의의 중요개념으로 삼아 그 신비주의를 발전시켜 갔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탈아적 관점은 신비주의를 하나의 침묵에로 이끈다. 감각을 부정하고, 다시 개념을 부정한다. 그리고는 부정조차도 부정하고 보면 이제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으니 곧 침묵이다. 이 위대한 침묵은 영성을 논하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생각하면 이 침묵이라는 개념이 그리 황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내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부분은 그렇다 할지라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시104:24). 탈아가 비록 인식론적으로 유용하다 할지라도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을 던져버린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의 십자가를 무용하게 하는 자리에 이를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땅에서 신비를 구하는 인간의 끝없는 추구의 일단이라고 하겠다.


힐데브란트 비평
힐데브란트(그레고리 7세)를 위-디오니시우스와 함께 이야기하는 방법은 고금에 그 사례가 없을 것이다. 시대가 근접한 것도 아니고, 경향이 닮은 것도 아닌데 그들을 어떻게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둘을 같이 다룰 만한 이유가 있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신비주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힐데브란트는 사상 유례가 없는 카리스마적 정치가로서의 교황이라는 관점에서, 원래적 기독교로 보면 하나의 변종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둘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위-디오니시우스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극단적인 신비주의를 통하여 반면 힐데브란트는 극단적인 세속주의적 정치를 통하여 교회에 영향을 미쳤는데, 교회는 이 둘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평가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가증스런 변종들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이들의 흔적을 교회의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이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교회는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흔적이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처럼 오늘도 현실로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영성은 반드시 가장 숭고한 것을 가장 숭고한 형태로 담은 것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 두 사람에게서 뼈저리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영성의 사표는 아니어도, 타산지석은 된다.

힐데브란트와 헨리 4세 사이의 주도권 다툼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헨리 4세가 카놋사에서 눈밭에 무릎을 꿇은 것은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고, 그 마음 속에 깊이 품은 전략은 삼국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힐데브란트도 정치적이었지만, 마주서는 헨리 4세 또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물론 자신이 대표하는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했지만, 각각이 나름의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힐데브란트 즉 그리고리 7세의 이름으로 불리는 11-12세기에 걸치는 개혁은 그 내용이 어떠했건 교회 개혁의 한 방향이었다. 반면에 헨리 4세는 교회가 세속의 통치권까지 억압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클로비스 이후로 계속되어 온 프랑크 제국, 내지는 라틴 제국의 위용을 교회에다 다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레고리의 개혁은 클로비스의 개종(496)에서부터 보아야 한다. 로마나 로마 교회로 볼 때 이 일은 극히 다행스런 것이었다. 많은 이민족에게 시달렸고 로마는 마침내 멸망했는데, 그 이민족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허약한 로마 황제에게 매달리던 시대를 끝맺을 수 있었고, 교회로서는 정치적 파트너를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메로빙 왕조가 시작되었고, 차후에는 칼 마르텔-피핀-샤를마뉴 대제(그의 치세 안에는 신성로마 제국의 시작도 있다)로 이어지는 카롤링 왕조가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로마 황제는 회교 세력과 마주서야하는 현실 때문에 기독교가 된 라틴 제국을 반기거나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는 교회대로 샤를마뉴 대제등에게는 로마 대관식까지 베풀면서 그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우회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과는 분명 다른 나라였다. 프랑크 왕국에게 있어서 충성이란 왕이 신하들에게 정복한 땅을 나누어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들은 지속적으로 신하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되면 지방에서는 제후가 더 직접적인 지배권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교회는 프랑크의 왕이나 교황보다는 오히려 지방 제후에게 예속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른바 서임권 분쟁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서임권 분쟁의 상황은 이 뿐이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 하에서는 수도원들도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수도원이 처음의 청빈과 포기의 정신을 떠나 세속에 머물러 있고, 세속의 단맛에 탐닉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원이 그럴진대 교회를 담당한 주교좌들이야 이를 말이겠는가? 이제 교회는 단지 지역에 대한 지배권 뿐만 아니라 성직 매매, 축첩 등의 비리까지 낳게 되었다. 그레고리의 개혁은 이런 상황 하에서 부패와 비리가 없는 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이상으로 시작된 것이다. 힐데브란트는 개인적으로 이런 이상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교적 실패로 보였던 말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 자신 안에서 진실했든 그의 방법은 매우 정치적이었고, 그 정치적 방법 때문에 많은 것을 진전시켰으면서도 결국은 그 때문에 개혁이 반석 위에 서지 못했다. 힐데브란트가 문제로 보았던 그 개혁되어야 하는 문제는 종교 개혁가들의 시대에까지 흘러왔고, 종교 개혁가들은 힐데브란트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힐데브란트의 개혁은 끝장을 보지 못한 것이지만, 종교 개혁가들의 개혁도 결국은 기독교 전반을 개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문제는 개혁 교회 내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따라서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지난한 명제가 교회에 남겨지게 된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는 그 말은 참으로 비장하지만, 한편으로는 절망적이라 할만큼 아득한 인상도 남긴다. 그래서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그 투쟁과 함께 다시 오실 주님의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리라.

