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칼럼

  • 송광택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바울의 교회 글향기도서관 담당 목사
    한국기독교작가협회 고문대표 저서: 목회자 독서법(한언)
    E-mail songrex@hanmail.net

[설교] 용서를 넘어 사랑으로

이종수 | 2005.07.28 13:59
용서를 넘어 사랑으로
[본문 렘 31:1-20]

원수를 친구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다. 미움을 미움으로 갚아서는 원수를 없애지 못한다. 적개심을 없애야만 원수를 없앨 수 있다. 미움의 본성은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랑의 본성은 새롭게 변화시키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사랑에는 변화시키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 마틴 루터 킹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에 상처를 받으며, 때론 고통을 느끼고 분노한다. 이러한 상처와 고통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에서 직장 상사와 동료 사이에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도 입을 수가 있다. 어떤 때는 상처가 너무나 크고 깊어서 감당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 복수하고픈 충동을 느끼며, 마음 속에선 이미 수백 번, 아닌 수천 번도 더 복수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자기 연민과 분노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론 조용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이지만 안으로 숨겨둔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항상 복수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용서의 마음도 품는다. 참으로 우리 속에서 용서하고픈 마음도 가냘프지만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 용서의 마음은 잠시 뿐....용서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당한 일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데, 그저 용서한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품음으로써 그 영혼이 깊은 감옥에 갇힌 듯 파리해져만 간다. 이러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주님이 아닌 자신의 가해자를 깊이 묵상하기(?) 때문에 점점 그 가해자를 닮아간다. 이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에 매몰돼 철저히 황폐해진다’고 말했고, 또한 ‘가장 끔찍한 감옥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영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자유를 누리려면 이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복수인가 용서인가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예레미야 31장 1절부터 20절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토록 힘든 길, 즉 상처와 고통을 받는 길을 허락하시는지, 그리고 그 결국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게 될 것이다.
우선 이 예레미야 31장의 배경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반복적인 불순종과 그로 인한 그들의 패역함을 보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구속하신 목적과 계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이 무궁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피를 통해 맺은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구속함을 받은 이후에 거룩한 삶을 통해 자신들을 여호와의 신부요 아내로 단장하는 것에 실패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아내로서 단장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고,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므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거룩하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이에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로로 사로잡혀가도록 허락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 징계의 방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에는 먼저 그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다시금 정결케 하시고, 그래서 여호와의 신부로서 합당하게 되는 축복을 미리 생각하신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히 회복되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단장하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신다. 참으로 그 때에 쏟아부어주실 은혜를 먼저 생각하신다. 그래서 한 손으론 징계의 손을 드시지만, 징계를 통해 회복케되고 정결케 될 그 날을 내다보시며, 하나님은 다른 손으론 은혜와 축복을 가득히 담고 계신다. 여기 예레미야 31장도 마찬가지로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가기 이전이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있기도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부로서 합당한 성품과 자질과 인격을 온전히 갖추게 될 것을 내다보시면서, 하나님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회복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미리 생각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회복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정결해진 모습을 그리어보신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훈을 위한 하나의 거울이 된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만 만족하고,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만 머물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완전한데 나아가는 일에 실패할 수가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게 된다. 징계라는 말에는 좀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징계라는 말은 우리의 연약함, 실패, 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방법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훈육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훈육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또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 훈육의 방법은 특별히 우리에게 어떤 구체적인 죄문제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서 단장되고,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을 그리어보시면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특히 우리 자신이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와 같을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징계와 훈육의 방법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님을 온전히 닮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와 훈육을 받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전에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으로 위대한 구원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그저 칭의 구원 상태에만 머물러 있으며, 다만 칭의 구원이 전부인양 생각하는데 그친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 때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그야말로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와 같은 상태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그저 소풍 나온 송아지마냥 들판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만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송아지 상태에 있다면,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망치기 십상이다. 농촌에서 멍에를 메어본 일이 없는 송아지를 풀어놓은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자. 밭을 망칠 것이요, 밭가는 기구를 망칠 것이요, 함께 멍에를 멜 다른 소들의 어깨를 다치게 할 것이며, 밭가는 농부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먼저 주님의 멍에를 메고자 해야 하며, 주님께 배워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주님의 멍에를 멜만큼 성숙하지 못할 때, 우리 마음은 성화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지 못한다.
주님의 일은 멍에를 함께 메는 공동사역이며, 또한 팀사역이다. 멍에를 함께 메기 위해선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상태에서 자라야 한다. 우리가 멍에에 익숙해질 때, 곧 영적으로 성숙해질 때, 비로소 함께 같은 멍에를 메고 일을 하게 되며, 비로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적하게 잘 진행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정도가 된다는 것, 이것은 곧 주님을 온전히 닮은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이렇듯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한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래서 성화의 역사는 우선 주님을 배우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배우는 과정이 성화이며, 성화의 결국은 온전히 주님을 닮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를 주님을 온전히 닮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엄청난 파도와 폭풍과 태풍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주님을 배우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다. 주님을 배우는 과정은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상처와 고통을 감내하는 길이다.
