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1.영성의 개념과 역사

안영혁 | 2003.06.29 01:07
<반성문 먼저>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시작한 크리스천 북뉴스의 편집위원이면서, 뿐만 아니라 편집인이면서 변변한 글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성합니다.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요놈의 컴퓨터를 사람들이 얼마나 닮으려고 하는지 그바람에 더 바쁜 듯하니 부디 우리의 사이버 운동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은 영성에 관련된 글들을 죽 올려보려고 합니다. 이 글들은 실은 2003년 총회신학원에서 강의한 영성신학 강의안입니다. 많은 부분은 은성출판사에서 나온 기독교 영성 3권의 책에 기대서 썼습니다. 때로는 꽤 긴 인용도 했는데, 그래도 큰 흐름에서는 제 나름의 평가를 중심으로 쓴 강의안입니다. 시대마다 영성을 다시 생각해야했던 속내를 밝혀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전체가 10강인데, 오늘 2003년 5월 22일에 8강까지를 올리고, 남은 2강은 차츰 올리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시고 대신에 이 긴 글들에서 은혜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영성의 개념과 역사

영성신학의 자리
영성신학은 하나님은 누구이며,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탐구하는 학이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를 논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이며,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인식론이다. 이 인식에 있어서 단적으로 이성만을 사용하거나 감성만을 사용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열어드림으로 그가 내게 들어오시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성신학은 그만의 인식론을 가졌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 인식이 일어난다. 그 자리를 무엇이라 부를까? 거기를 영성이라고 일단 불러보기로 하자. 이 자리는 때로 이성적이기도 하고, 때로 감성적이기도 하다. 때로는 강한 의지를 중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성은 이들 중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일어나는데, 그리고 거기에서 일치가 일어나는데, 그것을 인간 철학 내지는 인식론의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일단 이 지점을 신비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성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신비적 만남을 탐구하는 학이다.


일치의 개념
어느 종교없이 이런 신비는 논의되었다. 신비는 단적으로 존재의 일치이다. 서로 초월하여 있는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것을 신비라 부른다. 여기에는 어떤 신적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이렇게 하나가 된다는 관점에서 소위 일원론이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신과 인간이 따로 있는 것 같으나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도 불교도 이런 점에서는 일치와 일원론을 표방하게 되는데, 전적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기독교를 인식론적 일원론, 불교를 존재론적 일원론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인간이 성불하여 바로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이다. 아주 그럴듯하다. 반면에 기독교는 끝내 그런 일치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죄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다. 인식적으로 아주 가까이 갈 수는 있어도 존재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또한 그럴듯한 해명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어떤 경우를 보아도 단지 인식론적 일원론이라고 하고 끝낼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야말로 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이지, 그것만이 존재론적 일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존재론적 일원론이 되어야하는 것도 아니지만, 불교에만 존재론적 일원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그럴듯하게 치장하는 것은 그리 바르지 못한 규정으로 보인다. 신비주의는 어떤 의미로든 존재와 인식의 일치가 일어난다. 우리는 그런 일치를 규정하거나, 혹은 그 현상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 안에서의 학이다.

이제는 영성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된 양상과 관련하여 영성신학에 접근해보자.

그 오래된 말, 영성
  개신교 복음주의권 신학의 입장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은 실은 좀 낯설다. 요즈음 카톨릭 교회들에서는 성령 세미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오순절적인 즉각적 성령 은사에 매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카톨릭이야말로 영성 신학을 꾸준히 지속하여 왔다. 중세의 신학은 통째로 영성 신학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을 보다 완결된 신학으로 정리한 아우구스티누스나, 철학적 깊이를 보이고 신의 존재론적 증명이라는 오묘한 논설을 폈던 안셀무스나, 심지어는 중세철학의 종합이라 일컬어지는 아퀴나스까지에도 영성가라는 이름은 그리 어색하지가 않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에서 시작되는 수행 영성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카톨릭 교회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그리고 이런 많은 사람들의 이름보다도 더 카톨릭을 영성이라는 말에 가깝도록 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수도원이다. 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을 이끄는 정신이 교황청에 있지 않고 수도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 정치가들의 겸손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인정일 것이다. 그 수도원에서 아무리 교회 정치의 대가가 나오고 교황이 나왔다 할지라도 수도원은 끝없이 그 시대를 치유하는 정신과 영성가를 낳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타락해 가는 교회에 청량제였다. 이 수도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카톨릭은 긴 세월의 영성을 직접 닦아왔고, 또 신학을 형성시켜온 것이다.

