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2.영성과 성경

안영혁 | 2003.06.29 01:07
2.영성과 성경

복음과 구원
예수께서는 복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었다. 그 복음의 극치는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거기에서 구원은 유효한 사역이 된 것이다. 구원이 유효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유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나서 풀어야 할 문제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 문제를 시종일관 다루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영성은 성경적이고, 성경은 또한 영성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성경은 기독교 영성의 원천이다. 성경이 영성의 원천이라면, 성경은 영성의 방향을 가늠하는 가늠자가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출발한 이래로 영성 운동은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이단적인 것도 많았다. 그 이단성을 가늠하는 것은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영성 훈련이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모한 점도 많겠지만, 영성의 원천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은 영성의 권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영성신학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올바른 영성신학을 견지하기 위해서 영성과 성경의 관계를 천착하여 보아야 한다.

영해라는 말
우리는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뽈 리꾀르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그는 오늘의 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제 2의 순진한 행위”라고 한 바가 있다. 성경을 아주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제 1의 순진한 행위로서 비평가들에게 비판받았다면, 그 비평이 올바른 뜻을 밝혀내었다고 믿는 것은 제 2의 순진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뽈 리꾀르는 오히려 고대적 의미의 영해가 얼마나 풍성한 영성적 해석이었는가 하고 찬탄을 한다. 우리가 성경을 두고 영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어야 한다. 우리가 영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 이해된 영해, 지나치게 우의적인 의미가 아닌, 깊은 영성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함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신비라 불릴 만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황당한 이야기들에로 빠져들자는 것은 아니다. 성경과 관련한 하나님의 감동을 오히려 소박하게 믿는 것이다. 성경 기자들에게 성령은 역사하셨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자에게도 성령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소박한 견해 아닌가? 이리하여 일어나는 것은 가장 잘 비평된 의미를 따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이해이다.

하나님 나라 - 역사적, 종말론적
그러면 예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셨나? 그의 복음을 한 마디로 일컫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이다. 이 말은 어떤 함의를 갖고 있나? 하나님나라의 신학은 오랜 연구사를 거쳐서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직 않은 나라로 불린다.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이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땅의 나라에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나라 궁극의 나라가 들어오는 것이니 종말론이다. 그런데 그 나라는 장차 임하리라는 종말론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나라는 이 땅에 들어왔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했을 때,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을 때 현재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즉 이 말은 하나님나라는 역사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나라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기도문 그대로이다. 그리고도 이 나라는 온전히 임하지 않았다. 장차 임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모든 시점 시점이 종말적 의미를 품고 존재하게 됨을 말한다. 하나님나라가 도적처럼 임하여 오리라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한다. 아직 역사 가운데 오지 않은 나라를 말하면서도 역사에 강한 자극이 되는 종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미래적 종말도 매우 역사적이다. 요컨대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자 역사적인 선포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성도 여기에 부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성은 종말론적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우선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여러 이방 종교들이 일월성신(물리적 자연)에 매달렸던 것에 반해서, 기독교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건들에 주목하였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자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매우 윤리학적이다. 윤리학이라 함은 행위의 지표가 있어서 그것을 이루려한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뜻이 행위의 지표이다. 어떻게 행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
그렇다면 종말은 그저 오는 것인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왔다. 그는 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다.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 나라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살려고 하는 자는 죽어야 할 것이고, 나는 죽음으로 너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십자가의 도를 고린도 전서 1장과 2장에서 적나라하게 밝혀내고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미련한 길이었다. 이 미련한 길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다시 바울은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복음은 어느 누구 하나 제하지 않고 침투되지만, 그 침투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 전도의 미련함은 즉 우리의 십자가로 주어진 것이다. 이 전도의 미련함이 오늘 선교 열풍을 일으켰는데, 예수의 십자가의 영성이 살아있는지는 생각할 문제이다. 19세기는 한 동안 제국주의와 함께 예수가 들어가는 세기였다. 죽은 예수, 미련한 도는 없는 채 힘있는 하늘의 그리스도만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예수의 미련한 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선교자들의 피와 눈물과 노력이 그 뒤에 있었다. 선교에 대하여 어떤 비평을 가하기보다, 이제도 선교에는 전도의 미련함 십자가의 미련함이 있어야 한다는 선교의 영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선교의 영성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관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땅 역사에 와서 종말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하나님과 일치하는 방법이다.

부활은 다시 한 번 역설인데, 즉 미련한 예수의 사역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의 증거이다. 부활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나라를 이른바 단성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죽음 이후에 온 것이다. 부활은 부활만으로 있지 않다. 부활의 권능은 십자가의 미련함이 곧 하나님의 길임을 확증하는 힘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인에게는 십자가의 무능과 부활의 권능이 함께 있다. 부활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부활은 예수께서 악의 세력과 마주 선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축제였으며, 이것은 오늘도 예배에 그대로 남아있다. 예배의 시작인 입당송 시간은 축제의 인사를 나누는 것에 해당한다. 입당송은 단지 예배 전에 음악 가운데 우리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예배 전에 축제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래서 입당송이 흘러나오는 시간에 목사는 성도들과 웃음과 기쁨을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기쁨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기쁨이다.

성령
사도행전에는 이 부활의 기쁨이 초대교회에 연속되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을 특징짓는 것은 성령이다.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적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있다. 성령의 역사로 전파가 일어나는데, 그 전파의 핵심은 부활이었다. 이렇게 부활의 영성은 성령의 시대에도 이어졌다. 성령의 사역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에도 있었다. 구약 성경의 성령은 차치하고라도,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은 함께 하셨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는데,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부활과 오순절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부활은 그가 종말적 메시아라는 증거였으며, 그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오순절 사건이며, 그 이후의 기독교인들도 바로 이 성령의 부음을 받는 것이다. 이리하여 재림의 지연은 기독교인이 그냥 내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의 오심을 말하는 것이었고, 성령이 바로 그 보혜사였다. 따라서 부활과 승천 후에도 성도들은 성령으로 인하여 신령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재림의 지연은 설명될 수 있다.