역사 속에는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사건과 와신상담한 하인리히 4세의 승리라는 사건으로 남아 있지만, 이 드러난 사건의 배후에는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되, 특히 현실적이고 행정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사실 세속의 왕들로서는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교황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가장 중요했지만, 교황으로서는 단지 지배권이 아니라 그에 얽힌 교회의 부패를 척결하려는 교회 중심의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목적에서 보았을 때, 그레고리 7세는 실패한 것 같지만 성공을 하였다. 하인리히 4세와의 자존심을 건 분쟁에서 그는 실제에서는 패배했으나, 그런 분쟁의 와중에 유럽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과 교회에 대한 행정 및 사법권은 교회의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어거스틴의 현실주의가 다시 한 번 나타난 것과 같은 형세로 보인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면 되는 교회가 세속 가운데 살면서 그 세속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나타난 교회의 부패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진 것이고, 힐데브란트로 대변되는 그 시대의 개혁주의자들은 아주 정치 현실적인 방법으로 거기에 대처하였던 것이다.

힐데브란트로서는 교회의 계속적인 부패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신적인 통치 및 관리 체계의 와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고 그 원칙에 있어서 분명했다. “로마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설립하셨다” “오직 로마 교황만 보편적이라고 올바로 불릴 수 있다” “오직 그만이 주교들을 폐위 또는 복권시킬 수 있다” “오직 그만이 황제의 표시를 사용할 수 있다” “그에게는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재판을 받을 수 없다” “그는 백성을 악한 군주들을 섬기는 데서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명제들은 로마 교황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에 근거하였다. 그는 말하자면 로마 교황의 이런 권한을 되살림으로써 부패의 원인들이 제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관리직에 대한 소명 의식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은 그 일을 하는 것의 정점이었는데, 이 관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입각하여 예외 없이 반드시 관철시킴으로써 정의를 세우는 것이었다. 왕국은 제후들의 지배권에 의하여 나뉘어 있고, 교회는 제후들의 호의를 힘입어야 하며, 이런 와중에 다시 주교나 사제들은 부패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부패하여 축첩을 일삼고, 황제는 주교를 임명하는 식의 흐트러진 질서가 척결되어야 개혁의 출발이 가능하다고 그레고리는 보았고, 그것은 그리 틀린 관점은 아니었다.