서로 엇갈리는 개신교와 카톨릭
  그런데 왜 오늘의 카톨릭교회들이 소위 성령세미나에 매료되고 있는가?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신교의 오순절적인 성령운동이 그들에게 훨씬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성령 세미나의 원천이 무엇이든, 특히 도시라는 환경 아래서 시급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적이라는 이름 그대로 초대 교회의 카리스마적 성령님에 대한 갈망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선교와 말씀과 부활에 그 핵심이 모아져 있다. 성령을 통한 개인의 치유 은사 같은 것은 오히려 아주 지엽적이다. 강하게 역사했던 것이 차이이지,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선교와 말씀과 부활이라는 기독교 원래의 방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개신교 교회의 성령운동이 지나친 기복주의로 인하여 일각에서 염증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카톨릭의 성령세미나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지켜볼 일이다. 카톨릭도 그만큼 대중적 종교로서의 문제를 고민해야할 자리에 온 것이다.
  카톨릭은 성령 세미나를 배워가고 있는데, 반대로 개신교 교회에서는 요즈음 영성에 대한 관심이 조용히 그러나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권 주변의 인사들이 영성 수련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다소 전진적인 신학자들이 영성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냥 나름대로 사는가보다 했던 은성 수도원의 엄두섭 목사가 사람들 사이에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는 것도 이런 일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학자들이 반드시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면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카톨릭과는 정반대 방향에서의 반성이 있는 것이다. 카톨릭은 정적주의적인 영성에 관심을 기울여 오다가 대중적 영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령 세미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개신교는 신령파적인 오순절 성령운동에서 뭔가 들뜨지 않은 영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사도행전의 카리스마적 성령운동에서 바울 등에서 보이는 일상적 성령의 사역에로 옮겨간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에서 일어나는 영성운동이 카톨릭의 정적을 뒤따르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상 가운데서 차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묵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최근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영적 운동을 영성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일컫는 경향이 있어서, 새로운 카리스마적 성령운동들도 영성운동이라는 이름을 취하게도 된다. 영성이라는 말이 그것을 품지 못할 이유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그 묘하게 나뉘어 있었던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의 차별성을 두는 마당에서는 이런 혼란스런 용어 사용은 조금 주의해야할 부분이다.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의 개념적 차이
  그래서 성령운동이라는 말과 영성운동이라는 말의 차이를 좀 짚어두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성령운동은 그 출발부터가 매우 개신교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오순절파 교회가 성령이라는 개념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사용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성령은 그보다는 신학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는 점에 착안해 보면 종교개혁 때에 성령은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권위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개혁가들은 오직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그 때 카톨릭은 철학적 노회(爐灰)함으로 이 국면에 대응했다. 그러면 그 말씀의 권위를 세우는 곳은 어디인가 하고 물었다. 물론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었다. 더 나쁜 것은 그 교회의 지배구조라는 인식을 카톨릭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혁가들은 말씀의 권위가 성령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칼뱅 신학의 꾸준한 의미도 여기에 근거하여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기독교강요에서 성령론 부분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카톨릭은 여전히 교권적 흐름에 따라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여 신학을 하여 왔고, 개신교는 성령론을 발전시켜 왔다. 원하든 원치 않든 신학 내용의 교류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오늘에 이르러 그 차이들이 줄어든다 하여도 카톨릭과 개신교는 분명 그런 차이에 입각해서 서 있었다. 개신교는 성령에 의존했고, 카톨릭은 교회에 의존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카톨릭의 수도원 전통은 이어져 갔다. 그러니까 성령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개신교를 특징짓는 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영적 관점에서 카톨릭을 이끌었던 개념은 영성이라는 개념이다. 