이러한 상처와 고통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올 때는, 상대적으로 감당하기 쉽다. 성도들과 교제를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받음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시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자란 것에 비례해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상처와 고통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다른 성도로부터 고난이 온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시험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오는 시련은 참으로 다른 성도에게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나의 사정을 호소할 수 있을 뿐이기에 한편으론 큰 마음의 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상처와 고통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기 보다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올 때, 우리는 한편으론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정도 자란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수준의 연단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시련과 고난에 처할 때, 우선 인내하고 오래 참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우리를 마음의 고통과 짐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련 중에 있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통해 진정 내적인 혁명을 경험하는 것이며, 내면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 중에 내면적인 변화를 경험할 때, 그것이 바로 성화이다. 마음의 변화도 없이 단순히 크게 참고, 또한 오래 참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칭의 상태에서, 성화 상태로 들어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제 말씀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예레미야 31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지만, 곧 다시금 그들이 정결케 되어서, 정결한 처녀와 같이 되어서, 영적으로 회복되어서, 에브라임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복된 날을 내다보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1-2절)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될 그 때를 바라보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지만 아울러 풍성한 은혜를 준비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과 쉼을 얻도록 하시는 일에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이 더 급하시다. 우리가 비록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은혜를 준비하셔서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3절)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단장될 때, 우리는 비록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비록 우리를 시련과 고통 속에 두시지만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단장시키는데 열심이 있는 사랑이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4절)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신부가 되기에 합당한 처녀 이스라엘로 정결케 된 것을 말씀하신다. 다시금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신부로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도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즐거운 무리처럼 춤을 출 것이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5-7절)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이들은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와 훈육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거룩하게 성화된, 또는 성화되어 나올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8-14절)
이제 슬픔이 즐거움으로 바뀌며,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던 그 황폐하고 황량했던 마음은 이제 물댄 동산으로 변화를 입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전에는 근심하였지만,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근심이 없게 된다.
하나님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신다고 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그 심령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며, 온전한 신앙과 믿음이 회복이 된다. 우리 마음이 아주 흡족한 상태가 되며, 하나님의 한 분 만으로 만족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풍성해지게 된다. 이렇게 놀라운 심령의 변화를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은 이제 에브라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에브라임이 요셉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요셉의 첫 번째 아들은 므낫세이다. 므낫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요셉은 두 아들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기를 바랬다. 그리고 장자인 므낫세가 장자권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족장 야곱 앞에 세웠다. 하지만 야곱은 손을 엇갈리게 축복함으로써, 장자권의 축복을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했다. 이로써 하나님은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을 앞세웠다. 왜 그럴까?
므낫세는 단순히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면, 에브라임은 용서를 넘어서 나를 상해하고 가해한 사람을 사랑으로까지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단순히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용서를 넘어서 사랑을 선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은혜를 통하여 두 배 이상의 축복을 하시고, 또한 창성케 하시는 영적인 원리를 가리킨다. 그래서 므낫세는 그저 마음 속에서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에브라임은 우리가 받은 고통과 상처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변화를 받아 더욱 성숙하게 되고, 원수조차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더욱 닮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단지 용서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들을 사랑함으로써, 또한 그들을 사랑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상처를 단지 상처와 고통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승리하여 더욱 풍성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에브라임이 될 때,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두 배, 아니 그 이상으로 창성케 되는 축복을 맛보게 된다.
아 에브라임이여! 우리 교회에 참으로 많은 에브라임이 있기를! 에브라임은 진정으로 겸비해진 영혼을 묘사하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에브라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1,2)
이제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말씀하시는 듯 하다.
“그 겸비해진 자의 마음에 말하노라. 그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그의 인격도 받아들여졌노라. 이제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너 에브라임이여, 이제 주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 네 너를 도우리라. 참으로 너와 함께 하리라.”
이제 에브라임은 이렇게 고백한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풀어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저는 풍성한 중에 있는 모든 은혜의 방편들을 경험해 왔지만, 어떤 수단으로도 전혀 유익을 얻지 못했던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고치려 하셨지만 저는 복종하지 않았고, 또한 저를 가르치셨지만 저는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변화시키셨고, 저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저는 제 안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저는 이전에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제 자신의 악함을 보며,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제 모습의 비열함을 뚜렷이 봅니다. 지금 저는 그토록 분명하게 드러난 은혜를 남용한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낍니다. 심지어 저의 영혼이 예전에 즐거움을 느꼈던 혐오스러운 제 자신의 본성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본성의 악함을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며, 진정한 에브라임이다. 이러한 고백은 확실히 심히 깨어져서 가련하고 상한 심령이 된 사람의 탄식이 분명하다. 이제 하나님의 응답을 주목해보자.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0)
마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나는 너의 모든 은밀한 탄식을 보았다. 나는 네 모든 눈물을 안다. 나는 너의 모든 기도를 들었고, 그 모든 마음의 고충을 보았다. 너의 가련하고 상한 심령과 자비를 얻기 위해 나를 찾고 찾되 간절히 찾았던 너의 겸비한 영혼을 향하여 나의 마음은 타는듯했다. 진실로 나는 이제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얼싸안을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이제 우리가 받은 상처는 이제 남을 받을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는 여유 있는 공간이 된다. 우리는 이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산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참으로 용서는 놀라운 선택이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용기이다. 더욱이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위대함이다.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쏟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가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정말 위대한 삶이 우리에게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용서의 길을 택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름의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서는 용서가 해낼 수 있는 정말 위대한 기적은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이룰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삶은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삶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삶이 주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삶, 그리스도를 닮은 삶, 그리고 풍요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이토록 힘든 길을 굳이 정하신다. 하나님은 멀리 내다보신다. 우리 또한 멀리 내다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진정 용서를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을 선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장래의 에브라임으로 나타나실 것을 내다보신다. 우리 함께 에브라임의 길로 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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