이리하여 교황 레오 9세로부터 시작되어 계속되던 그레고리의 개혁기 내내 성직 서임권이 문제가 되었고, 특히 그레고리 7세는 여기에 대하여 단호하였다. 그러던 차에 1075년 하인리히 4세가 밀라노 대주교를 임명하자,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의 왕권 행사를 금지시키고, 황제에 대한 백성의 충성 의무를 면제시켜 주었다. 하인리히 4세는 추종자들을 내세우고 오히려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이 아니라 일개 수사”라고 비판하였으나, 교황의 단호한 칙령에 당황한 주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였고, 폐위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카놋사의 마틸다 성문 앞에서 고행자처럼 사흘을 맨발로 서서 교황 알현을 탄원하였다. 클뤼니 대수도원장 위그가 중재에 나섰고, 파문이 풀렸으며, 하인리히 4세는 다시 기회를 잡아서 오히려 나중에는 그레고리 7세를 압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분명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의 자존심 싸움 정도가 아니었다. 클로비스 이후로 이어진 프랑크 왕국에서 교회와 왕간의 세력 균형의 문제였으며, 기왕의 세력권 안에서의 교회의 부패의 향방이 문제였으며,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느낀 개혁적 교황들의 개혁의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그레고리 7세의 시대에는 실로 개혁의 바람이 일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교회의 정신으로 자리잡았는지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의 문제가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사제들도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 한은 개혁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거룩해야할 사제들에게 현실적 요소가 너무 많아졌고, 게다가 현실의 부패가 오히려 교회에서 더 짙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인 한은 이것은 사실 현실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레고리 7세는 말하자면 이 부분에 있어서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가 취한 방법이 부패한 세속 정권과 교회를 떼어놓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서 황제가 교회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교회 내적으로 교회를 관리함을 통해 부패의 요소를 하나 하나 척결하여 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정의 결과를 내었음이 분명하다. 그레고리의 개혁은 많은 수행자들의 교훈보다도 현실적으로는 위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 이후 교회의 유럽에서의 보편적인 지도력이 인정되고, 교회에서의 사법과 행정이 교회의 권한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레고리는 또 사제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주교들을 파면하고 자격없는 사제들의 성례를 부정하는 등의 실제적인 조치들을 했다. 일종의 하향적 구조조정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개혁은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 그런 시각으로 교황이 그렇게 했다면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현실적 정당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평가는 그렇다. 그레고리의 개혁을 추진한 사람들은 교황권을 장악하고 행정적 사법적 중앙집중화의 힘은 상당히 얻었지만, 영적 통일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순수한 의미의 개혁가들은 교회의 일치를 교회의 위계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표면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거룩성은 교회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하여야 한다고 보았으며, 보편성도 상급의 사제들에게 순종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내적 일치를 통하여 얻는 것이라 보았다. 또한 정통성을 의미하는 사도성도 사도직의 승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금욕적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방식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레고리 7세의 개혁은 근본적으로 사제 제도의 확립과 거기에 교황의 전제정치라는 기본 전제 위에 서 있었고, 그것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 7세의 흔적은 영성 수련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영성 수련이 은둔적인 신비 체험으로 충분한가 하는 것이다. 이 은둔적인 신비 체험을 위해서라도 현실과 정치적 조치들은 필수라고 보았던 것이 그레고리 7세의 견해였고, 이 견해는 오늘도 살아있는 하나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정치교육은 하나의 영성수련으로 나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영성 수련을 함에 있어서 이 정치의 문제를 평신도들에게 어떤 형태로 인정하고 또 위임할 것인지 여기에 대하여 답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적으로는 정교분리 문제와 같은 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교회의 사회를 향한 봉사의 사명으로 인하여 결국 정치와 교회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아주 중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은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주제일 뿐 아니라 영성 신학의 한 주제라는 것이다. 영성의 발전을 위해 이 정치적 조치가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답이 없는 물음이지만 던져버릴 수는 없는 물음이다. 이 물음을 계속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를 보다 건전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레고리의 개혁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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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서상진 칼럼]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 서상진 2019.02.28 09:34
549 [서상진 칼럼] 점점 힘들어져 가는 심방 서상진 2019.02.27 14:57
548 [서상진 칼럼] 보여주면 믿을까요? 서상진 2019.02.26 05:10
547 [서상진 칼럼] 누구를 위한 교단인가? 서상진 2019.02.26 05:10
546 모바일 [김성욱 칼럼] < 세상의 시선 > 김성욱 2019.02.23 10:14
545 모바일 [김성욱 칼럼] 인내 김성욱 2019.02.23 10:13
544 [서상진 칼럼] 설교 준비가 되지 않았던 하루 서상진 2019.02.23 10:04
543 [서상진 칼럼] 누구를 위한 번영인가? 서상진 2019.02.21 09:44
542 모바일 [김성욱 칼럼] <하나님의 주권과 순종> 김성욱 2019.02.19 07:08
541 모바일 [김성욱 칼럼] <논쟁의 태도는 사랑이다> 김성욱 2019.02.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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