카톨릭은 이미 말한 대로 정치라는 관점에서 교황청과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수도원이라는 아주 뚜렷한 두 영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교회는 상황에 따라 수도원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고, 교황청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 수도원은 영적인 길을 계속 걸어갔고, 그 추구는 영성이었다. 성령운동이 보다 성령은사론적 운동이었다면, 영성은 보다 존재론적인 운동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만남이라는 다소간 철학적인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이라고 해서 신학이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사실 주류에 대한 설명은 그와 같다 하더라도 성령운동과 영성운동이 어찌 전혀 다른 것으로 치부될 수야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면은 적어도 종교 개혁기까지만 해도 성령운동이 보다 대중적이었다면, 영성운동은 제한된 수도원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종교 개혁의 성격을 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톨릭은 기나긴 세월 수도원에서 영성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그 공급자들은 수많은 감동들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은 엘리트들이었다. 반면에 개신교의 성령론은 기본적으로 카톨릭의 정치적 음흉성과 종교적 엘리트주의 지나친 순명과 정적주의에 대한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각각이 어떤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하여간 개신교의 성령론은 그에 대한 반대였다.

대중화된 성령운동의 모습
  그런데 오늘 상당수의 개신교도들이 영성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종교개혁의 피를 몰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정치와도 꼭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중의 정치가 우민정치가 될 우려를 지녔다고 그 옛날에 지적한 바가 있다. 이것은 그냥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을 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성령론에 입각한 대중적 운동은 분명 무엇인가 베일에 가린 듯한 존재론적 운동으로서의 영성운동의 제한성을 씻어내는 것이었다. 개신교의 성령론은 말하자면 영적 세계에 대한 투명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통이야말로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허다한 무리는 그 자체로서 항상 정당성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행복을 얻어야 하는 당위성은 항상 있으나, 그들이 항상 행복을 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도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의 행복은 당위적이지만, 대중이 당위를 내면적으로 갖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영성은 너무 천박하여졌고, 너무나 기복에 기울었다. 이 기복에서 복의 개념은 천국의 축복이 아니라 세상의 축복이라는 전도된 가치였다. 죤 윔버등으로 비롯되는 빈야드 교회나, 그와 관련을 가진 토론토 토네이도 같은 경우에도 이런 면에 있어서 오순절파 성령운동의 개념을 하나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오히려 달라진 것은 현대적 문화관이 그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다원종교 문화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런 개념의 교회들은 유명 무명을 막론하고 수없이 생겨나고 있고, 아마 교회 문화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한 때는 바하의 교회 음악이 딴따라로 취급받았다는 음악사의 사실을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변화는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영향을 남기고야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영적인 문제들을 짚어보고 본질적이고도 현상적으로 유효한 영성운동이 무엇일까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잘 나가고 있는 교회 문화의 한 현상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면서 대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성령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성령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총체적으로 되물으며, 카톨릭에서 오랜 세월 이어져왔고 암암리에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온 영성이라는 개념을 주의를 기울여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영성신학으로
  물론 여기에도 문화적 현상은 있다. 이제 성령운동이 아니라 영성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웬만한 학자들의 상투적 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복적 신앙을 정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안적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바로 영성운동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단지 기복신앙에 대한 반발로만 영성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영성의 기반은 너무나 약한 것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어디에 발 디디고 있을까?