영적 공동체인 교회
성령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 성령의 교제는 차별이 없었다. 은사가 무엇이든, 혈통이 어떠하든,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성령 안에서 누구나 하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런 차별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일어났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백부장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여인들이 주를 바라보며 안타까이 눈물 흘리는 그런 일체감을 초대교회는 가지고 있었다. 성령은 그와 같이 성도와 그리스도의 교제를 열어주고, 성도간의 평등하고 하나된 교제를 열어주는 분이다. 교회의 입장에서 “성령은 교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자체가 그렇다. 오순절 성령은 혼자 깊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았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임하셨다. 성령 강림은 예수께서 가신 이후 최대의 영성적 사건이었으며, 그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기반하여 일어났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인식되었고, 그 성령은 교제이며 그래서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성은 교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은 개인의 영성이 아니며, 교회의 영성이다. 교회는 교훈과 예배와 은혜를 마련해주는 도구라기 보다는 세상과는 다른 신분을 마련해주는 기관인 것이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에는 성령 안에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
영성이 공동체적 영성이라고 했을 때 그 영성의 출발점을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세례가 아니겠는가? 세례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세상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모시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초를 갖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다 그렇게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가 되며,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거나, 혹은 심정적으로 보다 가까운 사람을 얻게 되었다는 것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종말론적 인간이 태어나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존재론은 다른 것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론에 기대게 되는 것이다. 세례는 매우 교회론적인 영성의 기제이자,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교회의 제도였다. 그 존재론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일치이고, 이것은 영성의 원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세례는 옛사람의 흔적을 씻어내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면, 새로운 존재를 인치는 제도는 성찬이다. 성찬은 흩어져있는 지체들을 한 자리로 불러모으는 사건이었다. 즉 성찬에서 주의 몸을 나누면서 교회는 또 한 몸임을 확인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하나인 것이 교회이다. 성찬도 그런 의미에서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한 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성찬이었다. 세례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었다면, 성찬은 새 사람된 정체성을 확인하여 준다. 이 새 사람이란 역시 하나님과 일치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입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성찬의 영성적 의미이다. 이리하여 성찬은 교회의 신학에 아주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첫째는 모든 지체들이 동일한 장소에 모여야 했으며, 둘째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로 가림이 없이 모두가 하나였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 성찬을 이끄는 상징적인 역할의 사람이 있었으니 이로하여 성직자와 평신도가 나뉠 상황이 마련된 것이었다. 성찬을 인도하는 이는 성직자였고, 이끎을 받는 사람은 평신도였다.

결어
우리가 영성적이 된다 함은 곧 구원을 소원하는 자가 된다 함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구하고 그 일치를 통해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고, 그 핵심은 하나님나라였다.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설적으로 확인되었으나, 재림의 지연 가운데 성령의 감동으로 인하여 지속되었고, 그 영성은 매우 교회적인 것이었다. 이 성령의 지키심 가운데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행하면서 그 영성적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영성에 있어서 말씀과 성례의 중요성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 성례의 상징성을 카톨릭에서 너무 남발한 것이 7성사로 형성되게 되었으나, 그 상징성 자체가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왜 교회의 개혁 교회가 말하는 교회의 표지가 말씀과 성례인지 우리는 영성신학적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1,021개(24/52페이지)
편집자 칼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61 [서상진 칼럼] 은혜와 감사 서상진 2019.03.17 09:32
560 모바일 [문양호 칼럼] 초과중량 문양호 2019.03.14 15:04
559 [서중한 칼럼] 내 삶의 중심을 내어 드리라 서중한 2019.03.12 18:32
558 [송광택 칼럼] 스타벅스 웨이, 조셉 미첼리 지음, 현대지성 사진 첨부파일 송광택 2019.03.09 23:54
557 [서상진 칼럼] 바로 알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서상진 2019.03.08 05:07
556 [서상진 칼럼] 무서운 사람 서상진 2019.03.07 09:22
555 [서상진 칼럼] 고난은 이 때를 위함입니다. 서상진 2019.03.06 05:15
554 모바일 [김성욱 칼럼] <복음, 교회 회복의 본질 > 김성욱 2019.03.05 10:52
553 [서상진 칼럼]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서상진 2019.03.03 09:54
552 [서중한 칼럼] No Jesus phobia(예수중독) 서중한 2019.03.01 20:29
551 [서상진 칼럼]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 서상진 2019.03.01 08:10
550 [서상진 칼럼]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 서상진 2019.02.28 09:34
549 [서상진 칼럼] 점점 힘들어져 가는 심방 서상진 2019.02.27 14:57
548 [서상진 칼럼] 보여주면 믿을까요? 서상진 2019.02.26 05:10
547 [서상진 칼럼] 누구를 위한 교단인가? 서상진 2019.02.26 05:10
546 모바일 [김성욱 칼럼] < 세상의 시선 > 김성욱 2019.02.23 10:14
545 모바일 [김성욱 칼럼] 인내 김성욱 2019.02.23 10:13
544 [서상진 칼럼] 설교 준비가 되지 않았던 하루 서상진 2019.02.23 10:04
543 [서상진 칼럼] 누구를 위한 번영인가? 서상진 2019.02.21 09:44
542 모바일 [김성욱 칼럼] <하나님의 주권과 순종> 김성욱 2019.02.19 07:08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