  독일의 교육신학자 니프코는 여기에 중요한 시사점 하나를 제공한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치는 신학의 흐름을 이렇게 요약한다. 1930년대까지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개를 쳤다. 인간이 신학의 중요한 주제였고, 인간은 긍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을 긍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었고, 양차 대전의 시기와 그 이후 60년대까지는 전적타자로서의 하나님께 의지해야하는 신정통 신학이 신학의 주류였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이 이후로는 사람들은 어떤 방향의 신학을 하든 자유주의 신학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지고 인간을 긍정하는 일은 이제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은 60년대 이후를 맞았다. 그런데 신정통 신학으로서는 인간의 모든 면을 다 받아낼 수가 없었다. 신학은 다시 인간의 문제를 주제로 삼기 시작했는데, 그 방식은 자유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을 긍정하는 자유주의적 형이상학이 제거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니프코는 경험의 인간이라는 말을 붙였다. 근자에 와서 상담학이 실천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과거 어느 시기에도 없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은 그 경험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해야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영성 경험, 그래서 일상
  이 경험이라는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말로 일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참으로 느즈런해보이는 개념이지만, 이 개념이 오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일상 가운데서 경험을 갖고 있다. 경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꽤 극단적인 것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늘상 겪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도 있다. 그래서 경험이라는 말과 일상이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운동이 이런 개념을 전혀 도외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운동은 어쨌든 성령의 카리스마적 체험을 핵으로 하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항상 일상을 뛰어넘으려 했고, 일상은 넘어 서야할 삶의 장이었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참으로 비일상의 신학이었다. 그러고보면 60년대 이후 거의 30년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일상의 신학과 비일상의 신학 사이에서 무척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우리가 이른 바 영성신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비일상의 신학으로서의 성령운동의 맞은 편에 있는 일상에 관심을 두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내내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가져왔고, 그래서 우리 삶 전체를 비일상으로 띄워 올리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일상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성운동은 우리의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일상성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개신교에서 일고 있는 영성운동의 의미가 다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선은 감추어지고, 정적에 빠져 있고, 심지어는 음흉함까지 느끼게 했던 중세적 영성을 투명성에로 이끌고 나온 성령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일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운동은 대중화 상황에서 너무나 기복적으로 흘러버렸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영적으로 너무나 비일상화되고, 기복적인 것과 하나님의 신비를 연결시켜서 기독교적 영성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형편에 놓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복되어야 할 것은 원래의 의도대로 투명하고 일상을 견인해 내는 영성이어야 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영성운동은 의미를 크게 가지는 것이다. 오늘의 영성 신학은 어떤 형태로든 일상성을 담보해내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과 영성의 일치
  영성이라는 말에 대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 말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성령운동을 열심히 펼쳐왔고 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우선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거북스러울 수 있고, 그것은 충분한 이유를 가졌다. 말 그대로 영성이란 인간의 영적 성품을 말한다. 매우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성령이라 하면 삼위 중 한 위를 말씀한다. 그것은 매우 하나님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소위 인간중심적이다 신중심적이다 하는 논의로 들어가면 영성이라는 말은 상당히 껄끄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성전을 두고 예수께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안다. 만민이란 바로 인간을 말하는 것이면서도, 기도는 기도가 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도 같이 드러낸다. 그래서 그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나타나는 어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성령이라는 말에는 성령의 내주를 갈망하는 사람이 보이고, 영성이라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들어와 계시다는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이라는 말이 개념적으로 자유롭듯이 영성이라는 말도 개념적으로 자유로운 말이다. 성령이라는 말을 써야 더 나의 겸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써도 좋겠다. 단지 오늘 영성운동이라는 말로 혹은 영성이라는 말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독교문화적 합의를 벽안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종합적으로 보면 그렇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흘러가고 50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전통을 우리는 오직 개혁 교회의 역사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그럴 수가 없다. 신학교에서 초대교회사를 배우고 있는 것만 해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초대교회의 역사는 어쨌든 기독교의 역사이다. 여기에 무슨 잘못된 전통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이단적 전통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전통을 그냥 던져버릴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야 어찌 우리가 그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말하자면 영성신학을 펼칠 자리를 이제 잡은 것이다.

영성 개념의 흐름
  칼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이라는 글에서 항상 복음이 율법에 앞서야 함을 정당하게 말하였다. 율법이 흘러오다가 변하여 복음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복음이 왔다. 그리고 그 시야를 가지고 율법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우리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유대교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영성신학도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구약의 어떤 영적인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의 등장으로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영성의 방향을 우리가 먼저 갖고, 그 후에 그 조망을 가지고 구약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영성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성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면 이제 교회사적 의미의 영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개신교만의 전혀 다른 영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모든 전통에서 영성에 접근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고대와 중세의 영성을 먼저 살펴보아야겠는데, 이름난 대 신학자들이 보여주는 보다 학문적인 영성이 있겠고, 안토니우스를 출발점으로 하는 수행 영성가들의 영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도 영성이라 할까 싶지만, 중세의 그 권위적 무게 아래서도 인간의 자유를 추구했던 흔적도 보이는데, 그것도 우리의 영성 연구에 어떤 시사점을 줄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르와 아벨라르의 투쟁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는 개신교가 개신교 되게 했던 개혁가들의 영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와중에는 특히 영성가로 그리 명성이 높지는 않으나 개신교의 개혁 성향을 지니면서 포괄적으로 전세계를 아우르려고 했던 코메니우스 같은 이의 영성에 대하여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경건주의가 있었고, 오순절 교회가 있었다. 이 각각을 살펴보면 이들이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영성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모색 가운데 오늘 우리 교회의 나갈 바가 확인이 될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의 흔적을 충실히 찾아보고 그 종합으로서 우리의 방향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타학문과의 관계 속에서
  인문학적으로도 영성이라는 부분을 분명히 하여두는 것은 필요한 것 같다. 영성은 그 개념의 깊이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여러 가지 인간의 활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 봉사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믿음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열광적 기도가 될 수도 있으며, 침묵기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여간 그 깊이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라 할 수도 있고 일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종교학적으로 말해서 이런 일치를 추구하는 사조는 신비주의이다. 그러니까 그 출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영성신학은 신비주의적 흐름과 맥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전통에는 신비주의 전통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단처럼 던져둘 수는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전통이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기독교 초기의 한 큰 흐름이었던 영지주의 같은 경우도 사실 우리의 관심을 끈다. 신약성경이 영지주의에 대해서 확실히 반대의 입장을 갖기는 했지만, 아직 기독교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래도 예수를 따른다는 입장 아래 어떤 경우는 극단적인 순수성을 추구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모두가 이단사설이 아니라면 영성에 대하여 좀다른 가능성을 비쳐주기도 할 것이라 본다. 신비주의는 영성신학의 관심분야가 되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타종교들의 신비주의를 탐사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어차피 영성이 인간적 면모를 말하는 것이고, 다원종교 상황에서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유사한지를 안다는 면에 있어서 영성의 부분을 확인해본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겉핥기가 될 것 같아서 접어두기로 한다.
  인접학문과의 관련성도 중요할 것 같다. 이미 말한 대로 영성신학은 존재론적인 학문이었다. 그래서 이를 다루는 분야도 실천적인 분야보다는 조직적인 분야였다. 말하자면 영성신학은 조직신학의 한 분야였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조직적 부분에서 영성신학을 말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각 시대의 영성을 밝혀낸다는 것은 존재론과 조직신학 내에 들어있는 영성의 부분을 추려내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성신학의 관심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미 성령론이 있다. 그런데도 영성신학을 하는 것은 실천적 관심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삶에 그것을 펼쳐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인간의 변에서 마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마음의 어떤 상태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가, 혹은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상당히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졌지만 우리의 문제로 볼 때 마음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마음을 사회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그저 사람의 마음을 읽고서 그것을 이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체 사람의 마음은 사회과학적으로 말해서 어떤 실체이며, 어떤 대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혹은 생물학적으로 혹은 현상학적으로 대답하지만 하여간 마음의 현상을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해본 것이 바로 심리학이다. 그리고 이 심리학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실제적인 모습을 듣고 치료해보려 한 것이 상담학이다. 그런 면에서 영성신학은 심리학과 상담학의 도움을 입거나, 서로 정보를 교환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영성신학은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인간의 마음을 사회과학적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이 심리학이요 상담학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신학과 상담학을 접목시켜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으로 한편으로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접근해가야 한다.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이와 관련한 학문적 이데올로기도 있지만, 인간의 마음에 접근해간다는 면에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성신학은 기본적으로 심리학적 상담학적 요소를 요청하고, 실제 교회 생활이나 목회에 있어서도 이 부분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남은 중요성
  영성신학을 탐구하면서 주의해야할 부분도 있다. 우선 영성신학이 21세기 신학을 총괄하는 한 분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는 많은 신학의 조류들이 지나갔다. 사회과학적으로는 무엇보다 유물론이 인간의 길로써 엄청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신학도 이런 조류들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단지 이들 조류들에 신학이 실망을 느꼈다고 할 수는 없다. 항상 그 시대에 가장 현실적이고도 중요한 조류로 일어났던 사상과 신학을 이제 와서 완결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여간 새 시대는 항상 새 사조와 새 신학을 요청한다. 신학에 있어서는 안팏으로 특히 영성신학이 많이 요청되었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원종교 상황에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 및 대처라는 국면을 가졌다. 영성이란 기독교의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바깥에까지 나갈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변죽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에까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20세기는 계몽주의 말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주지적이고 주체적인 신학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이 보다 감성적이고 보다 신비적인 신학으로서 영성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영성신학이 아무리 조직신학의 한 분야였다 하더라도 이런 인상을 지워낼 수는 없다. 물론 영성신학은 총체로서의 인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총체라는 것은 꼭 총체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총체이기 때문에 그 동안의 신학에서 부족했던 감성이나 신비적인 요소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뒤집어 놓고 보면 그렇기 때문에 영성신학은 여전히 20세기의 주지적 신학의 색깔도 담고 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영성신학을 바라보며 가지는 의구심도 있다. 영성신학은 일종의 보수회귀일 수 있다. 카톨릭 교회는 꼭 수도원이 아닐지라도 항상 신비적 영성을 기려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얼마간 현실의 논리를 부정하거나 무색케 하는 논리가 들어 있었다. 현실적 필요가 절대적인 자리를 청빈이니 비움이니 순명이니 하는 말로 환원하던 일이 있었다. 이것은 종교라는 것 일반이 가진 태도이기도 하다. 특히나 이런 부분에 있어 카톨릭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어찌보면 오늘 카톨릭의 종교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종교적 태도는 금방 계급성을 띠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영성이니 신비니 하는 말이 순명이니 청빈이니 하는 말과 연결되면서 현재의 사회 구조를 그냥 가지고 가자는 이야기를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조를 그리 찬동도 하지 않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도 그저 헛된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결국은 현재의 가진 자들 편에 서버리는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영성신학은 분명히 그런 위험을 안고 있다.
  오늘 개신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배 갱신 운동이 카톨릭화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카톨릭이 오랜 동안 가져온 종교 미학적 관점도 오늘 개신교도들을 상당히 매료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대중적이고 민중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에로 이어지는 것인지 두렵게 느껴진다. 또 하나의 아주 고급화한 환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개혁가들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성향에 대하여 우리는 의심하여 보아야 한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영성적 흐름의 핵심에 서게 될까 두렵다. 애초의 영성 그대로 아주 적나라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아주 적나라하게 예수의 삶을 사는 영성은 그래서 언제나 요청된다. 미학적 가미가 없는 가난이 교회에 요청되는 것이며, 예민하게 준비된 문화적 터치가 없는 고요와 평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신학의 분야가 그렇듯이 영성신학 또한 그 탐구가 끝이 없을 것이다. 영성신학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영성가들에 의하여 진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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